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홍제역 근처 모 돼지갈비집

소주 1병에서 몇잔을 더 마신 것 같다. 이 정도가 내겐 적당한 수준이라, 집에 갈 때 너무 멀쩡해서,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공부를 할 마음은 전혀 없다).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은 전직 PD,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것은 내가 방송국에서 얼쩡거리던 96년이었다. 그때부터 난 그와 이따금씩 만나 왔고, 나이 차이도 한살밖에 안나지만, 우린 만나면 아직도 존대말을 한다.

그는 전직 피디다. 그가 입버릇처럼 "확 그만둬버려!"라고 했을 때, 난 그 말이 여느 직장인들의 말처럼 그냥 한번 해보는, 지극히 공허한 말로만 생각했다. 세상에, 피디처럼 좋은 직업이 또 어디 있다고. 하지만 그는 2년 전 정말로 그만둠으로써 날 놀라게 했다. 이유는 '한의대를 가겠다!'는 것. 진짜로 그는 수능준비에 매달렸고, 작년 말 시험을 치뤘다. 정확한 점수는 말을 안했지만, 한의대 갈 점수는 안되는 모양이다. 복수정답 파동이 난 17번 문제 덕분에 2점이 올랐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묵묵히 재수를 준비 중이다.

그 나이에 한의대를 가서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하는 마음도 있지만, 하던 일을 과감히 때려치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만 해도, 실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부담이 되어 죽겠지만, 달리 할 일이 없어 안면 깔고 버틸 생각인데 말이다. 그가 피디로서 보여줬던 뛰어난 역량을 기억하는지라, 가끔은 그가 다시금 방송계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램도 가지고 있다. 그의 결심이 워낙 굳건해보이긴 해도 말이다.

그나저나 요즘 너무 신나게 카드를 긁어댄 느낌이다. 당분간은 납짝 엎드려 살아야겠다. 다음주는 설 연휴. 어머니는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셔, 나 혼자 집을 봐야한다. 큰집을 가는 거 말고는 달리 갈곳도 없으니, 조신하게 집이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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