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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죽음들 -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과학수사에 남긴 흔적을 따라서
브루스 골드파브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9월
평점 :
아주 작은 죽음들
다음 설명을 읽고, 그런 설명에 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보자.
미국인이다. 여성이다. 그런 사람중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지?
그녀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대학학위조차 없는 여성이 미국 최고의 법의병리학자보다 법의학과의 사명에 관해 더욱 완전하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은 명백했다. (250쪽)
1943년 뉴햄프셔주 경감으로 임명되었다. (265쪽)
법의학 분야의 선구자이며 법의학과를 설립한 배후의 원동력이었다. (296쪽)
의문의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빈틈없는 범죄학자. (350쪽)
경찰관에게 수사에 관하여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유일한 인물. (350쪽)
그런 항목에 일치하는 사람은?
바로 미국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Frances Glessner Lee(1878~1962)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기까지,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나다.
평범한 삶을 살던 프랜시스, 어느덧 51세가 되었을 때이다.
51세가 된 프랜시스는 병에 걸려 고통을 받는다. 1929년 개인 치료 시설인 필립스 하우스에서 요양하게 되었는데, 이때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를 만나게 된다. 그 역시 필립스 하우스에 병으로 입원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프랜시스는 법의학이란 학문에 대하여 듣게 되고,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 장면을 복기해보자. 165~166쪽이다.
“나는 오래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이 모든 게 나와 함께 죽는 거에요.”
“그 자료들을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방법만 있다면 이걸 법의학과의 토대로 삼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 어디에도 그런 기관이 없으니까요. 교육과 연구, 훈련을 시행하는 완전한 학부가....”
“종이를 가져올 테니 간단히 얼개를 세워봐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간추린 것이다. 그런 대화가 끝난 후 프랜시스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그녀의 인생뿐만 아니라, 미국의 법의학이 바뀐 것이다.
그녀는 투쟁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그녀의 새로운 삶, 그녀는 미국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나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아, 그녀는 이런 평가도 받았다.
치열하고 유능한 투사였으며, 현실적인 이상주의자. (350쪽)
그녀가 만들기 원했던 세상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제도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긴 했으나 그녀가 시도한 법안은 표결에 이르지 못했다. (260쪽) 번번히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눅들지 않고 개혁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녀의 모습 살펴보자.
그녀는 실망감이나 패배감을 표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제도적 타성에 맞닥뜨렸다 해도 소극성과 체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요한 건 한 번에 한 걸음씩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260쪽)
그래서 그런 노력의 결과,
그녀는 변화를 만들어낸 인물이었고 개혁자, 교육자, 법의학의 수호자였다. (371쪽)
그녀 스스로 말하길.
어려움중 가장 큰 것은 내가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학위가 없으며, ‘할 일 없는 부유한 여성’이라는 범주에 있었다는 점이다. (334쪽)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법의학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 더더욱 노력했던 그 녀의 노력이 이 책에 잘 그려지고 있다.
다시, 이 책은? - TV 시리즈 <도망자>
이 책에는 비단 프랜시스의 이야기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중 법의학의 힘을 빌려 해결된 사건들이 몇 가지 소개되고 있는데, 그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라마 <도망자> 시리즈가 있다.
이 드라마 (혹은 영화)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부인이 죽은 상태에서 그 남편 역시 경상을 입고 발견된 사건에서, 그 남편되는 신경외과 전문의 새뮤얼 셰퍼드 박사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다. 결국 셰퍼드는 혐의를 벗어나긴 했는데, 재심을 거쳐 겨우 무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읽으면서 법의학의 역할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은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Frances Glessner Lee)의 일대기이면서, 미국 법의학의 발전 과정을 다룬 책이기도 하다. 법의학은 범죄자의 죄를 밝히는 한편으로 무고한 자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역할도 하기에, 그만큼 중요한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런 법의학을 정립하는데 한 여성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점, 기록으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