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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우의 집>을 읽고
“심봤다~”라는 구호를 아시는지?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했을 때에 그것을 발견했다고 외치는 감탄, 신호의 말이다.
이 책을 얼마쯤 읽었을까?
무심히 첫 페이지를 열고 심드렁하게 읽어가던 나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215쪽이다.
순분의 혼잣말, “그 죄를 다.......어떻게 받으려고....”를 읽었을 때다.
나의 가슴에 짜릿한 그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페이지마다, 소설속의 상황과 또 등장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는 비수가 되어, 한번은 찔림으로 또 한 번은 울림이 되어, 번갈아가며 나를 휩싸기 시작하였다.
아, 이거다! 소설은 이런 맛에 읽는 것!
저절로, “심봤다!‘라는 울림이 내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제야, 내가 이 책을 무심코 펼쳐 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심코 펴들었다는 것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우의 집? 인형? 무슨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아니면 혹시 중국의 어느 시대엔가, 임금의 무덤에 같이 묻었다는 흙인형!
그렇게 무심히 읽어가던 나는 215쪽에 이르기까지. 그저 원(안원)이라는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살이, 간난신고(艱難辛苦)한 세태를 그려내는 줄 알았다. 또 하나의 성장소설? 그래도 참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구나. 그래서 이 책의 결말은 그 원이네 가족이 조금 형편이 나아져 삼벌레 고개 여기가 딱 중간이지 싶은 마을, 순분네 셋집에서 벗어나 어딘가 조금은 형편이 좋은 곳으로 옮겨가는 작별의 장면을 기대하며 읽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트릭이었다. 그 트릭에 나는 완전히 속았다. 아기자기하게 봄의 악장을 연주하던 이 책은 어디쯤 갑자기 그 조가 바뀌더니, 광란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여름으로,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눈보라를 동반한 혹독한 추위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니, 그 변화가 실로 무쌍하였다. 그 즈음쯤 변화는 되돌이표를 반복하며 끝이 났다. 그러니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어? 이러면 안되는데....안되는데......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초반에는 아지자기한 아이들 소꿉놀이같은 묘사에, 또한 등장인물들을 이야기의 요소요소마다 배치해 놓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플롯을 구사하는 솜씨에 경탄하고, 이어서는 작가가 그 속에 숨겨놓은 그 무시무시한 이빨에 경악하는 재미 - 이런 것도 재미라 표현해도 되는지? -에 빨려들어가, 두 시간을 몰아지경에서 지냈으니, 참 작가의 힘은 세다, 놀랍도록 세다. 이것이 소설의 힘이런가? 무릇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일까?
먼저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힘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인물 배치. 보험아줌마(성계희)는 왜 등장시켰을까? 운문원의 임보살 - 온갖 신앙을 잡탕으로 섞어 기복화하는(59쪽) - 은 왜 등장시켰을까?
먼저, 성계희, 보험여자다. 물론 이 여자의 역할은 다양하지만, 그로 인하여 보험에 대한 언급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데, 결국은 이런 말도 하기에 이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드는 보험은 왜 없느냐...> (269쪽)
말인즉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질병, 죽음, 사고 등등에 대비하는 보험은 존재하는데, 왜 이렇게 간첩사건에 연루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처지를 대비하는 보험은 없는지, 한탄하는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 중 하나이다. 보험 여자, 성계희의 존재가 이런 말로 시대를 묘사하는 역할도 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 놀랍다.
다음, 임보살은? 그는 은철이가 사고를 당한 후에 순분이 의지할 도피처로 작동을 한다. 그런데 그 도피처는 과연 안전한 곳인가?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 그 보살님이 숱해 고쳤어. 굿 힘으로 우리 은철이, 멀쩡하게 다시 걸을 수도 있잖아, 새댁?” (207쪽)
그렇게 순분은 임보살을 의지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굿의 효험으로 깨진 무릎이 매끈한 도자기처럼 회복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12쪽)
이것은 순분이 새사람으로 바뀌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남의 험담을 즐겨하던 순분은, 이제 남의 험담을 듣고도 "이상하리만큼 아무 관심도 생기지 않“(215쪽)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이런 발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 죄를 다....어떻게 받으려고..” (215쪽)
이렇게 임보살은 순분을 쥐락펴락 하면서 그를 옭아매는 장치로 출연한다. 결국은 그 굴레를 떨치고 나오는 것으로, 순분은 거듭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순분이라고 생각한다. 초반에 주인공은 순분네 집에 세들어 사는 전직 교사 새댁이었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주인공은 순분으로 바뀐다.
이유는? 순분이 비로소 세상이 어찌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임보살을 배치하여 순분네를 옭아매었다가 풀려나게 한 것은 결국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다가, 이제 진정한 눈을 떠 다르게 보기 시작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 즉 그렇게 눈을 뜬 사람이 주인공 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순분의 변화는 이렇게 실현되고 있다.
<순분은 김밥 하나를 집어들고......예전처럼 식구가 몇인데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런 알량한 것을 가져왔냐는 둥, 필체가 활달하면 뭐할 것이냐고 손이 이렇게 잘 생겨서 잘 살기는 틀렸다는 둥 하는 험담은 일절 하지 않았다.>(245쪽)
그리고 원의 집안에 불어닥친 피눈물나는 사건 가운데에서, 동네 사람들은 모두다 원이네를 핍박해도, 순분만은 감싸고 보살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깨달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등장 인물들 하나 하나는 이 소설의 곳곳마다 이야기를 요소요소마다 변곡점을 찍어내는 인물들로 만들어간다.
또, 삼벌레 고개 중턱 소년들의 사소한 행동인 ‘높이의 모험’과 ‘넓이의 모험’이 서두에 언급된 이유는? 처음에는 그저 아이들의 철없는 놀이를 소개하려는 추억거리의 소개쯤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뒤의 사건 하나를 꺼내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치를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듯이, 무심한 듯 배치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금철이가 은철을 끼고 개울을 건너뛰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데, 없어서는 안될 전주곡인 셈이다. 그 놀이가 없었으면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요소요소마다 언급된 것들은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은 이야기를 완성하는 하나씩의 벽돌 노릇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다.
은철이와 원이가 하던 스파이 놀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화자의 입을 빌어 독자들에게 해 줄 말을 두 아이의 스파이 놀이로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스파이 놀이는 결국 원의 아버지, 안덕규씨의 간첩 사건으로 이어진다.
<스파이는 비밀을 알아내는 간첩이야.
간첩? 간첩은 나쁜 사람이야. 신고해야 돼
간첩 중에는 나쁜 간첩이 있고 좋은 간첩이 있어. 스파이는 좋은 간첩이야.> (28쪽)
두 아이 사이에 오고간 이런 말들이 뒤에 등장하는 간첩사건을 예리하게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소설가의 예리한 표현력, 하나만 짚고 가자.
<원도 산에서 먹는 김밥의 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신발 밑창에 닿는 돌의 딱딱한 감촉과 가파른 경사면을 오를 때 종아리에 알이 배는 뻐근한 쾌감, 잠깐의 휴식 동안 흥건히 고였던 땀이 산바람에 식으면서 돋는 작은 소름의 맛까지 죄다 알고 있었다.>(248쪽)
종아리에 알이 배는 뻐근함이라니? 땀이 식으면서 돋는 소름? 이 정도의 표현이라면 정말 소름이 돋는 표현이 아닌가?
또 원이 생각하는 사태. 자기 집안에 일어난 사태, 그 사태는 원이 언니인 영의 교과서에서 보았다는 산사태와 눈사태를 연결시켜 그 사태가 그 어린 것에게 눈사태만큼이나 산사태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262쪽)
그런 문장들이 다 모여 이 소설을 이루고 있으니, 이 소설은 정말 한군데도 허투루 된 구석이 없다. 재미, 문장, 그리고 거기에서 뽑아내는 의미, 그리고 인생에서 지켜야 할 깨알 같은 도덕 등이 골고루 뭉쳐있는 맛있는 요리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작중의 이런 대목으로 이 소설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리고 (새댁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원도 그 옆에 앉아 같이 울었다.>(103쪽)
어머니인 새댁이 울 때에 같이 옆에서 울어주는 딸 원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렇게 여성은 어릴지라도 남의 아픔에,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한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이 대목으로 이 소설의 끝이 끝이 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난다면? 우는 것으로 끝나면, 너무 아리다, 가슴이. 해서 몇 문장을 더 잇고 싶다.
<저녁 비는 거리에 어두운 막을 씌우며 가늘고 줄기차게 내렸다. 한참 만에 새댁이 코 막힌 소리로 말했다.
“그만 울자, 원아”
“네, 어머니.”
“비를 좀 맞아도 괜찮겠지?”
“네, 어머니.”
“그럼 우산은 사지 말고.”> (104쪽)
그렇게 두 모녀는 비 뿌리는 저녁 우산도 없이 길을 뚫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소설가의 바람이 아니다. 작가는 매몰차게 나의 바람을 물리친다. 그렇다면? 소설은 그리 아니 끝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라도, ‘응 그것은 완전 소설이야, 현실은 그렇게 끝나, 봐, 아름답지 않아? 모녀가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갔대, 좋지?’ 라고 끝이 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