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글씨 작가정신 소설향 1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중학교 후배가..인사차 찾아왔다. 우리 부부는 늘상 하던대로 그 부부를 접대했다....그런데 그 후배가 살며시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게 아닌가. '형님, 그러시면...여자들 버릇 나빠집니다. 형님이 왜 행주를 드십니까? 형님이 부엌 출입하시다뇨?...이러시면 저, 집사람 데리고 형님 댁에 못옵니다'
믿어지시는지? 남자가 행주를 들면 ...여자들 버릇이 나빠진다니.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후배는 뷔페 식당에 가서도...부인에게 음식 가져오게 하는 친구였다]

이윤기님의 산문집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의 한 대목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 이렇게 멋진 분이셨구나!' 하고 말이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님이 서울대병원 역사상 아내의 간병을 도맡아 한 최초의 남편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비슷한 감동을 느꼈었다. 이런 위대한 분들도 집안에서의 남녀평등을 실현하는데, 가부장에 절어 사는 다른 남자들은 뭐가 그리 잘난 걸까?

책 뒤표지에 써있는, '나는 내 딸에게는 지아비의 종이 되라고 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이윤기님은 <진홍글씨>에서 작중 화자의 입을 빌어 남녀평등을 역설한다. 우리 사회의 여성 차별적인 현실을 알기에 그의 말들에 대체로 공감했고, 남녀평등에 관해 거듭된 문제제기를 해대는 남성 작가에게 경외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책들은 흔히 지루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소설적 재미도 그런대로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도 막판 반전이 영화 [식스센스] 저리가라할 수준이다. 내가 읽었던 이윤기의 첫소설이자 그가 명소설가라는 걸 깨닫게 해준 작품 <숨은그림 찾기>에서도 막판 반전이 돋보이는 걸 보면, 이윤기님의 소설이 추구하는 지향은 뒤통수 치기가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원래 98년에 나왔던 것으로, 올해 재판을 내면서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한물간 책들을 다시금 포장해 파는 것에 대해 시큰둥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들 내가 이 소중한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100페이지 남짓한 책이 7천원이나 되는 게 조금 비싸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련다. 책을 읽고난 감동으로 말한다면 '책값이 지금의 한 열배쯤 되어도 나는 사서 읽겠는데, 지금의 책값으로 그를 즐기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참고로 따옴표로 표기된 부분은 다른 책에서 이윤기님이 고 이문구의 책을 칭찬하기 위해 썼던 구절을 베껴온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