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사흘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담석이나 위궤양 같은 거면 떳떳이 말하겠지만,

그럴 사정이 못된다. 궁금해도 참으시라. 사흘 정도 입원하는 병이 뭐가 있더라? 그래, 자연분만.

진통이 시작되어 애 낳으러 들어갔다고 생각하며 궁금증을 이겨내시라. 토요일이면, 다시

밝은 햇볕을 볼 수 있을게다.

오늘은 외래에 들러 입원 결정서를 받아가지고 나왔다. 어제 춥게 자서 몸도 안좋고, 날씨도

춥고, 이런 걸로 입원을 해야하는 현실이 속이 상해, 기분전환용으로 영화를 하나 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낭만자객>!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된 계기가 있다. 난 김민종은 가수로도, 배우로도 인정을 안하는지라

전혀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는데, 옆에 있는 여자애 둘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낭만자객> 어때?"

"그거 보는동안 너무너무 웃고, 울기도 했어. 진---짜 재밌어"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집에 가는 길에 그 영화가 생각이 났고, 마침 시간도 절묘하게

맞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아침이라 관객은 열댓명 정도 되었는데, 나같이 혼자 온 백수가 절반은 됐다.

20분 경과: 아무도 웃은 사람 없음.

37분쯤: 한명이 "허 참나"란 말을 함

40분: 한명이 나감.

50분: 역시 아무도 웃지 않음

55분: 한명이 키득 하고 웃다가, 아무도 안웃으니까 웃음을 접었음.

60분; 2명째 나감.

65분: 3명째 나감.

67분: 내가 네번째로 나감.

 

원래 난 본전을 많이 생각하는 놈이다. 시험을 망치는 한이 있어도 영어로 된 원서를 읽어댔던

그런 놈이다. 그런 내가 극장을 뛰쳐나갔다면, 대단히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는가.

윤제균 감독, <두사부일체>, <색즉시공>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니까 보이는 게 없는가.

세상이 그리도 만만해 보이던가. 이딴 거 틀어주면 우리가 다 자지러질 줄 알았겠지?

 



 

여자귀신: 오빠는 날 왜 찍었어?

남자: 어부지리로요.

여자귀신: 오빠, 어부야?

 

이게, 웃긴가? 초등학생들도 이런 유머엔 안웃겠다.

"공무집행으로 일어난 사고니 무죄를 선언한다"

"청나라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도 자기나라로 도망가면 된다니까"

그래, 미선이와 효순이 얘기를 소재로 삼으면 남들이 '문제적 작가'로 봐주고, 졸라 공감할 걸로

생각했는가? 이런 그지같은 영화에 그들의 넋이 이용된 게 난 화가 난다. 쓸데없이 욕하고,

쓸데없이 머리통을 갈기면 우리가 웃을 거라고 생각했냐?

 

30분을 지나면서부터 어제 돈을 인출하던 그 여자애 생각을 했다. 그들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알바, 그렇다. 그들이 찾는 돈은, 호객행위로 받은 돈이었을 게다. 아니, 넣다 뺐다

하면서 계속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터넷 사이트에도 알바가 넘치는데,

이 땅에 믿을 놈은 도대체 누구인가. 영화를 보고 기분이 더 울적해졌다. 아 씨, 입원하기

싫어!

 

* 한가지: 진재영이 재기한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로 연예인이 매장되는

건 O양과 백양에 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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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자객>을 보다가 나와 버렸다. 본전 생각을 유난히 하는 나지만, 때로는 투자한

돈보다 앞으로 투자해야 할 시간이 아까운 때가 있는 법이다. 그걸 본 이유는 누군가가 재미있다고

떠드는 걸 우연히 들은 탓인데, 보고 난 뒤에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알바'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코믹 천하평정"이라고 굵직하게 쓴 광고카피와는 달리, <낭만자객>은 현재 상영중인

20개 영화 중 맥스무비에서 별점평균 5.5(10점 만점)로 꼴찌, 무비스트에서도 16개 중

꼴찌(5.18)를 달리고 있는 3류 영화니까.

그런데, 조만장자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제가 보았던 시간대(20:50)에는 관객도 많았었구 엄청나게 웃는 사람도 있었으며 김민종의

동생이 죽는 장면에서는 객석이 고요---하며
가끔 훌찌럭 거리는 사람들 또한 있었기에 그들이 알바'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별점이 말해주듯 보편적인 정서는 그게 영화냐 하는 것이지만, 그 영화를 진짜로 재미있게 본

사람들의 견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거다. 그 말이 맞다. 그분의 말대로 난 내게 잘못된 정보를 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이 진짜로 그렇게 느꼈다면 문제될 게 없지 않는가?

유치하니 어쩌니 비난이 많았던 <영어완전정복>도 내가 아주 재미있게 본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취향이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바, 영화 추천은 그래서 어렵고, 영화를 볼 때 다른 사람의

말만 너무 믿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깨달음을 주신 조만장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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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실린 영화 선전을 보면 이 영화를 칭찬한 네티즌들의 40자평이 몇개 나와 있다.

하지만 해당 사이트를 가보면 온통 비난 일색, 그런 와중에 좋은 말들만 찾아서 선전에

이용하는 행태가 얄밉기 그지없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었다. 이거, 진짜로 거기서 퍼온 걸까?

시간도 많은데, 하는 맘으로 무비스트 사이트를 뒤졌다. 윽! 진짜 있다!

-아! 어쩌란 말이냐? 심하게 재미있는 이 영화를.... ★★★★★ mviosuit 03.11.30 오후 10:07 추천수_ 3

-한방에 기분을 업시켜줄 수 있는 영화 ★★★★★
roykwon

-시사회 다녀왔습다, 엽기100점, 코믹80점, 눈물85점, 한풀이100점 ★★★★ qnqnwk333 03.11.28 오후 3:13 추천수_ 0 03.11.29 오후 3:24 추천수_ 0


좋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취향이 다르다고 해서 이들을 모조리 알바로 모는 건 나쁜 짓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유래없는 5점대의 별점평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취향이 보편적인 정서와는 크게 다른 것은 그들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취향이 좀 독특한 것을 안다면, 남들이 가는 사이트에 40자평을 남기는 것을 자제하면

안될까? 느낀 점을 쓰지 말라는 것도 파시즘의 일종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독특한 취향이 남들을

현혹시키고, 선전에 이용되고 있지 않는가? 선택은 결국 내가 했으니 남탓만 할 수야 없지만,

어쨌든 내게는 <낭만자객>이 <결혼 이야기 속편> 이후 오랜만에 보는 졸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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