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빛나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난 황석영님의 책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그때 그분은 감옥에 가 있었던 탓이다. 출소 후 펴낸 <오래된 정원>과 <손님>은 읽었지만, 그전 작품들은 아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한 터였다.

<심청>을 읽었다. 황석영님의 작품이라면 일단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긴장했는데, 이번 책은 좀 달랐다. 일단, 너무 야했다. 조금 읽다가 '이게 황석영 책 맞나?'는 생각에 책 앞부분을 다시 펴보기도 했다. '번지점프 중에 하다'는 에로 영화의 제목처럼, 이게 황석영의 <심청>이 아니라 에로물 <심창>인 줄 알고. 이 심청은, 우리가 아는 심청이 아니었다. 우리가 어려서 들은,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용왕의 아내가 된다는 이야기보단 황석영님이 쓴 심청이 훨씬 실제에 가깝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효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심청을 거리의 여자로 만들어 놓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앞섰다. 첩으로 팔려간 심청이 자신의 운명에 순응해 기꺼이 보약 역할을 하는 장면부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 납치되어 창녀 생활을 할 때는 짜증이 났다. 우리가 아름답게 간직해온 여인이 만신창이가 되는 느낌이랄까. 심청의 활약이 시작되는 하권에선 그래도 마음이 흐뭇해졌고, 왕자의 부인이 되어 뭔가 대단한 일을 하나보다 하는 기대도 가졌지만, 남편이 죽고난 뒤 심청은 다시금 룸살롱 마담으로 돌아가고, 보육원을 제외하곤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고향에서 생을 마감한다. 책에서 강조되던 심청의 총명함과 뚝심이 발휘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거다. 책을 읽고나서 조금은 허무했던 건 그런 까닭이다. 실제 심청의 삶이 이랬다고 쳐도, 진실보다는 전설을 더 믿고 싶은 게 내 마음인데.

화류계 여인의 삶. 납치해서 팔아놓고는 몸값을 빚으로 떠넘기고, 일을 아무리 해도 빚이 점점 늘어가는 삶. 이러저러한 경로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포주들의 착취를 이 책에서 확인할 때마다 분노가 앞서고,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의 삶이 고달프긴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마음이 짠해서 그렇지 소설적 재미는 매우 탁월해, 주인공이 심청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을 거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을 써본다.

1) 노인이 심청의 기를 흡수하는 대목을 읽고 난 후부터, 대추가 먹기 싫어졌다.
2) 심청의 첫남편 이동유는 천주교에 빠져 심청을 찾을 생각을 포기한다. 종교는 그리도 쉽게 아내를 버리게 만드는가?
3) 그 꿈많고 치밀한 심청이 난수이에서 뭘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돌아온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심청은 얼떨결에 류쿠로 떠나는데, 작가가 강조했던 총명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4) 심청과 결혼했던 왕자, 그는 전 아내가 아픈데 심청과 결혼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무리 왕자라지만, 너무하지 않는가?

앞으로 심청 하면 황석영이 그려낸 심청을 먼저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전설이 깨진 걸 아쉬워하는 게, 내가 아직 철이 덜든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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