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덜 깬 아침, 갑자기 TV를 틀었더니 레알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가 챔피언스리그 8강전을 한다. 베컴이 맨유 소속으로 나오는 걸 보니, 오래 전 경기인 것 같다. 하지만 어떤가. 레알의 경기는 오래된 명화처럼 언제 어느때 봐도 재미있는데. 해설자의 말대로 챔피언스리그는 월드컵보다 훨씬 수준높은 경기가 펼쳐지게 마련이고, 레알과 맨유의 경기는 그 중 백미다. 축구를 안좋아하는 사람도 레알의 경기를 보면 그저 감탄만 나오기 마련, 난 90분 동안 TV에 눈을 고정했다.

 

-카를로스: 시종 왼쪽을 누비고 다닌 그는 세계 최고의 윙백다웠다. 돌파도 잘하지만, 이따금씩 날리는 대포알 슈팅은 정말 위력적이었다. 해설자의 말, "왼발에 닿는 것만으로 공포감을 유발하는 선수죠"

 

-라울: 단 한번의 찬스를 어김없이 골로 연결하는 재주는 놀라웠다. 이천수나 박지성이 모자란 게 바로 이건데, 그들은 완벽한 찬스에서 골키퍼를 맞춘다든지 어이없이 찬다든지 그러잖는가. 두 골을 넣은 라울의 모습은 먹이를 채가는 독수리 같았다.

 

-호나우두: 그가 질풍처럼 달릴 때면 맨유의 수비수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삼국지의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할 때 십만대병 사이를 바람처럼 누볐다던데, 그가 호나우두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걸핏하면 넘어지는 우리 선수들과 달리, 호나우두의 모습은 한마리의 적토마였다.

 

-피구: 피구가 센터링 비스무레한 걸 했다. 그런데 그게 휘더니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라울의 두번째 골 역시 피구의 완벽한 어시스트에서 비롯된 것. 이런 선수가 있는 팀이 왜 우리한테 졌지?

 

-지단: 한번 잡으면 매우 여유있게 드리블을 하는데, 두세명을 제끼는 건 기본이다. 그가 있으니 중원이 꽉 차 보인다. 다음은 맨유의 스타들에 대한 소감이다.

-베컴: 그날따라 베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레알이 워낙 잘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해설자에 따르면 "보기 드물게 부진"했단다. 간혹 칼날같은 센터링을 날리긴 했다. 그가 차는 코너킥은 참으로 위력적이던데, 코너킥을 번번히 엉뚱한 곳으로 차는 우리 대표팀 생각이 나 우울했다.

-반 니스탤루이: 동물적 골감각의 소유자인데, 맨유에서 뛴 90경기 중 73골인가를 넣었다나? 전혀 각도가 없는 상태에서 오버헤드 킥도 하는 등, 천부적인 골잡이였다.

-바르테즈: 그래도 이름있는 골키퍼인데, 레알한테 무려 세골이나 먹고 스타일 구겼다.

-긱스: 누군가 그랬단다. 베컴이랑 긱스를 놓고 고르라면 긱스를 고르겠다고. 잘하는지는 모르겠고, 이름이 Giggs, 그러니까 G가 무려 세개다. 이름의 60%가 G인 사람은 처음 본다.

하여간... 참 재미있는 경기였다. 슛은 대개 골문 안쪽을 향했고, 패스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불필요한 중단이 없으니 추가시간도 거의 없고. 팬들이 열광할 만하다. 이런 걸 보다가 어떻게 K리그를 보겠는가? 이제 레알에는 베컴마저 가세, 정말이지 눈이 부신다. 혼자서 미드필더를 차지하려 고군분투하던 베컴, 이제 든든한 동료들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래서 이런 광고도 찍었을 거다. "나를 지배하라! 그러면 경기를 지배할 것이다"라는 광고.

궁금한 건, 베컴이 가세했는데도 레알이 비록 선두를 달리긴 하지만 전승이 아니라는 거다. 비기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패배한 게 3번인가 된다. 아니 어떻게 그 멤버를 하고서 질 수가 있지? 공은 둥글어서? 그나저나 레알 감독은 좋겠다. 안그래도 야구에 비해 축구감독은 하는 게 없는데, 멤버까지 저리 좋으니 무슨 고민이 있을까? 다들 알아서 잘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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