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1학기 때 사회교과목에서 한국역사를 공부하면서 딸아이는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초등4학년 무렵부터 한국사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고 역사체험학습을 다니기는 했지만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는가 보다. 그러나 6학년이 되어 막상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니 그동안 배웠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고 단순한 암기에서 벗어나 역사적 현상들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함께 공부하면서 느낀 건데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아이들이 가장 강한 시기는 고대사나 삼국의 역사이고 가장 취약한 부분은 근현대사라고 생각된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학교 교육 탓이다. 학기 말 시험 범위에서 근현대사 부분을 급하게 나가다 보니 시험 문제에서 제외되거나 혹은 간단히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게 사실이다. 가장 근접한 역사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거꾸로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한다. 나 역시 역사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기에 아이들 책을 함께 보면서 많이 배운다. 마주보는 한국사 교실의 7편은 1800년부터 1920년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가장 격동하는 한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자발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수동적인 개혁이 이루어지고 주권침탈이라는 치욕스러운 일도 겪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우리 사회에 어떻게 변하는가를 제대로 알고 주체성을 찾고자 하는 민중의 움직임을 제대로 알아야 더 큰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시기적으로 보아 많은 민중의 항쟁이 많았고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독립운동이 많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그런 내용을 다양한 지도 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어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 이앙선이 출몰하면서 우리는 신미양요나 병인양요와 같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외규장각의 주요한 문서와 문화재를 약탈당하게 된다. 이 뿐만 아이나 19세기 불같이 일어났던 농민운동의 과정도 지도 자료로 만나 볼 수 있다. 다양한 지도 자료와 낯선 고종의 사진,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접하면서 좀더 생생한 역사공부를 한 느낌이 든다. 아직까지도 근대사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부분을 놓치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싸웠는지 일제와 서구 열강에 의한 침략의 과정이 어땠는지 좀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며칠전 5년 상환이라는 이상한 방식방식을 거치기는 했지만 근 140년 만에 한국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외규장각 약탈 문화재를 맞이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 것이면서도 빌려오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도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하는 서러움을 잊지 말아야 함을 역사 속에서 다시 깨우쳐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이 시기를 공부할 때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은 연속선상에 있는 오늘날의 역사이다.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어른들 역시 많은 공부와 관심이 필요함을 새삼 느껴본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말에 계속 공감을 했다. 청소년들을 향해 '불편한 진실과 만나기를 두려워 말기'를 당부하고 자신의 삶의 주체로 서기를 바라는 마음에 공감했다. 평소에 작품을 읽으면서 간혹 이런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청소년과 아동의 모호한 경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소년이 된 아이들에게 갑자기 감수성과 이성이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간혹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작품을 보면서 아이들에 대한 배려라기 보다는 오히려 생각의 폭을 한정짓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미화되지 않은 현실이 충격을 주더라도 실존하는 또 다른 삶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은 분명 넓어질 테니 말이다. 혈연적 결합이 가족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임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는데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결합이 빈번해지는 요즘 우리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아원에서 4년 위탁가정에서 3년을 살아도 친아버지의 친권포기각서가 없기에 지금 살고 있는 가족구성원으로 모호한 위치에 있는 소년 연수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연수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현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신의 부재에 대한 혼란을 안고 있었다. 원망만이 남았던 연수가 친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을 대면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해는 용서라는 것과는 다른 말일 수도 있다.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으나 자신을 버렸다는 잘못된 진실에 대한 해답은 찾았으니 그동안 부재한 자신에 대한 존재감은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아들에 대한 분신처럼 여기는 나무새를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세월이 준 상처와 마음의 한을 연수도 알 수 있었으리라. 세상에는 결과만으로 단정짓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수많은 사연이 있는 일들이 많다. 우리가 만난 불편한 진실 역시 그러한 사연으로 둘러싸여있다. 아이들에게 단정지어진 현실보다는 더 많은 현실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도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함이다. 이 작품을 대하면서 아이들은 또 다른 현실에 처한 친구를 만나면서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 경험하지 못한 아픔을 맛볼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정 속에서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눈물도 많이 흘렀지만 과감히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면서 연수를 만나게 해준 작가의 용기에 감사한다.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참, 작품에 비해 표지 디자인이 무척 아쉬운 책이었다. 특히 노란 색상이 외로움보다는 약간 거슬리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사회가 변화하는 만큼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바로 용어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없던 말인데 새롭게 생기는 말이 적지 않다. 그런 말들을 알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무딘 사람들은 나와 깊은 상관이 없다 싶으면 그냥 지나치기에 익숙하지 않은 말들도 많다. 구지 요즘 용어가 아니더라도 정치나 경제, 사회 ,역사와 관련된 용어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늘 헤매기 일수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딸 아이의 국어 교과서를 보니 만만치가 않다. 문학작품이나 수필이 주를 이루던 과거의 국어교과서와는 달리 다양한 지문이 실려있었다. 다방면에서 이해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정교과서에서 검인정교과서로 바뀌면서 국어교과서만 근 90여권에 달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는데 이러한 지문이 저마다의 교과서에 실렸다면 이제 해석과 이해를 요구하는 어휘를 익히는게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런 문제를 알고 있기에 이 책을 더욱 유심히 읽었던 것 같다. 어휘를 익힌다는 것이 쉽지 않고 조금은 딱딱하리라 생각했는데 이 책은 읽는 내내 지루함 없이 흥미롭게 읽었다. 책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을 법한 저자가 지식을 총동원해서 달변을 하는 느낌이다. 한 어휘를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어휘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는 형식도 마음에 든다. 의문이라는 것이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지듯이 어휘도 하나를 알면 하나를 더 알 수 있는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 같다. 십대를 위한 어휘교과서라지만 나처럼 시사용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은 후 중학생 딸아이에게 추천해 주어야겠다.
[열두 살 소녀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 프로젝트] 아빠를 고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이라고 하지만 요즘은 그런 말들이 모두 무색하다. 생물학적인 관계의 가족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의 가족이 탄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늘 고통이 뒤따른다. 가족의 탄생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아빠는 자신이 고르겠다고 다부지게 말하는 열두 살 소녀 은지는 이혼가정의 소녀이다. 이혼 가정이 많지 않았던 때에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기죽어 지내기 쉬웠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변했다. 당사자도 그렇고 주위에서 받아들이는 시선도 그렇다. 늘 힘없이 지내기보다는 자기 주장도 강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더 나은 가정의 결합을 위해 요모조모로 머리를 굴리기까지 하는 은지는 결코 나약한 아이가 아니다. 그렇지만 역시 가정의 해체와 결합의 과정은 아이들에게 늘 상처로 남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은지가 엄마에게 더 나은 아빠를 연결해 주기 위해서 바바리 코트가 어울리며 어우대 좋은 준구의 아빠보다는 뚱뚱하고 볼품없지만 엄마를 더 위해줄 것만 같은 창민의 아빠를 선택한다. 왜? 더 이상 엄마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보다. 엄마는 모두 친구로 남기로 하면서 다른 사랑을 또다시 꿈꾼다. 사랑은 별할 수 없다는 은지의 생각과는 달리 엄마도 언니도 사랑은 변할 수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다면서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대부분 부모는 자식의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은연중의 상식에서 벗어나 은지의 엄마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과 인생에 대해서 은지에게 이야기한다. 그 모습에서 엄마를 이해해야 하는 또 다른 제시를 받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모두 생각하는 삶이 다르기는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가족이라도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것 같다.
[뒤늦게라도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여 다행이네] "전래 동화는 수천 년에 걸처 조상들이 말하고 듣고 생각한 흙의 철학이고, 흙의 시고, 거룩한 꽃이다" -박영만 전래 동화는 말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이기에 비슷하지만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한나라에서 지역마다의 이야기 차이는 그런가보다 싶지만 나라마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비슷한 경우는 정말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달라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전래동화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 사파리의 방방곡곡 시리즈는 박영만 선생님이 수집한 [조선전래동화집]을 원작으로 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전래동화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탄압받았다는 것과 박영만 선생님 같은 분이 있어서 이런 동화집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알 수 있어서 늘 고마움을 갖고 대하는 시리즈이다. [밥 안 먹는 색시]는 옹고집이나 놀부보다 더 욕심많은 구두쇠 영감의 이야기이다. 색시가 밥먹는 것이 아까워 예순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않았다니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다. 구두쇠 영감이 부리는 하인들은 얼마나 고생할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밥 안먹는 색시가 있다는 말도 안되는 헛소문을 믿고 색시를 들이는 것만 봐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영감이다. 색시를 맞이하고는 계속 밥을 몰래 먹지는 않는지 의심을 늦추지 않고 하인을 시켜 색시를 감시하도록 한다. 그러나 하인들은 색시의 편을 들어 거짓말만 하고 영감을 골탕먹이기까지 한다. 사람이 어찌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자신의 말도 안되는 아집을 혼줄이 난 후에야 깨닫고 색시에게 맛난 것을 사들고 가는 마지막 장면이 통쾌하고 우습기까지 한다. 당연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가끔 인색한 아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결국 자신의 아집으로 주변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혼줄날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하는 옛이야기가 아닐까? 여하튼 그동안은 구두쇠로 말도 않되게 살았지만 예순이 넘어서라도 철들고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였으니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