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집
송영화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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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다

 

1. 이 책으로 극복한 수필집 트라우마

 

'내가 어느새 수필 읽는 재미에 빠졌나 보다.'

이 책을 스스럼 없이 들고 있는 나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시도 때도 없이 책을 냈노라며 보내오는 수필집들, 이게 종이의 낭비 아닌가? 애꿎게 나무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깜냥이 못되는 수필집이 시중에 차고 넘치는데, 그래서 내가 그런 책을 기피하는 습관이 저절로 들었었는데, 이 책은 예외임에 틀림없다.

 

그런 책들은 보내준 성의를 생각해서 열심히 읽고나면 남는 것은 씁쓸한 감정의 무더기뿐이다.이거 자기 자랑 아닌가? 이제 먹고 살만하다고, 여고 시절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 수필인척 하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또한 빠지지 않는 것이 다른 동창들은 다 속물로 늙어가는데 자기만은 교양있게 늙어가고 있다는 자화자찬을 끝내면, 이제 남편 출세했다는 이야기로 방향을 옮기며 아들 자랑에 며느리까지 더하며, 더하여 자기는 이해심 많은 시어머니 노릇을 하고 있다는 국화빵들을 열심히 찍어낸다. 또 추천사를 보면 어떤가? 문화교실의 지도교사쯤으로 보이는 수필가가 이 책이야말로 수필의 정수를 보여준다며 너스레를 떨어대는 책들을 두권쯤 읽고나면, 그것도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내 머리에 남게 된다. 그래서 다른 수필집을 대하면 이 책도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하는 자라보고 놀란 토끼모양이 되는 것일까? 미사여구만 잔뜩 모아다 짜깁기 하는 것이 수필인줄 아는 유한마담의 책이 아닐까, 하며 지레 겁을 먹게 하는 그런 트라우마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수필집이란 저만치 밀어 놓았다가, 목차를 훑어본 후 그 중에 몇 개 읽어보고는 팽개치는 그러한 장르의 문학이었다. 해서 수필이라면 손을 휘휘 내저을 정도가 되었는데, 어느 새인가 수필을 읽는 재미에 빠졌으니, 그것은 김서령의 <참외는 참 외롭다>를 읽고 난 후부터다. (http://blog.yes24.com/document/7792325)

그 책을 읽고나서 수필도 작가 나름이구나, 하며 수필집 트라우마에서 회복하는 기미가 보였는데, 이 책 <반집>, 이 책을 읽는 동안에 그 트라우마가 말끔히 고쳐졌음을 알게 되었다.

 

2. 글이 아름다운 무늬를 이룬다.

 

일단 이 책의 글은 아름답다. 그냥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며 작자가 그려내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읽으면 된다. 경치를 완상하고 음미하듯, 저자가 그려내고 있는 생각과 상황들을 그저 따라가며 즐기면 된다. 그만큼 이 안에 들어있는 글들이 편안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더하여 글들이 잘 짜여 있다. 노련한 솜씨로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내는 솜씨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작자가 그려내는 글의 무늬는 굳이 덧붙여 설명하거나,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이루어짐(完成)이다. 그만큼 매력적이다.

 

3. 문장 공부하려거든 이 책을 읽어라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수필들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명문장이다. 그런 문장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문장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된다. 운율도 어느 사이에 문장 사이에 생겨난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이런 문장이다.

동생네 화장실 수도꼭지는 빛이 난다. 스텐 손잡이에 물방울 자국이 하나 없다. 깨끗이 씻어 닦은 변기와 가지런히 걸린 수건까지, 볼 때마다 깨끗하다.”(86)

 

읽어보시라. 두 번 정도 읽으면 저절로 운율이 입에 따라오지 않는가?

이 문장의 형식을 패러디 해서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이 글들은 빛이 난다. 글 가운데 억지 자국이 하나 없다. 깨끗이 씻어 닦은 글들과 가지런히 배치된 행간내용까지, 읽을 때마다 빛이 난다.”

 

그런 글들을 몇 편만 읽어가노라면 내가 서두에 수필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문장공부를 하게 되는 셈이다.

 

4. 엄마로서, 아니 부모로서 생각 좀 하고 살려면 이 책을 읽어라

 

이 저자의 생각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글은 글쓴이의 인격과 생각을 보여준다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생각이 얼마나 올곧고 바른 길을 가는지를 알게 된다. 그가 아들에게 보여주는 모습- 바둑을 하겠다고 나선 아들에게 대하는 태도 - 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부모가 무릇 어찌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모든 어머니가 그랬으면 좋을테지만, 그래도 이런 어머니가 있다는 자체가 이 사회에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흐믓했다.

 

이런 사례는 굳이 여기에서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이 수필집의 1 , <몰래 나선 여행>에 포함된 10편의 글이 모두다 여기에 해당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부모로서, 생각 좀 하려고 한다면 이정도 되어야 하고, 그러면 이런 글쯤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5. 기억 이야기 하나 - 기억을 꺼내는 법

 

저자는 기억을 꺼내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되게. 그가 어떻게 기억을 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지, 이런 기억을 보자. 98쪽부터 시작되는 <돈쓰기>라는 제목의 글이다.

 

저자는 먼저, ‘이십여년 만에 만난 친구는 여전히 돈 없다는 타령을 해 댔습니다라고 운을 뗀다. 학창시절에 같이 지내던 친구, 이제 이십 여년만에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학창시절에 매점에 가면 언제나 빵 값을 내지 않고 그냥 저자가 내는 것이 당연한 양 먹던 친구다. 그 친구를 이십여년 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지갑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간다. 할머니도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 ~~ 의 문장이 바로 기억을 꺼내는 방법이다. 그 말 한마디로 기억은 자연스럽게 할머니로 옮아간다. 그리고 할머니를 따라 저자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꺼내놓는다.

 

할머니도 그랬습니다.”라는 말에 기대어, 나도 “(내가 아는) 누구도 그랬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내 이야기도 하나쯤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6. 기억 이야기 둘 - 기억을 닦아 윤내기

 

이번 역시 기억에 관한 글을 읽어보자. 86쪽의 <기억닦기>. 

잔잔하고 애잔하다. 이글을 읽고 있노라면 내 기억도 한번 꺼집어 내어 닦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애잔한 가족사를 꺼집어 내어 현재의 생활을 관조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기억을 닦는 것이다.

 

아까 문장 공부가 저절로 된다며 예를 들었던 부분, “동생네 화장실 수도꼭지는 빛이 난다. 스텐 손잡이에 물방울 자국이 하나 없다. 깨끗이 씻어 닦은 변기와 가지런히 걸린 수건까지, 볼 때마다 깨끗하다.”(86)로 시작되는 한편의 애잔한 드라마같은 수필이다.

 

읽고나면 그 기억이 얼마나 깨끗하고 예쁘게 보이는지, 정말 기억을 잘도 닦았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런 글중에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저자의 숨겨놓은 위트 한 조각도 음미할 만하다.

동생이 내 말을 너무 새겨들었나 싶어 웃음이 난다. 지나쳐도 탈이라고, 이젠 동생이 화장실이 깨끗하다 못해 수도꼭지 손잡이에 자국을 남길까봐 조심스러울 지경이다.”(87)

 

어린 시절, ‘꿈에서조차 어수선한 집에서 살았기에 걸레를 빨아 수없이 닦아도 늘 쌓이는 먼지들로 닦으나 안닦으나 그게 그거였던 집에서 살았던 기억들, 그런데 고모가 집에 다니러 올때에는 그런다고 자매는 혼이 난다. 애쓴 보람이, 수고한 보람이 없이 그게 그거니까, 혼이 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 안타까운 시절을 보내고, 이제 각자 살림을 하게 된 자매는 닦기에 열심이다. 그런 닦음에 대한 기억을 저자는 잘 닦아 내놓고 있다.

 

7. “사족이다!!!!” - 이 말이 사족이기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흠이라면? 바로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송영화론>이다. 문학평론가 김종환이 쓴 일종의 서평인데, 이게 문제다. 차라리 이것이 없었으면 그냥 아름다운 글, 어머니이며 수필가인 송영화의 수필을 아주 개운한 마음으로 읽었다 싶을 것인데, 이 평론이 붙는 바람에 입맛을 버려버렸다. 왜 꼭 이런 것을 덧붙인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사족이 아닌가? 왜 굳이 수필을 읽으면서 작가 자신의 성격연구’(273)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 못한 것이 수필의 문학세계가 심층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인가? 꼭 문학이 개인 구원(274)에 역할을 해야 한단 말인가? 더해서 저자의 글에 꼭 사회의식’(284)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인가?

 

해서, 이 책이 훌륭하게 수필집 트라우마를 해소시키는 역할을 해 주었는데 이 평론으로 또다시 트라우마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이번에는 수필집 끝부분 평론 트라우마’! 일종의 사족 트라우마. 다른 분들에게는? 제발, 이 덧붙임 말이 사족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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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편견 - 열 개의 오해, 열 개의 진심, 김태훈 인터뷰집
김태훈 지음 / 예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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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 읽었다.

 

참 잘 읽었다. 정말이다. 이건 빈 말이 아니다.

잘 읽었다는 말의 의미는 두가지이다.

첫째, 잘 읽었다는 말은 '이 책을' 읽기 잘 했다는 것이다. 다른 책 대신에 이 책을 택한 것이 결과적으로 잘 했다는 말이다.

둘째, 잘 읽었다는 말의 의미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 저절로 나오는 탄성, ‘잘 먹었다할 때의 그 의미이다. 잘 읽었다.

그러니, 여럿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하여 읽은 것이 잘 읽었다는 첫째 의미이고, 둘째 의미는 이 책 자체를 맛있게 음식 먹듯이 잘 읽었다는 뜻이다.

 

첫째 항목에 대하여 부연하자면, 인터뷰 기사를 가지고 책을 쓴 경우 대부분 - 물론 내가 접한 내용에 한정해서 - 변명 또는 해명성 내용인 경우가 많았기에, 이 책 역시 읽기를 망설였었다. 그래도 그 목록에 포함된 사람들을 보니 무언가 있겠다 싶어 집어 들었는데, 그것을 잘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을 그렇고 그런 허투루 쓴 책으로 치부하지 않고 집어 들었다는 것, 그것이 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잘 읽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둘째 항목에 대하여는 말이 좀 길다.

먼저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의 스펙트럼이 대단하다. 정치, 문학, 예술, 음악, 그리고 마술까지 저자의 촉수에 잡힌 내용들의 넓이가 대단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사회의 단면을 한 번 심도있게 관찰한 느낌이 든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가만히 앉아서 저자가 보여주는 이 사회의 문제점들에 관한 브리핑을 들은 느낌이라 할 수 있다.

 

2. 편견이라는 주제

 

그 이유는? 바로 저자가 인터뷰를 한 중요 목적으로 편견이라는 주제를 잡았기에 그렇다.

편견!

인터뷰이들이 편견으로 인하여 당하고 있는 피해들을 하나씩 잡아내어, 그들의 발언을 들어봄으로써 그 편견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런 것은 저자가 인터뷰이들과 나누는 대화중에 여실히 들어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만큼은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34)

 

<이것 역시 제 편견입니다만, 여성 작가의 사건치고는 굉장히 강렬합니다.>(119)

 

또한 낸시 랭에게 인터뷰의 목적을 설명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나의 편견일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는데요.>(232)

 

가장 그 편견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신해철의 발언이다.

편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아주 적절한 답변이 신해철의 발언을 통하여 나타난다.

 

<게다가 더 큰 공포는 대중들이 알고 있는 신해철의 단편을 조합해서 나머지 빈 공간을 채워버리는 거예요.>(216)

 

무슨 말인지? 다음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한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을거야, 라고 상상하고 그 말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216)

 

그렇게 편견은 시작되고, 그 편견은 헛소문으로 정착되게 된다는 말이다.

 

3. 이 책의 의의 또는 가치

 

여기에서 이 책의 의의와 가치가 드러난다. 이 책은 그런 편견을 위해서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기 전에, 가다머의 선입견(또는 편견)에 관한 생각을 소개해 본다.

 

가다머는 현대사회가 갈등이 존재하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된 것은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선입견이나 편견은 자신만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는 태도를 말한다. 편견은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처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현재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대화를 통한 지평의 융합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지평융합이 이루어지려면, 그럴만한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이 서평을 쓰는 시점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서로간의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바람직한 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이는 낸시 랭과 변희재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259쪽 이하) 요원한 일이다. 결국 편견은 배척으로 그리고 증오로 연결되기에, 그런 편견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이 책의 가치는 높이 사야 할 것이다.

 

4. 다양한 삶의 변주곡을 들려준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은 저자가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삶의 변주곡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을 보는 창을 열고 바라본 느낌, 아니 창이 아니라 여태껏 닫힌 문인 줄 알고 열 생각을 하지 않다가, 저자의 안내로 비로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땅을 밟아보는 느낌. , 이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이로구나, 세상이로구나...하며 경탄을 발하는 느낌,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인터뷰의 기획의도에서 드러난다.

 

<세상의 속도가 어떻게 가든지 내 방식대로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67)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72)

 

또한 이 책은 굳이 인터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런 형식을 해체하고 읽어도 훌륭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각자 하나씩의 주제로 재편성해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예컨대, 속물과 잉여 담론(78), 진입장벽에 관한 담론 (79쪽 이하), 공교육에 관한 성찰(83),

 

5. 김태훈의 아포리즘

 

저자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뽑아낸 주옥같은 아포리즘 몇 개만 들어보자.

 

<우리가 외로운 것은 옆 사람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이다.(5)

<드라마란? 일상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주인공이 분투하는 이야기이다.> (21)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아는만큼 더 알 게 많아져요.>(192)

<신념과 신념이 만났을 때, 정의로운 신념과 잘못된 신념이 서로 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것들을....> (51)

 

수잔 손택, “같은 공간 안에 특권을 누리는 우리가 있고 불행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의 특권이 저들의 불행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봐야 한다.”(87)

 

신해철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유념해 읽을만한 대목이다.

< 국가가 공교육과 같은 도구를 통해서 각 개인이 스펙을 쌓고 최적화되기를 요구한다면 거기에 부응해서 자기계발서를 30권 정도 읽고 스펙을 쌓아올리면 그 인간은 끝까지 불행할 수 밖에 없는거죠.>(210)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에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 바로 저자기 인터뷰 기사를 끝낸 다음에 ‘...ending' 이라는 타이틀 아래 몇 자씩 덧붙인 말이 있다. 그 것을 꼭 읽어보시기를. 읽지 않으면? '후회하실 겁니다!!!'

 

6.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

 

끝으로, 이 책에서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가 있다. 영화감독 류승완이 딸과 나누었다는 대화에서 발견한 것이다. (32-33)

아버지 류승완이 딸에게 물었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하겠냐고. 그러자 딸이 대답하기를......

잠깐, 그 대답은 그냥 재치있다거나, 입심으로 적당히 넘어가는, 예사 대답이 아니다. 그런만큼 여기에서 그것을 밝히는 것은 영화로 말하자면 스포일러가 되는 격이니, 양해하시라.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이 그런 정도의 생각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류감독 딸의 사려깊은 대답을, 독자여러분은 이 책을 직접 읽어 확인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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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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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참고되는 책들을 보면서 읽었기에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걸린만큼 얻은 것은 많다. 그만큼 의미있는 책이 분명하다.

 

먼저 이 책의 계보를 찾아보자. 수많은 아감벤의 저술 중에서 이 책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 이 책 <벌거벗음>은 아감벤의 중요한 사유 <호모 사케르>의 연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호모 사케르>를 필두로 하여, <예외 상태>등 다른 저작을 거쳐 이제 <벌거벗음>에 이르고 있다.

 

 

1. 동시대인

 

 

이 책의 저자를 둘러싼 논의를 추적하다 보면, 라캉, 지젝, 그리고 알랭 바디우가 보인다. 마침 그런 논의에 관심이 있던 차에, 이 책은 종으로 횡으로 연결이 되어 나의 독서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 있다.  ‘동시대인이란 개념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어떤 경우든 텍스트들과 동시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번 세미나에서 검토하는 텍스트나 작가들과 반드시 동시대인이 되어야 한다.> (22)

 

롤랑 바르트: 동시대성이란 반시대적이다.

 

니체: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을 내가 여기서 시대의 폐혜로, 질병과 결함으로 이해하려하기 때문이다.(23)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사람, 그의 시대에 진정 속해 있는 사람은 시대와 일치하지도,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의미에서 비시대적이다. (23)

 

문제는 이런 동시대적이란 말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반시대적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의 시대를 잘 보고 파악할 수 있기에 그렇다.(23)

 

동시대성은 한 사람이 그의 시대와 갖는 독특한 관계이다. 즉 동시대성은 시대에 들러 붙어 있지만 동시에 시대와 거리를 둔다. (23- 24)

 

특정시대에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24)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동시대인이란 개념이 대략 그러하다.

그렇게 이 책에서 동시대인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니, 전에 읽었던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조금 자세하게 이해하며 다시 읽을 수 있었으니, 이 책을 읽은 유익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장이 바로 바울, 우리 시대의 동시대인이다.

 

2. 비잠재성과 무위

 

이 책 5,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라는 장은 매우 흥미로는 부분이다,

 

<잠재성은 어떤 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척도이다.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는 능력인데, 이것이 인간 행동의 등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불꽃은 불타는 것 밖에 못하며, 인간 이외의 생물은 스스로의 고유한 잠재성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생물학적인 소명에 각인된 단순한 행동만을 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은 고유한 비잠재성의 역량을 가진 동물이다.> (75)

 

그러나 이런 비잠재성을 아감벤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 다음의 발언에 있다.

 

<권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주로 인간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한다. >

 

<비잠재성으로부터의 소외만큼 우리를 빈곤케 하고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여전히 저항할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스스로의 비잠재성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 저항 능력을 상실한다.> (76-77)

 

그래서 이런 아감벤의 사유는 결국 호모 사케르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아감벤이 말하고 있는 잠재성무위를 역자는 아감벤 사유의 핵심’(187)이라 지칭하니, 내가 읽기는 제대로 읽은듯 하다.

 

3. 벌거벗음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흥미를 가지고 읽은 부분은 제 7벌거벗음이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차지하고 있는 분량도 제일 많다. 전체 180여 쪽에서 이 부분이 50여쪽이 되니 말이다.

 

벌거벗음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벌거벗음의 개념은 무엇인가?

옷은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동물과 구분짓게 해주는 핵심장치이다. 또한 옷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부족함, 결여의 상징이다.

따라서 에덴에서의 삶은 벌거벗었지만 거기에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범죄 이후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벌거벗음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옷은 아감벤이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부족한 것, 결여된 것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있어서 벌거벗음은 단지 그러한 정도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다. 벌거벗음은 결국 주권 권력에 예속된 벌거벗은 생명- 삶과 연결되어 있다. (184)

 

벌거벗음은 신학적 사유로부터 시작되어 결국은 주권 권력과의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으로 귀착이 된다. 그렇게 아감벤은 그의 호모 사케르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책이란 책 그 자체에서 끝이 나는 것이라면 무언가 부족한 책이다. 그 책을 읽고 그 곳을 기점으로 다른 넓은 곳으로, 혹은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시작점, 남상(濫觴)이 되어야 책다운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바로 이 책이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호모 사케르>에 대해 천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으며, 또한 이 책에 언급된 카프카 등등 나의 시선을 돌려 더 깊고 넓은 세계로 향하게 되었으니, 이 책의 고마움은 또한 거기에도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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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홍의 황금시대 -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
추이칭 지음, 정영선 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그래도 사랑받는다면, 황금시대>

 

제목이 주는 시사점, 하나

 

먼저, 제목이 샤오홍의 황금시대라는 말을 염두에 두자.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녀의 생애 속에서 황금시대로 분류할 수 있는 시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상하다. 모두다 힘들고, 어렵고 보는 사람들마저 안타깝게 생각하게 만들고, 어찌 위태위태하다며 걱정할 만큼의 인생을 살았는데, 그 인생이 황금시대라니?

저자는 여기에서 한 인생의 삶을 결코 우리 평범한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흔히 평안하고, 손쉽게 살아가는 인생을 그리고 남들 보기에 부럽게만 보이는 시절을 황금시대라 부르지만, 그녀의 인생을 결코 그런 안목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녀의 인생을 거꾸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인생 중 어느 시절이 황금시대였을까? 길지 않은 생애 중에서 특별히 어느 시절을 황금시대라 꼽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녀의 인생중 어느 한부분만을 꼽아 그 시절만 황금시대라 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매 순간이 모두다 황금시대였다. 다른 사람들 - 설령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매순간 살았기에 그녀의 인생은 매순간이 모두다 황금시대인 것이다.

 

왜일까? 그녀가 자기만의 인생을 살았기에 그렇다. 그녀는 그런 자기만의 인생을 고집했다. 아무리 다른 단어를 찾으려 해도 고집이라는 단어 밖에 달리 다른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고집이라 표현한 의미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판단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그 저변에는 고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집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사랑에 관한 고집이다.

애정 결핍으로 인한 상실감을 메꾸기 위해 그는 사랑을 원했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그녀는 원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았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래서 그녀는 사랑 받았기에, 그녀의 인생은 황금시대였다.

 

제목이 주는 시사점,

 

그녀에게 사랑을 준 사람은 이 책에 소개된 사람만 해도 네 명이 된다. 샤오쥔, 두안무, 뤼빈지, 그리고 본의 아닌 약혼자 왕언지아.

 

그런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이 책은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라는 광고 카피를 책의 표지에 싣고 있다. 실상 이것이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사랑을 찾아 헤맨 한 여인의 기록이다. 그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난 기록이 바로 그녀의 삶인데, 그녀가 찾아낸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생을 마감하면서, 그 사랑을 찾았고, 그 사랑에 만족하고 눈을 감았을까?

 

병상에 누워있는 샤오홍에게 두안무는 드문드문 나타난다. 입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때문이다. 그러나 샤오홍은 그런 두안무에게 마냥 섭섭함을 느낀다.

 

<뤄빈지는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갔다. 두안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샤오홍은 혼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걸어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따뜻한 위로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준다면 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가.’>(265)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시간일망정 곁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과연 샤오홍이 꿈꿨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샤오홍이 가지고 싶었던 사랑, 받고 싶었던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을 남겨둔 채, 끝이 난다.

 

그녀의 삶은 뤄빈지의 회상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고, 그녀가 얼마나 힘겨운 삶을 견뎌냈는지, 하늘은 왜 그녀에게 행복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270)

 

결론하여, 사랑은 힘든 것일까? 사랑을 주고 받고, 겸하여 같이 있는 사랑, 영원한 사랑은 얻기 어려운 것일까? 그러한 사랑을 찾아 다닌 한 여인의 생애를 읽으면서, 가슴에 남는 것은? 슬픔이다.

 

기타, 몇가지

 

이 책의 서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짚을 게 있다.

첫 번째는 기록 면에서, 작가의 전지적 시점에서 기록하는 것은 나무랄 수 없지만, 너무 과하게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독자로서 따라가기 어렵다.

 

예컨대, 그의 두 번째 남자, 샤오쥔은 이 책의 서술 시점에 의하면 77쪽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등장하는 모습도 샤오홍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일단 독립적으로 등장하고, 그 다음에 그의 인생에 샤오홍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틈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샤오홍의 인생에 샤오쥔이 개입하는데, 맨처음에는 샤오쥔의 인생에 샤오홍이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독자들에게는 77쪽 이후에나 같이 등장하는 것이 이야기의 전개상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 책에서 샤오쥔은 그 전에 이미 등장한다.

 

<장슈커는 1936년 친황다오에서 배를 탔다. 화물칸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 한 후 샤오쥔을 찾았다. 샤오쥔은 그가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61)

 

독자로서는 (그 시점에서) 알지 못하는 인물인 샤오쥔이 이때 벌써 등장하는 셈이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 사람이 누구지? 하는 생각에 잠시 소설의 맥을 놓치게 된다. 그런 경우가 뒤에서 몇 번 더 나타난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타나서 - 독자에게는 이름만 언급된 채로 - 샤오홍의 삶에 관련을 하고 난 다음에, 그가 누구인가 하는 설명은 뒤에 나타나니, 독자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이 책의 화자는 제 3, 그러니 작가인 셈이다. 그래서 작가의 전지적 관점에서 소설을 끌어가는 것이 이상할게 없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 우리라는 화자가 등장한다. 165쪽과 175쪽이다.

 

<두안무가 게으른 사람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165)

<여기서 우리가 잊어선 안되는 것이 샤오홍은 이 때 임산부였다는 사실이다.>(175)

 

이 때의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화자의 변동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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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우의 집>을 읽고

 


심봤다~”라는 구호를 아시는지?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했을 때에 그것을 발견했다고 외치는 감탄, 신호의 말이다.

이 책을 얼마쯤 읽었을까?

무심히 첫 페이지를 열고 심드렁하게 읽어가던 나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215쪽이다.

순분의 혼잣말, “그 죄를 다.......어떻게 받으려고....”를 읽었을 때다. 

나의 가슴에 짜릿한 그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페이지마다, 소설속의 상황과 또 등장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는 비수가 되어, 한번은 찔림으로 또 한 번은 울림이 되어, 번갈아가며 나를 휩싸기 시작하였다. 


, 이거다! 소설은 이런 맛에 읽는 것!

저절로, “심봤다!‘라는 울림이 내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제야, 내가 이 책을 무심코 펼쳐 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심코 펴들었다는 것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우의 집? 인형? 무슨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아니면 혹시 중국의 어느 시대엔가, 임금의 무덤에 같이 묻었다는 흙인형! 


그렇게 무심히 읽어가던 나는 215쪽에 이르기까지. 그저 원(안원)이라는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살이, 간난신고(艱難辛苦)한 세태를 그려내는 줄 알았다. 또 하나의 성장소설? 그래도 참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구나. 그래서 이 책의 결말은 그 원이네 가족이 조금 형편이 나아져 삼벌레 고개 여기가 딱 중간이지 싶은 마을, 순분네 셋집에서 벗어나 어딘가 조금은 형편이 좋은 곳으로 옮겨가는 작별의 장면을 기대하며 읽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트릭이었다. 그 트릭에 나는 완전히 속았다. 아기자기하게 봄의 악장을 연주하던 이 책은 어디쯤 갑자기 그 조가 바뀌더니, 광란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여름으로,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눈보라를 동반한 혹독한 추위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니, 그 변화가 실로 무쌍하였다. 그 즈음쯤 변화는 되돌이표를 반복하며 끝이 났다. 그러니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 이러면 안되는데....안되는데......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초반에는 아지자기한 아이들 소꿉놀이같은 묘사에, 또한 등장인물들을 이야기의 요소요소마다 배치해 놓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플롯을 구사하는 솜씨에 경탄하고, 이어서는 작가가 그 속에 숨겨놓은 그 무시무시한 이빨에 경악하는 재미 - 이런 것도 재미라 표현해도 되는지? -에 빨려들어가, 두 시간을 몰아지경에서 지냈으니, 참 작가의 힘은 세다, 놀랍도록 세다. 이것이 소설의 힘이런가? 무릇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일까? 


먼저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힘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인물 배치. 보험아줌마(성계희)는 왜 등장시켰을까? 운문원의 임보살 - 온갖 신앙을 잡탕으로 섞어 기복화하는(59) - 은 왜 등장시켰을까? 


먼저, 성계희, 보험여자다. 물론 이 여자의 역할은 다양하지만, 그로 인하여 보험에 대한 언급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데, 결국은 이런 말도 하기에 이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드는 보험은 왜 없느냐...> (269) 


말인즉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질병, 죽음, 사고 등등에 대비하는 보험은 존재하는데, 왜 이렇게 간첩사건에 연루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처지를 대비하는 보험은 없는지, 한탄하는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 중 하나이다. 보험 여자, 성계희의 존재가 이런 말로 시대를 묘사하는 역할도 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 놀랍다 


다음, 임보살은? 그는 은철이가 사고를 당한 후에 순분이 의지할 도피처로 작동을 한다. 그런데 그 도피처는 과연 안전한 곳인가?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 그 보살님이 숱해 고쳤어. 굿 힘으로 우리 은철이, 멀쩡하게 다시 걸을 수도 있잖아, 새댁?” (207) 


그렇게 순분은 임보살을 의지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굿의 효험으로 깨진 무릎이 매끈한 도자기처럼 회복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12)



이것은 순분이 새사람으로 바뀌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남의 험담을 즐겨하던 순분은, 이제 남의 험담을 듣고도 "이상하리만큼 아무 관심도 생기지 않“(215)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이런 발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 죄를 다....어떻게 받으려고..” (215) 


이렇게 임보살은 순분을 쥐락펴락 하면서 그를 옭아매는 장치로 출연한다. 결국은 그 굴레를 떨치고 나오는 것으로, 순분은 거듭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순분이라고 생각한다. 초반에 주인공은 순분네 집에 세들어 사는 전직 교사 새댁이었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주인공은 순분으로 바뀐다. 


이유는? 순분이 비로소 세상이 어찌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임보살을 배치하여 순분네를 옭아매었다가 풀려나게 한 것은 결국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다가, 이제 진정한 눈을 떠 다르게 보기 시작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 즉 그렇게 눈을 뜬 사람이 주인공 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순분의 변화는 이렇게 실현되고 있다.

<순분은 김밥 하나를 집어들고......예전처럼 식구가 몇인데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런 알량한 것을 가져왔냐는 둥, 필체가 활달하면 뭐할 것이냐고 손이 이렇게 잘 생겨서 잘 살기는 틀렸다는 둥 하는 험담은 일절 하지 않았다.>(245) 


그리고 원의 집안에 불어닥친 피눈물나는 사건 가운데에서, 동네 사람들은 모두다 원이네를 핍박해도, 순분만은 감싸고 보살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깨달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등장 인물들 하나 하나는 이 소설의 곳곳마다 이야기를 요소요소마다 변곡점을 찍어내는 인물들로 만들어간다 


, 삼벌레 고개 중턱 소년들의 사소한 행동인 높이의 모험넓이의 모험이 서두에 언급된 이유는? 처음에는 그저 아이들의 철없는 놀이를 소개하려는 추억거리의 소개쯤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뒤의 사건 하나를 꺼내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치를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듯이, 무심한 듯 배치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금철이가 은철을 끼고 개울을 건너뛰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데, 없어서는 안될 전주곡인 셈이다. 그 놀이가 없었으면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요소요소마다 언급된 것들은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은 이야기를 완성하는 하나씩의 벽돌 노릇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다. 


은철이와 원이가 하던 스파이 놀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화자의 입을 빌어 독자들에게 해 줄 말을 두 아이의 스파이 놀이로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스파이 놀이는 결국 원의 아버지, 안덕규씨의 간첩 사건으로 이어진다 


<스파이는 비밀을 알아내는 간첩이야.

간첩? 간첩은 나쁜 사람이야. 신고해야 돼

간첩 중에는 나쁜 간첩이 있고 좋은 간첩이 있어. 스파이는 좋은 간첩이야.> (28)


두 아이 사이에 오고간 이런 말들이 뒤에 등장하는 간첩사건을 예리하게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소설가의 예리한 표현력, 하나만 짚고 가자.


<원도 산에서 먹는 김밥의 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신발 밑창에 닿는 돌의 딱딱한 감촉과 가파른 경사면을 오를 때 종아리에 알이 배는 뻐근한 쾌감, 잠깐의 휴식 동안 흥건히 고였던 땀이 산바람에 식으면서 돋는 작은 소름의 맛까지 죄다 알고 있었다.>(248) 


종아리에 알이 배는 뻐근함이라니? 땀이 식으면서 돋는 소름? 이 정도의 표현이라면 정말 소름이 돋는 표현이 아닌가 


또 원이 생각하는 사태. 자기 집안에 일어난 사태, 그 사태는 원이 언니인 영의 교과서에서 보았다는 산사태와 눈사태를 연결시켜 그 사태가 그 어린 것에게 눈사태만큼이나 산사태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262)


그런 문장들이 다 모여 이 소설을 이루고 있으니, 이 소설은 정말 한군데도 허투루 된 구석이 없다. 재미, 문장, 그리고 거기에서 뽑아내는 의미, 그리고 인생에서 지켜야 할 깨알 같은 도덕 등이 골고루 뭉쳐있는 맛있는 요리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작중의 이런 대목으로 이 소설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리고 (새댁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원도 그 옆에 앉아 같이 울었다.>(103) 


어머니인 새댁이 울 때에 같이 옆에서 울어주는 딸 원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렇게 여성은 어릴지라도 남의 아픔에,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한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이 대목으로 이 소설의 끝이 끝이 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난다면? 우는 것으로 끝나면, 너무 아리다, 가슴이. 해서 몇 문장을 더 잇고 싶다.

<저녁 비는 거리에 어두운 막을 씌우며 가늘고 줄기차게 내렸다. 한참 만에 새댁이 코 막힌 소리로 말했다.

그만 울자, 원아

, 어머니.”

비를 좀 맞아도 괜찮겠지?”

, 어머니.”

그럼 우산은 사지 말고.”> (104) 


그렇게 두 모녀는 비 뿌리는 저녁 우산도 없이 길을 뚫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소설가의 바람이 아니다. 작가는 매몰차게 나의 바람을 물리친다. 그렇다면? 소설은 그리 아니 끝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라도, ‘응 그것은 완전 소설이야, 현실은 그렇게 끝나, 봐, 아름답지 않아? 모녀가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갔대, 좋지?’ 라고 끝이 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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