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수업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판미동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신비한 마력이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책

 

궁금증과 함께 시작한 소설

 

소설속의 화자는 누구일까?

그게 맨 처음 들었던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은 더 많아졌다. 이 사람의 정체는 누구일까? 왜 산에서 사는 것일까? 그리고 가족은? 과거의 직업은? 등등.

 

그렇게 궁금증을 유발하는게 많으면 많을수록 더 흥미진진한 소설이 아닐까? 거기에 문장의 흡입력이 더해진다면? 그 소설은 좋은(?) 소설, 읽을만한 소설이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설이 바로 이 <영원의 수업>이다. 서두에 언급한 궁금증은 이 책의 제목과 어울려 상승작용을 거듭한다. 무언가 있다. 이 책 안에 분명 무언가 있다는 기대감이 충만한 가운데 이 책을 읽었다.

 

 

줄거리

 

이 책은 줄거리를 먼저 알고 읽으면 책 읽는 재미가 반감이 되니, 줄거리는 말하지 말자. 단지 화자인 마테오가 의사였던 것, 그리고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만 말하자. 그런 간단한 정보만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라. 책장을 넘길수록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책 제목이 영원의 수업인 이유는?

 

영원과 대화하면 절대 시간낭비란 없어.” (155)

 

화자인 마테오의 아내 (이름 역시 말하지 말자. 아내의 이름이 언제 등장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가 마테오에게 한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마테오의 아내는 매일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침실로 들어가 거기서 삼십 분가량 아무런 방해도 맏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어했.(154)

그게 의아했던 마테오는 왜 그러는지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소풍을 갔을 때에 그녀는 앞쪽에서 반짝이는 파란 바다와 하늘의 구름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바위들을 가키며 말한 것이 바로 위에 인용한 말이다.

 

그렇게 영원과 대화하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바로 이 소설이다.

화자인 마테오는 그렇게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떻게 자기가 영원의 시간으로 들어갔는지를 차분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편지글의 대미에 그는 이렇게 영원으로부터 받은 수업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잠에서 깨자 난 이상하게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어. 숲 바깥쪽에서는 정오의 햇살이 빛났지.>(279)

 

영원의 수업을 듣고 가슴에 새겨둔 구절들

 

그런 영원의 수업을 치르고 있는 화자로부터 나도 많이 듣고 배웠다. 다음은 그런 배움의 과정애서 내가 특별히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나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형용사 또는 명사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익숙해졌다. 그러한 분류가 인간 본성의 일부분임을 알았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어떻게든 정의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정의가 우리를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13 - 14)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유혹당하지. 겉으로는 확실해 보이니까. 우리는 사물을 보면서 외형이 바로 실재라고 확신해서 의문을 품지않아.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해서 더는 앞으로 나가지 않지.

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어.

눈이 보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55-56)

 

<엄마 체온을 느끼지 못하면 아기는 가장 먼저 이 세상이 두려운 곳이고, 무서운 짐승이 와서 지금까지 자라 온 따뜻한 곳에서 자신을 강제로 끌어낸다고 생각할 거야. ....태어나서의 며칠을 망치는 건 평생을 망치는 것과 같아. >(76)

 

<모든 비극에는 만일이라는 비가 쏟아져 내리지.>(94)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적어도 인간을 이해해보려고 했지. 세상의 고통이 내게 계속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면 적어도 그 고통을 완화해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테니 말이지.> (123)

 

<어떤 일들을 서로 비난하게 되면 우리 관계는 둘이 아니라 셋이 돼 버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이야기를 갉아먹기 시작한 나무좀.> (169)

 

 

상실의 의미

 

그가 겪은 상실은 어떻게 그의 삶에 나타나는가?

 

<“왜 날 사랑하는 거지? 난 사랑받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야

그녀가 고개를 저었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지.

난 당신이 보지 못하는 마테오를 볼 수 있어요.”

어떤 마테오?”

절망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마테오요.”> (208)

 

절망으로 나타난다. 상실은 절망으로, 그리고 그 절망은 그가 그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런 그를 보다못한 마테오의 아버지는 편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마테오, 제발 부탁이다. 본래의 너로 돌아오너라.”(239)

   

그러다가 그는 드디어 발견한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 상실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당신은 내 삶에 나타났다가 갑가지 사라져버렸어. 그리고 나는 여러 해 동안 미친 듯이 내가 잃은 것을 쫓아다녔어. 내게 없는 것에 나를 집중했지. 그 잃어버린 것이 내 일상의 나날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 채.

당신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사라진 거야.

그 사실을 내가 알기 전까지 당신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 (266)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있던 텅 빈 공간을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가득 채웠지.>(267)

 

현실은 어떻게 직시할 수 있는가?

 

<쓸데없고 지나친 생각들을 모두 머리에서 지울 수 있었어. 생각이 자유로워지자 그 때까지 내가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았고, 내가 본 현실을 직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다만 내가 보고자 했던 그게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268)

 

줄거리 이해를 돕기 위한 몇가지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저자는 아들의 이름을 의미 있게 지었고, 그 이름으로 뭔가 말하려는 것 같다. 그 이름은 나단이다. 나단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죄악을 저지르자 그에게 가서 책망을 했던 선지자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 여기에서도 그가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책망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단은 마테오가 아이를 임신시키고 버린 여인 라리사가 낳은 아들이다. 그 아들이 찾아오게 스토리를 이어간 것 자체가 주인공 마테오로 하여금 인생의 회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회심은 영원의 수업을 지속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으므로저자가 아들의 이름을 '나단'으로 지은 것이 아닌가 짐작하는 것이다.

 

그 아들 나단(선지자)은 아버지 마테오(다윗)에게 무슨 말- 책망의 말- 을 하는가?

<돌아온 탕아 이야기예요. 거기서는 아들이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잖아요. 여기선 반대로 아버지가 집을 떠났고, 아들이 아버지를 찾으려고 흔적을 따라 산과 바다를 돌아다니니까요.>(277)

 

<내가 말했지 " 나를 용서해 다오."

(중략)...

"벌써 용서했어요. 당신은 비겁하게 행동했지만 벌써 용서했어요.">(278 쪽)

 

여기 아들 나단이 말하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역시 성경에 등장하는 것으로, 예수가 언급한 비유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렇게 해서 아들로부터 용서받은 마테오는 그가 겪고 있는 상실을 극복한다. 이런 극복을 통해 그가 수행하고 있는 영원의 수업이 의미있음을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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