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는 매일 일어난다.
‘어제 교통사고가 20건 일어났습니다’라는 뉴스를 봐도 놀라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달라서,
경미한 접촉사고라 할지라도 눈앞에서 직접 교통사고를 목격하면 충격을 받는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수십 년간 우리 정치를 관찰한 결과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이들의 비리에 눈앞에서 사고를 목격한 듯한 충격을 받곤 했다.
그 충격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제는,
한자리하려는 사람은 진영과 무관하게 비리의 종합선물세트라는 것을 잘 알게 됐다.
정권교체라는 것도 비리인사들 내부의 권력투쟁일뿐이고,
그럼에도 정권교체에 열광하는 것은
스포츠게임처럼 내가 미는 팀이 이기는 게 좋아서이지,
새로 권력을 잡은 이가 갑자기 이 나라를 좋게 만들어줄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란 얘기다.
이런 우중충한 생각을 갖고 있는 나지만,
연일 터져나오는 조국 소식에 많이 놀랐다.
이건 단순히 교통사고를 직접 목격해서 놀라는 것과 좀 달랐다.
그에게 완전무결함을 기대한 적은 없지만,
그가 다른 정치인보다는 덜 기득권스러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건 내 착각이었다
공직자 중 드물게 사모펀드에 재산을 맡긴 것도 어이없지만,
그게 가족펀드인지 몰랐으며,
대표를 맡은 5촌이 왜 해외로 도망쳤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태연히 하는 그를 보면서
아직도 내가 순진했구나 싶어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조국 딸의 논문 이슈에 참전해 본의 아니게 조국 편을 드는 모양새가 돼버렸지만,
이 사태에 관해서도 난 조국이란 자에 대해 혀를 내두르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교수가 고교생의 연구를 돕는 것은 국가적으로 장려할 일이다.
이득은커녕 시간과 돈을 손해보면서 그 연구를 돕는 교수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교수다.
고교생이 연구에 참여해 논문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설령 그게 자소서에 들어가 대입에 유리하게 작용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 학생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분노는 교수와 연줄이 있는 경우
교수와 같이 연구할 기회를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에 기인했지만,
그런 연줄이 없다해서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충남에 있는 A고 학생들이 그랬다.
그들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 학교 과학축제에서 발표할 연구를 나와 같이 하고자 했다.
솔직히 귀찮았지만, 그때의 난 그게 교수의 의무라 생각해 그러자고 했다.
그들은 주말마다 내게 왔고, 난 그들에게 맞는 실험을 같이 했다.
그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이거, 논문으로도 쓸 수 있어요?”
그의 질문은 날 안타깝게 했다.
귀한 주말을 바친 연구가 축제발표라는, 1회성으로 소비되는 이벤트가 아닌,
논문으로 쓰여 영원히 남을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연구는 너무 초보적인 거라 논문이 불가능했다.
그 후에 온 학생들에겐 어떻게든 논문을 같이 써보려고 했지만,
늘 뜻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방송에 나가게 되면서 주말이고 뭐고, 내 시간 자체가 없어져 버렸기에
언제부터인가는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표하면서 그들의 부탁을 다 거절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다행이었다.
이 정권 들어 미성년자 논문을 전수조사했으니,
하마터면 ‘미성년자에게 상습적으로 논문저자를 준 입시브로커’가 될 뻔했다.
장영표 교수는 임상교수로는 보기 드물게 장교수는 연구에 뜻이 있는 교수였고,
덕분에 임상교수를 위한 연구시설인 ‘의학연구소’를 맡게 됐다.
그가 조민 어머니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것은
내가 A고교생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과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밥 한번 사주면 되는 것도 아니고,
2주 동안 미성년자 학생을 연구에 참여시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일이라,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람이 부탁했다 해도, 이걸 수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교수는 학생의 연구를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에 연루되지 않은 수많은 교수들처럼
바빠서 안된다며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장교수가 베푼 선의는 10여년 후 그의 이름이 매스컴에 도배되고,
어제 검찰에 끌려가 새벽까지 검찰 조사를 받는 것으로 돌아왔다.
나 때문에 다른 이가 억울하게 피해를 볼 때, 사람은 부끄럽고 미안해한다.
그런데 조국은,
미안함이 쌓이고 쌓여 에베레스트산 정도의 높이가 됐어야 할 이 상황에서,
자신은 딸의 논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서 버티고 있다.
그가 털끝만큼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장관 후보에서 내려왔어야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화 <배심원들>에서 들었나 싶은데,
법은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있다고 했다.
조국이 법무장관이 돼서 대체 어떤 일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득권의 비리에 절고 전,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을 피해자로 만든 이가 법무장관이 된다한들,
어떤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진 않다.
이런 조국을 문빠들은 연일 ‘확인된 비리가 없다’며 피의 쉴드를 치고,
논란의 인사를 임명할 때마다 해외에 나가시는 우리 대통령은
‘기자 간담회에서 소명이 다 됐다’며 임명을 강행하려 한다.
이 광경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게 된다.
첫째, 어떤 이도 믿어선 안된다. 믿으면 그만큼 좌절도 크다.
둘째, 어떤 경우에도 남을 돕지 말자. 그 도움이 칼날이 돼서 내게 돌아올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