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일상을 만나다 - 도시에서 즐기는 22가지 천문학 이야기
플로리안 프라이슈테터 지음, 최성웅 옮김, 김찬현 감수 / 반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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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 헤는 밤 - 우주, 일상을 만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윤동주의 작품은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성찰 의식 이전에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색이 담겨 있다고 평가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우주에 관한 사색을 하게 되어 그런 것일까?

 

시간과 공간의 근본적인 구조에 관한 성찰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천문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천문학이 우리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관련이 있을까? 아니, 관련이 있고 없고를 따지기 이전에, 그러한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 책을 손에 들고 펼쳐 머리말을 읽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해보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천문학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천문학적 숫자의 거리만큼 떨어진 거리에 존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니, 그게 아니었다. 천문학적 숫자의 거리에 있으리라 여겼던 천문학이 빛의 속도만큼이나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던 것처럼 보이던 - 깜깜해서 보이지 않았던 - 나의 지식 창고에 밝은 빛을 비추어 거기에 다양한 것들이 들어있음을 보고 깨닫게 해주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먼저 이 책은 사물을 다른 방법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 책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이 책을 읽고난 지금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다. 내가 길을 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바람, 그냥 아무런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그 바람, 그 바람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가면 우리는 45억년 전에 발생한 지구 생성의 순간과 마주한다는 생각(21)! 생각만 해도 신기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그러한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우주

 

그러면 우리는 우주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나?

저자는 그 우주를 하늘에서만 보여주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들이 문밖으로 발을 내 딛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공원에서도 우주 과학을 만날 수 있다고 하며, 심지어 식당에서조차 우주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두운 밤, 밤하늘에서 우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저자의 안내에 따라 독자는 책 제목처럼 우주를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말이다.

 

모든 위성 안테나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이유

 

이 책의 설명방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을 하나 꺼집어낸다그것은 우리가 자주 대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천문학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스쳐보낸 것들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붕 위 위성 안테나들이 어째서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잊지 말자. 언뜻 보기에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과 안테나가 아무런 상관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35)

 

그런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이 의외로 천문학과 긴밀하게 연결이 된다. 그렇게 저자는 일단 그것(여기서는 안테나 방향)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한다. 여기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도 긴가민가 하는 생각에 아직도 그 설명을 백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그때 저자는 다시 이렇게 설명을 시도한다.

다시 위성 안테나로 돌아오자’(45)

 

저자는 이 부분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에서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을 생략한 채 우리가 더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간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모든 위성 안테나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이유는 케풀러와 뉴턴이 300년도 훨씬 더 전에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며, 그 움직임에 어떤 힘들이 작용했는지를 밝혀낸 덕분이다.>(49)

 

분수대에서 생명 생각해보기

 

또한 저자는 말한다.

공원 한가운데에 맑고 투명한 물이 솟구치는 분수대가 보인다.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보기 좋은 장소다.” (96)

 

어떤가? 저자의 그 말이, 허황되게 들리는가? 그렇게 들린다면 조금만 더 읽어볼 일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자기의 말을 증명한다.

 

지구에 있는 물만이 흐른다. 흐르는 물은 태양계안 지구에서만 볼 수 있다.

얼음이나 증기는 다른 천체에도 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우주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분자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다른 천체의 표면이나 우주공간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된다. 먼지와 가스로 이루어져 태양과 함께 다른 항성들이 태어난 거대한 구름에도 무수한 물 분자가 포함되어 있다.

 

지구의 물은 흐르는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물은 태양주위에서 특정 온도에 한하는 지역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에서 흘러 다닌다. 태양과 너무 가까이 위치하면 온도가 높아 물은 증기가 되며, 반대로 너무 멀면 완전히 얼어버린다. 따라서 물이 증기나 얼음으로 변하지 않으려면 너무 뜨겁거나 차가우면 안된다. 이렇게 물이 물로 있을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에 자리한 행성은 단 하나뿐이다. (96 - 97 )

 

이렇게 물이 물로 있을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에 자리한 행성은 단 하나 뿐이다. 이 우주 안에 그런 곳이 하나뿐인데, 그게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라는 말이다. 그러니 분수대 옆에서 생명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가저자의 주장이 실체적으로 공감이 되는 이유이다.

 

과학으로 본 할리우드 영화의 옥의 티

 

할리우드 영화에 이런 영화가 있다. 부르스 윌리스가 주연한 영화로 기억되는데, 지구로 다가오는 행성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결사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과 서스펜스, 개봉박두! 뭐 그런 영화 말이다.

그게 과학적으로 보면 어림없는 이야기라는 게 저자의 진술이다. 어디 한번 들어보자

 

<소행성과의 충돌을 모면하기 위해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굳이 소행성을 공중에서 폭파시킬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일은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 않다. 소행성의 궤도를 약간만 바꿔주는 정도로 문제는 충분히 해결된다. 이를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레이져 광선으로 소행성의 표면 일부를 증기화하는 것이다. 증기로 변한 물질이 우주로 해방되면서 반동이 생길테고, 그 반동만으로 소행성의 궤도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 아니면 충돌선을 소행성으로 쏘아 올려도 되겠다. 정확한 시점에 조금만 밀 수 있다면, 지구에 조금의 위험도 주지 않는 안전한 궤도로 옮길 수 있다. 이 외에도 충돌을 피하도록 방향을 트는 많은 방법이 있다. > (114)

 

결론 - 어린 왕자의 해넘이 보기처럼 각별한

 

어린 왕자가 살았던 별은 지구보다 작아서 해넘이를 마흔 몇 번이나 보았다는데, 우리가 사는 별은 우리의 맨 눈으로는 계측하기 어려운 정도이기 때문에 천문학적 사실들이 그리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이 책을 읽었으니 어린왕자의 별처럼, 실체적으로는 천문학적 크기이나 심정적으로는 소행성 B - 3251 처럼 느껴진다 말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이 책은 그럴 정도로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보던 - 그래서 그게 어찌 천문학적 사실과 관련이 될까 생각지도 않았던 - 일들이 바로 우주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들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어린왕자에게 해넘이가 갖는 의미가 무척 각별하였듯이 이 책의 의미도 그렇게 각별하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사족 - out of sight out of mind 와 만유인력 함수 관계

 

이 책을 읽는 중에 문득 사람간의 관계도 만유인력을 이용하여 설명할 수 있겠다 싶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함수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든 생각인데, 이 함수를 이용하면 사람간의 거리에 따른 마음의 인력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만유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이차함수관계이다. 두 물체 사이의 거리가 두배로 멀어질 경우, 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이전보다 두 배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2의 제곱인 네배로 줄어든다. 세 배로 거리가 멀어진다면 아홉 배로 힘이 줄어드는 셈이다.>(23-24)

 

마음이 사람을 끄는 인력이라 할 수 있으므로, 따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은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그만큼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수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바로 이 책에서 기본으로 하고 있는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방법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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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영웅들 - 필멸의 인간 영웅 아킬레우스에서 아고라의 지성 소크라테스까지
그레고리 나지 지음, 우진하 옮김 / 시그마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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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영웅들>- 소크라테스가 왜 영웅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은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이다.

그 중에서도 대상이 되고 있는 영웅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필멸의 인간 영웅 아킬레우스에서 아고라의 지성 소크라테스까지"

 

그 말을 읽고 이런 의문이 들었다.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영웅이라는 타이틀이 타당하다 싶은데, 소크라테스를 영웅이라는 범주로 분류해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영웅의 의미와 소크라테스를 그 안에 포함시킨 이유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이 책에서 '영웅'이라 함은?

 

이 책에서 영웅들의 속성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 모험, 신성한 항해, 여정, 정신적 여정, 철학적 여정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그러한 속성을 구비한 자가 바로 영웅인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저자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신성한 항해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 테오리아 가 은유적으로 철학적 관조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1012)

 

<따라서 철학적 관조라는 개념은 신성한 항해라는 의식뿐만 아니라 구원의 신화와도 관련이 있다. 게다가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처럼 플라톤이 소개하는 소크라테스는 심지어 신화 그 자체가 구원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1012)

 

<23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아테나이의 배가 겪는 신성한 항해는 철학적 관조로서의 신성한 여정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의미하는 관조는 파이돈에서 극화된 대화의 살아있는 말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가 계속되어 심지어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마치 플라톤의 국가 마지막에서 에르의 신화가 구원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1042)

 

오이디푸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특별한 영웅들에 대한 신화에서 이와 유사한 이중적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결과를 그려내는 데는 많은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모든 것은 죽음 이후에 어떤 식이든지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기본적인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808)

 

<그 내용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 다시 살아오는 인간에 대한 특별한 영웅 추종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808)

 

이와 같은 이치는 헤라클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헤라클레스는 죽음의 순간에 다시 의식을 되찾고 올림푸스 산 꼭대기에 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불멸의 산들 사이에서이다. 죽음에서 깨어난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제 올림푸스 산의 '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88)

 

이러한 생각은 저자가 18강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소포클레스에게 콜로누스의 사랑스러운 대지의 여신의 품에 안겨 그 안에 빠지게 된다는 개념은 진정한 '귀향'을 이루는 죽음이다. 이 귀향은 죽음 뒤에 나타나는 빛과 생명으로의 진정한 회귀다.> (817)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대미를 다음 말로 장식한다.

<고대 그리스 영웅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웅이라는 개념이 살아있는 한, 영웅에 대한 말도 살아있는 말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살아있다면 영웅도 그와 함께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다.> (1046)

 

소크라테스가 왜 영웅인가?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에서 소크라테스는 헤라클레스나 오디세우스와 같은 영웅으로 일컬어진다. 왜일까? 960 -961쪽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전 세계를 방랑하는 것을 그 노고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끝나지 않는 자신의 정신적 여정이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은 헤라클레스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여기 저기 안가본 곳 없이 방랑을 하며 끝없는 육지와 바다 전부를 여행했는데, 모두 국왕 에우리스테우스가 자신에게 내린 과업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수많은 무모한 모험을 감행했으며, 그만큼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오디세우스

<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도시를 보았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는 바다를 건너며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고, 동료들과 자신의 무사귀환을 위해 애쓰면서 마음 속으로 수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런 진술은 솔론을 거론하는 23강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헤라클레스, 심지어 오디세우스조차 끝나지 않는 영적 여정속에서 전 세계를 '방랑'하는 소크라테스와 비교되는 영웅적 모범으로 보일 수 있으며, 이제는 솔론 역시 그와 같은 모범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이 이상화된 입법자 자신의 영적 여정이 철학적 여정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970)

 

다시 이런 결론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에 반응하고 구원을 해 준다. 이 은유는 군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호메로스적 서사시에서 볼 수 있는 영웅적 행동이다. ......파이돈은 마치 헤라클레스의 숭배자들이 영웅을 부르듯 그렇게 소크라테스를 부르길 원한다. 이렇게 불멸화에 대한 주장은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1003 1004)

 

그래서 이 책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영웅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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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수업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판미동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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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비한 마력이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책

 

궁금증과 함께 시작한 소설

 

소설속의 화자는 누구일까?

그게 맨 처음 들었던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은 더 많아졌다. 이 사람의 정체는 누구일까? 왜 산에서 사는 것일까? 그리고 가족은? 과거의 직업은? 등등.

 

그렇게 궁금증을 유발하는게 많으면 많을수록 더 흥미진진한 소설이 아닐까? 거기에 문장의 흡입력이 더해진다면? 그 소설은 좋은(?) 소설, 읽을만한 소설이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설이 바로 이 <영원의 수업>이다. 서두에 언급한 궁금증은 이 책의 제목과 어울려 상승작용을 거듭한다. 무언가 있다. 이 책 안에 분명 무언가 있다는 기대감이 충만한 가운데 이 책을 읽었다.

 

 

줄거리

 

이 책은 줄거리를 먼저 알고 읽으면 책 읽는 재미가 반감이 되니, 줄거리는 말하지 말자. 단지 화자인 마테오가 의사였던 것, 그리고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만 말하자. 그런 간단한 정보만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라. 책장을 넘길수록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책 제목이 영원의 수업인 이유는?

 

영원과 대화하면 절대 시간낭비란 없어.” (155)

 

화자인 마테오의 아내 (이름 역시 말하지 말자. 아내의 이름이 언제 등장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가 마테오에게 한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마테오의 아내는 매일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침실로 들어가 거기서 삼십 분가량 아무런 방해도 맏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어했.(154)

그게 의아했던 마테오는 왜 그러는지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소풍을 갔을 때에 그녀는 앞쪽에서 반짝이는 파란 바다와 하늘의 구름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바위들을 가키며 말한 것이 바로 위에 인용한 말이다.

 

그렇게 영원과 대화하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바로 이 소설이다.

화자인 마테오는 그렇게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떻게 자기가 영원의 시간으로 들어갔는지를 차분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편지글의 대미에 그는 이렇게 영원으로부터 받은 수업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잠에서 깨자 난 이상하게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어. 숲 바깥쪽에서는 정오의 햇살이 빛났지.>(279)

 

영원의 수업을 듣고 가슴에 새겨둔 구절들

 

그런 영원의 수업을 치르고 있는 화자로부터 나도 많이 듣고 배웠다. 다음은 그런 배움의 과정애서 내가 특별히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나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형용사 또는 명사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익숙해졌다. 그러한 분류가 인간 본성의 일부분임을 알았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어떻게든 정의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정의가 우리를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13 - 14)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유혹당하지. 겉으로는 확실해 보이니까. 우리는 사물을 보면서 외형이 바로 실재라고 확신해서 의문을 품지않아.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해서 더는 앞으로 나가지 않지.

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어.

눈이 보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55-56)

 

<엄마 체온을 느끼지 못하면 아기는 가장 먼저 이 세상이 두려운 곳이고, 무서운 짐승이 와서 지금까지 자라 온 따뜻한 곳에서 자신을 강제로 끌어낸다고 생각할 거야. ....태어나서의 며칠을 망치는 건 평생을 망치는 것과 같아. >(76)

 

<모든 비극에는 만일이라는 비가 쏟아져 내리지.>(94)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적어도 인간을 이해해보려고 했지. 세상의 고통이 내게 계속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면 적어도 그 고통을 완화해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테니 말이지.> (123)

 

<어떤 일들을 서로 비난하게 되면 우리 관계는 둘이 아니라 셋이 돼 버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이야기를 갉아먹기 시작한 나무좀.> (169)

 

 

상실의 의미

 

그가 겪은 상실은 어떻게 그의 삶에 나타나는가?

 

<“왜 날 사랑하는 거지? 난 사랑받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야

그녀가 고개를 저었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지.

난 당신이 보지 못하는 마테오를 볼 수 있어요.”

어떤 마테오?”

절망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마테오요.”> (208)

 

절망으로 나타난다. 상실은 절망으로, 그리고 그 절망은 그가 그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런 그를 보다못한 마테오의 아버지는 편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마테오, 제발 부탁이다. 본래의 너로 돌아오너라.”(239)

   

그러다가 그는 드디어 발견한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 상실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당신은 내 삶에 나타났다가 갑가지 사라져버렸어. 그리고 나는 여러 해 동안 미친 듯이 내가 잃은 것을 쫓아다녔어. 내게 없는 것에 나를 집중했지. 그 잃어버린 것이 내 일상의 나날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 채.

당신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사라진 거야.

그 사실을 내가 알기 전까지 당신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 (266)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있던 텅 빈 공간을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가득 채웠지.>(267)

 

현실은 어떻게 직시할 수 있는가?

 

<쓸데없고 지나친 생각들을 모두 머리에서 지울 수 있었어. 생각이 자유로워지자 그 때까지 내가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았고, 내가 본 현실을 직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다만 내가 보고자 했던 그게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268)

 

줄거리 이해를 돕기 위한 몇가지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저자는 아들의 이름을 의미 있게 지었고, 그 이름으로 뭔가 말하려는 것 같다. 그 이름은 나단이다. 나단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죄악을 저지르자 그에게 가서 책망을 했던 선지자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 여기에서도 그가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책망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단은 마테오가 아이를 임신시키고 버린 여인 라리사가 낳은 아들이다. 그 아들이 찾아오게 스토리를 이어간 것 자체가 주인공 마테오로 하여금 인생의 회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회심은 영원의 수업을 지속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으므로저자가 아들의 이름을 '나단'으로 지은 것이 아닌가 짐작하는 것이다.

 

그 아들 나단(선지자)은 아버지 마테오(다윗)에게 무슨 말- 책망의 말- 을 하는가?

<돌아온 탕아 이야기예요. 거기서는 아들이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잖아요. 여기선 반대로 아버지가 집을 떠났고, 아들이 아버지를 찾으려고 흔적을 따라 산과 바다를 돌아다니니까요.>(277)

 

<내가 말했지 " 나를 용서해 다오."

(중략)...

"벌써 용서했어요. 당신은 비겁하게 행동했지만 벌써 용서했어요.">(278 쪽)

 

여기 아들 나단이 말하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역시 성경에 등장하는 것으로, 예수가 언급한 비유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렇게 해서 아들로부터 용서받은 마테오는 그가 겪고 있는 상실을 극복한다. 이런 극복을 통해 그가 수행하고 있는 영원의 수업이 의미있음을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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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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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헤맬 때, 내 곁엔 누가? 무엇이?

 

시극(詩劇)이란?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라는 긴 제목의 책을 읽었다. 시극이라고 한다. 내 상식으로는 시극(詩劇)이란 극의 내용이 시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등장인물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시로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읽었다, 한 번. 그런데 인물들 사이에 오고가는 대사가 시 같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대화, 산문체 대화로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게 시극? 그런 의문이 먼저 들었다.

 

내가 헤맬 때,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읽었다. 그런데 내용마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는 의문은 물론이거니와, 등장인물간의 관계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든 생각은 자괴감, 내가 글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일까, 이해력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이 있는 책인가?

 

그렇게 헤맸다. 그렇게 헤매며 한 번 읽고나서 다시 읽으려 했다. 두 번쯤 읽으면 이해가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번 읽으려다가 해설이 첨부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해설을 읽어볼까 말까, 순간적인 망설임이 일었다. 문학에 전문적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해설이란 항목은 대부분 젠 체 하는 평론가의 놀이터에 불과했다. 요령부득으로 전문용어들이 난무하고, 현학적인 문장의 뒤엉킴, 그래서 어떤 경우는 더욱 난해한 미로로 끌려가기 일쑤였기에, 이 책의 경우도 혹시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하는 기우가 또한 일었다.

 

그래도, 내용이 이해되지 않으니 이 해설 역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별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체념을 반넘어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목을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헤맬 때,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있었다. - 의문, 자괴감, 기우 말끔히 해소해주는 해설

 

그렇게 생각하고 읽었던 해설, 읽기 잘했다. 해설을 읽고 나니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들인지, 심지어 유령인 것도 알게 되었고, 그들 간의 관계도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니 나의 독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정말 해설 읽기를 잘 했다.

 

그러니 내가 가장 헤맬 때 나를 도와줄 무언가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는데, 나는 자라 보고 놀란 토끼처럼 지레 짐작으로 '해설' 읽기를 저어하고 있었으니, 그걸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의 진면목을 놓치고 말 뻔했다.

 

그렇게 나의 부족한 독해력을 도와줄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 나의 의문, 자괴감, 기우를 모두 말끔하게 해소해주었다,

 

들어있는 뜻 깊은 의미들

 

그래서 나는 해설을 읽고 본내용을 다시 한번 읽었다.

거둔 수확은 의외로 많다. 뜻 깊은 의미들이다. 그냥 열거하기로 하자.

 

인생은 다른 인생의 삶에 있어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타자와의 공감대는 어떻게 형성이 되는가?

눈을 바라보며, 귀 기울여 듣고, 진심으로 답하는 가운데 상대방과의 접점이 생긴다.

대화는 정보교환에 머무르지 않고 시적교류로 이루어지면 어떨까?

 

빛나는 아포리즘

 

사랑하는 이가 떠나도 슬픔마저 떠나지는 않는 법이니까 (60)

 

사람들은 벌레가 징그럽다고 생각할 뿐, 벌레의 날개에는 관심이 없죠. (105)

 

눈은 세상에 자신의 고요를 조금씩 쌓고 있는 거예요.

곧 저 눈은 다 고요가 될 거예요. 깊고 아득한 것들로 돌아가기 위해서. (108)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어둠 속에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조금만 있자....하는 거요.

멋져

또 말해줘. 사랑이 뭐야?

이불 속에서 지느러미를 부비며 노는 거. (118)

 

그래서 이 책, 시극(詩劇) 맞다.

 

이런 아포리즘을 찾아 읽으며, 나는 이 책이 왜 시극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 대사들이 리듬을 타고 있으며,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에서도 리듬을 타고 있었다.

해설을 쓴 평론가 허희는 리듬을 재발명해야 한다(149) 했는데, 그것은 작가의 몫이고, 독자인 나로서는 이 책에서 시극의 요체인 리듬을 재발견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간의 관계도 리듬을 타고 소통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런 책 처음이다. 좋은 느낌으로 - 비록 등장인물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지 못하지만 - 책을 접었다.

 

다시 질문 - 내가 가장 헤맬 때, 내 곁엔 누가? 무엇이?

 

이 책의 해설이야기가 아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헤맬 때 과연 내 옆에 누가 있을까? 내가 그 헤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애쓸 때 누가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며 든 또 하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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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인문학 -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
다이앤 애커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새벽을 맞이하는 인문학적 풍경들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문이란 문은 다 연다.

     새처럼 깃털 달고 날아올까,

     아니면 바닷가 파도처럼 밀려올까?

          - 에밀리 디킨슨,  <새벽의 인문학> 95쪽에서 인용.

 

작가의 눈은 우리와 다르다.

 

이 작가의 눈은 신비하다. 경이롭다. 작가의 눈은 현미경으로 또는 망원경으로 작동한다. 아니 그보다 더 치밀한 광학적 프리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언제 새벽에 새들의 첫 노래 소리도 숨죽인 듯 낯설’(139)은 것을 느껴 보았던가? 그리고 그러고 나면 한 마리 한 마리씩 노래를 받아 부른다’(139)는 것을 생각이라도 한 적이 있던가?

 

그런 - 우리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던 - 새벽을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새벽을, 우리가 잠자느라 또는 잠이 깨어서도 전혀 보지 못했던 순간들을 그만의 특이한 눈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새벽의 <파브르 곤충기>, <시튼의 동물기>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곤충기, 동물기가 있다. 시튼의 동물기, 파브르의 곤충기이다.

그러데 그런 것들보다도 더 치밀하게 관찰한 기록이 여기 이 책에서 전개된다.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워 대충 그 항목만 소개하련다

 

나는 청설모가 꼬리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즐겁다로 시작하는 청설모 이야기. (161)

푸른가슴왜가리의 옆모습은 이곳에서 아침에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로 시작하는 왜가리 이야기.(162)

굴뚝새 한 마리가 현관문 근처에 달아놓은 베고니아 화분으로 뛰어든다, 라는 굴뚝새 이야기. (165)

 

어디 그뿐인가, 그림도 시도 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그림 <남풍, 맑은 하늘>을 주제로 한 산 이야기, 더 나아가 파도이야기 (170)

 

그리고 모네가 우연히 호쿠사이의 작품을 접한 일화도 우리를 새벽으로 인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171)

 

모네에 대한 찬사는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다. 모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77쪽부터 한 장에 걸쳐 이어진다. 고딕 성당을 그리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창가에 이젤을 놓는 모네, 바로 루앙성당을 대상으로 서른 한 장을 그린 일화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새벽에 빛이 역동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그리기 위한 모네의 노력이었다.

 

신선한 시각 - 저자는 우리를 툭 친다. '저 새벽 빛을 보라'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새벽에 뜨는 태양의 빛이 어떻게 우리 사람의 눈에 인식이 되는가, 시간이 변함에 따라 어떻게 빛이 변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신선한 시각”, “우리의 지각은 늘 레이다망을 피해 다니다가 모네 같은 화가가 우리를 툭 치며 외칠 때에야 깨어난다.”(79)

 

모네만 그런 것인가? 아니! 이 책의 저자가 우리를 툭 치는 바람에 우리는 비로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우리를 깨우게 하는 방법이다

 

 

 

 

 

뜻밖의 소득 -영화 <아름다운 비행 (Fly Away Home)>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소녀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야생 기러기들과 함께 생활하고 이들과 함께 비행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다.

원제는 <Fly Away Home>.우리 말 번역은 <아름다운 비행>이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에 모티브를 준 실제 일화가 있다. 캐나다의 빌 리시먼이 1993년 자신이 제작한 초경량 항공기를 타고 기러기들을 캐나다에서 미국 버지니아 주 까지 이주시킨 적이 있다. 리시먼은 영화에 직접 항공기 스턴트 더블로 참가했다. 물론 이 영화에서 아내를 사고로 잃었다거나 딸과 함께 비행했다는 내용 등은 영화만의 픽션.

 

그런데 이 일화가 실제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기는 했는데, 이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된 것이 의외의 소득이었다.

 

<리시먼은 새와 함께 비행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1988년 온타리오 근방에서 초경량 비행기로 캐나다 기러기떼를 이끌고 비행한 경험이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 42쪽 이하를 참조하시라.

 

http://movie.phinf.naver.net/20111222_42/1324560152872Xczmx_JPEG/movie_image.jpg?width=100%

 

경탄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다음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우물에서 맑은 물을 길어내듯이 건져낸 글들이다. 이런 표현들을 이 책 말고 어디에서 읽을 수 있을까?

 

<새들은 노래로 주변 경치 속으로 파고들어 사방을 누빈다.> 97

 

이런 표현은 어떤가?

<아주 단순한 소리라도 내려면 목구멍을 부풀리는데 그럴 때면 흰 목덜미에서 조그만 깃털 두 개가 삐죽 솟는다.> (102)

 

이런 표현, 거짓말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접하면 독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 일 것이다. 하나는 아니 어떻게 그런 관찰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렇게 세밀한 관찰이 가능했을까? 그냥 지어낸 말 아닐까? 조그만 깃털 두 개가 솟았다니? 세 개도 아니고 한 개도 아닌 두 개가? 그런 의구심이 그 하나요.

 

또 다른 반응은 경탄!

특히 시간을 기록하면서 새벽을 묘사한 새가 내는 모든 소리”(95쪽 이하)는 경탄 그 자체이다.

이런 기록은 그냥 카메라나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리기는 오히려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런 식으로 글로 옮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누가 할 수 있으랴?

이 책의 저자 밖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래서 매 페이지마다 경탄하며 읽었다. 저자는 새벽을 맞이하는 독자들에게 풍경을 인문학적으로 보여주는데, 모든 것이 경탄할 만 것들이다. 그렇게 새벽을 경탄하며 맞이하면 하루가 얼마나 풍요로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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