평소 9시 뉴스를 잘 안보는데, 병원에 있으니 할수없이 봤다. 한나라당이 차떼기 수법을 동원해서 돈을 받은 것에 시민들이 흥분했나보다.
"분노를 금할 수가 없고..."
"지금 서민들은 몇만원이 없어 죽어가는데..."
"그 돈이면 남극 대원들에게 쇄빙기를 사줄 수 있다"

그들의 분노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난 어째 뒷북을 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법정선거자금은 국회의원이 8천만원, 대통령선거는 350억원, 별로 현실성이 없는 액수다. 227명을 뽑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인당 수십억의 돈을 뿌리는 게 예사인데, 대통령 선거가 겨우 350억원? 그래서인지 국민들은 각 정당들이 법정선거자금 이하로 돈을 썼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민노당은 제외하고). 한나라당이 대기업 몇곳에서 받은 돈만 해도 500억이 넘지 않는가?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국회의원 월급이 800만원이 고작인데다 제정신이라면 자기 집을 저당잡혀 돈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럼 그 돈은 당연히 기업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기업에게 뜯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누이좋고 매부 좋은 수법이다. 그렇게 해서 줄어든 세금은 결국 국민들의 삥을 뜯어 충당을 하지만, 당장 자기 돈이 나가는 게 아니니 크게 분노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게 지금까지의 정치 풍토였다.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대부분의 정치자금을 기업이 낸다. 미국의 대선 레이스는 사실 누가 더 많은 후원금을 모으느냐에 좌우된다. 우리보다 나은 점은 당당하게 실명으로 돈을 내고, 나중에 결과가 틀어져도 보복을 당하는 일이 없다는 점일게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이 돈을 받은 것에 크게 놀랄 필요가 없다. 액수야 차이가 있을지언정, 당시 민주당도 기업들의 주리를 틀어 돈을 뜯어낸 것은 똑같을 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놀라 까무라친다. "어머나 세상에!" "그럴 수가! 돈을 받다니"
난 의아하다. 이 사람들이 지금 피지에서 왔나? (참고로 피지는 인구가 적어서 돈도 덜들 것으로 생각되는, 나만의 엘도라도다). 피차 다 아는 처지에 왜들 이러시나. "알고보니 돈을 안받았더라"고 하면 놀라야 되는 게 아닌가? 난 처음에 그들이 차떼기라는, 지극히 농촌적인 수법에 놀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게 아니다. 돈을 받은 사실이 놀랍고, 액수가 크다는 것에 분노하는 거다. 참나, 뒷북은.

한나라당이 돈을 받은 사실에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대신 차떼기라는 수법에 감탄했을 뿐이다. 배추를 팔고사는 데 쓰이는 수법을 돈받는 데 쓰는 그 치밀함. 사과상자 수십개로 그 돈을 전달한다고 해봐라. 일일이 나르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런 일이 하두 많아서인지 사과상자를 보는 눈도 곱지 않은데 말이다. 채권으로 돈을 주는 것 역시 세련된 수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삼성이라니까!" <-- 전혀 비아냥이 아님.

우리, 좀더 솔직해지면 좋겠다. 차떼기라는 수법에 감탄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는 "돈을 받다니 뻔뻔하다"고 분노하는 척하지 말자. 피지에서 온 티를 내지 말고, 이런 풍토가 우리 현실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 우리의 정치문화를 개선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자. 평소에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거품 물고 개탄하다가, 무슨 일만 나면 그런 건 전혀 몰랐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이제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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