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를 안나온 사람이 의대대학원을 다니면, 의대생들이 배우는 과목 몇개를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 서울대가 먼저 시작했고, 단대도 하고 있다. 난 꼭 그래야하나 싶은

것이, 생화학을 하러 들어온 사람이 힘든 조교 일을 해가면서 해부학이나 병리학 같은 걸

마스터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다, 알아도 인생에 도움될 게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조교를 할 때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우리 과목을 수강하는 비의대 대학원생들은 공부는 거의

안한 채 내 도움을 받아 시험만 치곤 했다.



생화학 조교 중 두명이 이번학기 우리 과목을 신청했다. 그들에게 물었다.
나: 오픈 북으로 시험 볼래요?
그들: 아니요
나: 그럼...제가 내주는 테마로 리포트 낼래요?
그들: 아니요
나: 그럼 뭐하고 싶어요?
그들 중 하나: 영화 감상문 쓰면 안되요?
그들 중 나머지: 네, 그럴께요



그래서 그들은 이번학기 동안 두편의 영화 감상문을 써 내기로 약속을 했다. 내라고 채근한 끝에,

내가 데드라인으로 설정했던 오늘사 리포트를 받았고, 시험감독을 하면서 감상문을 읽었다.

조교 중 한명은 <클래식>과 <장화홍련>을 썼는데, <클래식>의 감상문은 거의 초등생

수준이었다.
[이러이러해서...이러이러하니...(줄거리만 잔뜩 나열한 뒤) 참 재미있었다]
난 혀를 끌끌 찼다. "이게이게 뭐야...B-!"


큰 기대를 안하고 본 두번째 리포트를 읽다가, 난 숨이 넘어갈 뻔했다. 영화를 보고서도 몰랐던

핵심을 그 리포트는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을지라도, 사건의 중심은 갑수이다(김갑수). 그는 자신이

사건의 중심이며 모든 원인의 제공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이 모든 무시무시한 일련의

사건은, 갑수의 자그마한, '단순한 무관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갑수는 젊고

아름다운 정화가 병약한 아내와 사춘기의 두 딸에게 얼마나 위협이 될만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니 세 여자들(엄마와 두 딸, 편집자 주)에게도 그럴거라

쉽게 생각해버리는 거다. 자신에게 극진한 계모를 보며 두 딸에게도 그럴거라 쉽게 믿어버린

장화의 아버지처럼.



가족들 간의 악의없는 단순하고 자그마한 무관심이 가끔 다른 가족구성원에게 굉장히 아픈

상처를 남기곤 한다...가족은, 때론 참 무섭고 아픈 것인가보다]



이걸 읽으면서, 난 비로소 그 영화가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난 다른 교실에서 시험감독을 하는

조교를 찾아가 칭찬을 했다. "정말 잘 썼어요...근데 왜 하나는 저렇게 수준이 낮죠?"

그녀는 웃기만 했다. 난 이 잘쓴 영화평을 내 홈피에 싣고 싶어서, 내게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지만, 당황해하던 그녀는 곧 모든 것을 실토한다. 사실은...인터넷에

뜬 감상문을 베꼈노라고. 그녀는 내 홈피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를 통해 그 비밀이 폭로될까

두려웠던 거다.



아, 그러면 그렇지. 전혀 다른 사람이 쓴 듯한, 천지차이가 나는 리포트를 한사람이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무 순진해서일까? 귀여운 외모를

봐서 불이익을 주지 않고 넘어가기로-A0 정도로-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인터넷이 이렇듯

악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진부한 결론을 나로서는 처음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록 베낀 리포트지만, <장화홍련>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그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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