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컨은 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
리모컨은 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
“리모컨은
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
이 책
52쪽에
나온 말이다.
저자는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
리모컨을 어디에 두었는지 깜빡하는
우리의 기억은 그래서 불완전하다,
고.
그런데 나에게는 이 말이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은’
리모컨이
아니라,
‘아예
잊어버려서 리모컨을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발견한 기분’으로
읽었다.
리모컨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다니!!
리모컨을
잃어버려서,
이제는
아예 잊고 살아왔는데,
여기에서
발견하다니!
그토록 읽고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던 철학적 개념들이 저자의 설명을 읽고 있노라니,
이게
그리 이렇게 쉬운 말이었던가?
나는
지금까지 그런 책들을 헛 읽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키르케고르의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 세가지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심미적으로 살라가는
것,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것.
자,
이것을
한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심미적으로
사는 삶은 쾌락 속에서 사는 삶이다.
온갖
향락과 즐거움을 쫓는,
한번
쯤,
아니
여러번 살아보고픈 삶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사는 이들은 안정을 얻지 못하고 좌절 중이다.
늘
더 큰 쾌락을 추구하지만 심미적 쾌락을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이들은 심미적 삶에 절망하고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바로
윤리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은 사회적 법규와 규칙을
엄격히 지키며 사는 삶이다.
한마디로
숨 막히고 답답한 삶이다.
알다시피
이렇게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완벽한
규율을 따르기에는 우리는 너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을 계기로 윤리적으로 살던 이들은 다른 삶을 살려한다.
바로
종교에 귀의하는 삶이다.
종교적인 삶은 신에게 의존하며 사는
삶으로,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본래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믿으며 산다.
>(61쪽)
자,
여기까지
읽으면서 키르케고르가 말한 바 세가지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그 순서와 과정을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에는
몇 번씩이라 읽었어도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나의 이해가 부족했던 탓인지,
세
가지 방법이 따로 겉돌기만 했었는데,
이
설명에 의하면 그 과정이 이해가 잘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잃어버렸던 리모컨,
그래서
아예 잊어버렸던 리모컨을 뜻밖의 장소에서 찾은 기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까지 읽고
나니,
그래도
뭐가 부족했었다.
아니,
그렇게
심리적 삶에서 윤리적 삶으로,
그리고
다시 종교적 삶으로만,
그러니까
한 방향으로만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반대방향으로도 가는 경우도 있던데,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니,
저자는
거기에 대한 대답도 이미 해 놓고 있었다.
<이
흐름은 일방적이 아니다.
다음
삶으로 도약한 후에도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대박
아이템을 보면서 다시 사업에 손을 대고,
토한
기억이 사라질 때쯤에는 그 메뉴를 다시 주문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다음 삶으로의 도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련이 남지않게 현재 삶에서 충분히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다.>(62쪽)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전
삶에 미련이 남지 않아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현실을 바꿀
것인가,
자신을 바꿀
것인가?
저자가 그런 식으로 결론 내린
것,
또하나
짚고 가자.
‘현실이
변했다’라는
말의 진의는 ‘자신의
현실이 변했다’이다.(26쪽)
조금 표현이
부자연스럽지만,
그
말의 의미는 이렇다.
우리는 대개 사회의 현실에
순응한다.
원하는
일을 찾기 보다는 자신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간다.
이게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바뀌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가 원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설령
실패하더리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얼마든지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 볼 수 있다.
그렇게
현실이 바뀌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현실이 바뀌면 우리 삶도 바꿔질까?
그렇게 생각하던 저자는 이런 생각에
당도한다.
“원하는
일을 하는 이들은 현실이 바뀌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꾼 게 아닐까?”(25쪽)
그래서 결론에
이르기를,
위와
같이,
즉
사회의 현실이 변하지 않아도 만약 우리 자신이 변한다면 우리의 현실이 분명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현실에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저자는 인문학이 현실적인 삶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얼마든지
인문학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
물론
메시지를 쉽게 발견할 수는 없지만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다.>(8쪽)
그래서 여러 철학자의 이론도 우리의
삶에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훌륭한 실례를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들의 고민을
인문학으로 풀어보고 있는데,
20대가
아닌 나로서도 이 책은 의미가 있게 읽혀진다.
살아보았는데,
저자가
이 책에서 하는 말들이 맞다.
희한한
일이지만 내 나이까지 안살아본 저자는,
마치
나보다 더 잘살고,
오래
산 것처럼 인생의 고민을 잘도 풀어나간다.
그것도
인문학으로!
인문학의
힘이 그렇게 세다.
그것,
분명하다.
그래서
저자가 인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 바뀌기를,
바라는
것,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