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가을, 내 첫 책이 나왔다.
지금으로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책인지라 누가 그 책의 존재를 언급할 때마다
“제발 좀 살려달라”며 입을 막고 있지만,
한번 저질러 놓은 일은 돌이킬 수가 없어,
십이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씩 협박을 당한다.
“그 책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겠다”
이것만큼 날 무섭게 하는 말은 없다.
그거야 지금에사 하는 소리고,
막상 책이 나왔을 때의 난 무척이나 기고만장했다.
그런 뻔뻔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난 내 책이 최소한 십만권 정도는 팔릴 줄 알았다.
당시 그 책은 내 모든 것이었고,
책이 나오고 난 뒤의 한달여를 난 공중에 뜬 채로 살았다.
이미 서른살이었던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된 건 그 거품이 꺼지고 난 몇 달 후의 일이다.
책이 나오기 전, 난 친한 친구들에게 말했다.
“책 나오면 사줄 거지?”
그들은 다 그러겠다고 했고, 난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정작 책을 사준 이는 별로 없었고,
“왜 난 책을 안주냐”는 사람들만 주위에 가득했다.
난 그네들한테 서운함을 느꼈고,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책 샀다는 말을 해주는 친구가 어찌나 고맙든지, 그 친구에게 술과 삼겹살을 대접하기까지 했지만
그럴 기회는 별로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플라시보님이 책을 냈다.
플라시보님이 76년생이고 지금이 2008년이니, 내가 책을 처음으로 냈을 때랑 같은 나이다.
내가 그 당시 그랬던 것처럼
플라시보 역시 책이 나와서 기쁘기도 하겠지만-자식 낳는 것만큼은 될 것 같다-
책이 얼마나 팔릴까에 대해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96년의 내겐 재력과 더불어 날 도와준 방송매체가 있었지만
믿고 의지할 곳이라곤 알라딘밖에 없는 플라시보는 그때의 나보다 더 외로울 것이다.
어쩌면 지금 그는 낮기만 한 판매지수에 좌절하며 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지 모른다.
그에게 “너무 실망하지 마라”고 말하긴 쉽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난 그를 아는 사람들이 책을 한권씩이라도 사줬으면 좋겠다.
그에게 즐찾을 한 서재인들이 모두 책을 사준다고 해봤자
그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플라시보가 덜 무서울 수 있으니 말이다.
사족: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플라시보님의 책은 96년에 내가 낸 책과 달리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부끄러워질 게 아니라는 거다.
그건 그가 몇년간의 서재질에 단련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 첫 책이 부끄럽게 나온 이유는 알라딘 서재가 너무 늦게 만들어진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