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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7년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우리 사회에는 각종 음모론이 횡행했다. 특히 초국적 금융자본으로 인해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았다는 루머가 크게 각광을 받았는데, 김진명이라는 작가는 <하늘이여 땅이여>라는 책을 펴내 시중에 떠돌던 음모론을 기정사실화했다. 음모론에 기대면 마음은 더없이 편해진다. 모든 게 음모고 남의 탓이니, 우리 책임은 실종되어 버린다. 책임이 없으니 반성도 없고, 반성이 없으니 위기가 지나간 뒤 과오는 되풀이된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과학적 사고와 회의주의를 가질 것을, 그리고 온갖 음모론을 배격할 것을 유려한 문체로 주장하고 있다. 그의 글은 분명 문장력이 뛰어나고, 구구절절 옳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무지하게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489쪽에 이르는 이 책을 난 거의 두달에 걸쳐 읽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땐 책 몇권을 읽은 것만큼이나 기뻤다. 길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라면 너무 심할까? 하여튼 인내심이 웬만큼 있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지 못할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음모론에 심취하는 건 음모론은 이해가 쉽고 흥미롭지만, 진실을 말하는 책은 이렇듯 골치가 아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야구 경기 중 3할을 치는 이승엽이 앞선 세번의 타석 중 안타가 없으면 아나운서가 이런다. '하나쯤 칠 때가 됐어요' 하지만 이승엽이 세타석에서 안타를 못친 다음 타석의 타율을 분석해 보면 똑같이 3할에 불과하며, 결코 더 높지 않다. 딸만 셋을 낳은 사람이 또 애를 낳았을 때, 아들일 확률이 절반에 불과하듯이. 하지만 TV나 컴퓨터를 오래 하면 눈이 나빠진다고 믿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비과학적인 사실은 언제나 진실보다 믿음직스럽고, 사람을 곧잘 현혹시킨다.
저자가 어느 잡지에 미국 학생들의 지적 수준이 일본, 한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에 대한 고교생들의 답변 중 이런 게 있다. '다른 나라가 더 잘한다고 해서 뭔가 문제냐. 그들 대부분은 미국으로 건너오고 싶어할 텐데?' 이 대목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해버렸다. '니 잘났다!' 잘사는 나라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오만을 보면서 '니들이 언제까지 잘사나 보자'고 해보지만, 음모론만 횡행하는 우리 사회를 보니 적어도 내가 살아 생전 우리가 미국보다 잘살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개방성과 회의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사고는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며, 과학의 발달은 민주주의의 정착을 가져온다는 저자의 주장은 아직까지 민주화가 공고화되지 못한 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과학만이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