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받는다면,
황금시대>
제목이 주는
시사점,
하나
먼저,
제목이
샤오홍의 ‘황금시대’라는
말을 염두에 두자.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녀의 생애 속에서 황금시대로 분류할 수 있는 시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상하다. 모두다
힘들고,
어렵고
보는 사람들마저 안타깝게 생각하게 만들고,
어찌
위태위태하다며 걱정할 만큼의 인생을 살았는데,
그
인생이 황금시대라니?
저자는 여기에서 한 인생의 삶을
결코 우리 평범한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흔히 평안하고,
손쉽게
살아가는 인생을 그리고 남들 보기에 부럽게만 보이는 시절을 황금시대라 부르지만,
그녀의
인생을 결코 그런 안목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녀의 인생을 거꾸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인생 중 어느
시절이 황금시대였을까?
길지
않은 생애 중에서 특별히 어느 시절을 황금시대라 꼽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녀의
인생중 어느 한부분만을 꼽아 그 시절만 황금시대라 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매 순간이 모두다 황금시대였다.
다른
사람들 -
설령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매순간 살았기에 그녀의 인생은 매순간이 모두다 황금시대인 것이다.
왜일까?
그녀가
자기만의 인생을 살았기에 그렇다.
그녀는
그런 자기만의 인생을 고집했다.
아무리
다른 단어를 찾으려 해도 ‘고집’이라는
단어 밖에 달리 다른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고집이라
표현한 의미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판단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그 저변에는 고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집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사랑에 관한
고집이다.
애정 결핍으로 인한 상실감을 메꾸기
위해 그는 사랑을 원했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그녀는
원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았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래서
그녀는 사랑 받았기에,
그녀의
인생은 황금시대였다.
제목이 주는
시사점,
둘
그녀에게 사랑을 준 사람은 이 책에
소개된 사람만 해도 네 명이 된다.
샤오쥔,
두안무,
뤼빈지,
그리고
본의 아닌 약혼자 왕언지아.
그런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이 책은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라는
광고 카피를 책의 표지에 싣고 있다.
실상
이것이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사랑을 찾아 헤맨 한 여인의 기록이다.
그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난 기록이 바로 그녀의 삶인데,
그녀가
찾아낸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생을 마감하면서,
그
사랑을 찾았고,
그
사랑에 만족하고 눈을 감았을까?
병상에 누워있는 샤오홍에게 두안무는
드문드문 나타난다.
입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때문이다.
그러나
샤오홍은 그런 두안무에게 마냥 섭섭함을 느낀다.
<뤄빈지는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갔다.
두안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샤오홍은
혼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걸어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따뜻한 위로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준다면 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가.’>(265쪽)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시간일망정 곁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과연
샤오홍이 꿈꿨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샤오홍이
가지고 싶었던 사랑,
받고
싶었던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을 남겨둔 채,
끝이
난다.
그녀의 삶은 뤄빈지의 회상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고,
그녀가
얼마나 힘겨운 삶을 견뎌냈는지,
하늘은
왜 그녀에게 행복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270쪽)
결론하여,
사랑은
힘든 것일까?
사랑을
주고 받고,
겸하여
같이 있는 사랑,
영원한
사랑은 얻기 어려운 것일까?
그러한
사랑을 찾아 다닌 한 여인의 생애를 읽으면서,
가슴에
남는 것은?
슬픔이다.
기타,
몇가지
이 책의 서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짚을 게 있다.
첫 번째는 기록
면에서,
작가의
전지적 시점에서 기록하는 것은 나무랄 수 없지만,
너무
과하게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독자로서 따라가기 어렵다.
예컨대,
그의
두 번째 남자,
샤오쥔은
이 책의 서술 시점에 의하면 77쪽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등장하는
모습도 샤오홍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일단
독립적으로 등장하고,
그
다음에 그의 인생에 샤오홍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틈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샤오홍의 인생에 샤오쥔이 개입하는데,
맨처음에는
샤오쥔의 인생에 샤오홍이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독자들에게는 77쪽
이후에나 같이 등장하는 것이 이야기의 전개상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 책에서 샤오쥔은 그 전에 이미 등장한다.
<장슈커는
1936년
친황다오에서 배를 탔다.
화물칸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 한 후 샤오쥔을 찾았다.
샤오쥔은
그가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61쪽)
독자로서는
(그
시점에서)
알지
못하는 인물인 샤오쥔이 이때 벌써 등장하는 셈이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
사람이 누구지?
하는
생각에 잠시 소설의 맥을 놓치게 된다.
그런
경우가 뒤에서 몇 번 더 나타난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타나서 -
독자에게는
이름만 언급된 채로 -
샤오홍의
삶에 관련을 하고 난 다음에,
그가
누구인가 하는 설명은 뒤에 나타나니,
독자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이 책의 화자는 제
3자,
그러니
작가인 셈이다.
그래서
작가의 전지적 관점에서 소설을 끌어가는 것이 이상할게 없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 ‘우리’라는
화자가 등장한다.
165쪽과
175쪽이다.
<두안무가
게으른 사람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165쪽)
<여기서
우리가 잊어선
안되는 것이 샤오홍은 이 때 임산부였다는 사실이다.>(175쪽)
이
때의‘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화자의 변동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