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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진찰실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알토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저자 나쓰카와 소스케와는 상당히 구면이다. 그의 전 작인 신의 카르테를 0권부터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4권을 남겨두고 있으니 말이다. 신의 카르테에도 구리하라라는 이름의 의사가 등장한다. 나쓰카와 소스케가 현직 의사이기에 유독 병원의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인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고 보면, 나쓰카와 소스케 말고도 현직 의사로 문학을 하는 작가는 치넨 미키토 그리고 한국의 남궁인이 있다. 그 밖에도 내가 모르는 현직 전문가가 쓴 병원 이야기가 있을 거 같긴 하지만, 유독 이 두 작가가 눈에 띄는 이유는 소위 전문가라고 아는 척을 난발하며 각종 어려운 의학용어를 줄줄 읊어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필요한 용어만 등장하기 때문에,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동네병원으로 알려진 하라다 병원은 의사가 4명인 작은 병원이다. 스피노자의 진찰실의 주인공이자 30대 중반의 소화기 내과의인 마치 데쓰로를 중심으로 환자들과 의료진들과의 이야기가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는, 중학교 1학년생인 미야마 류노스케와 둘이 살고 있다. 류노스케는 데쓰로의 여동생인 미야마 나나의 아들인데, 여동생이 갑작스러운 암으로 사망하면서 데쓰로와 살게 되었다.(류노스케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라쿠토 대학 의국에서 내시경 쪽에서는 일인자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였던 데쓰로는 그 일로 라쿠토대학을 그만두고, 하라다 병원으로 옮겼다. 의국에서는 여러 가지로 조카를 키울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도 없는 데쓰로가 류노스케를 키우는 데는 분명 병원 사람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대놓고 서술되지는 않지만, 데쓰로가 당직이거나 늦어지게 되면 누군가는 류노스케의 식사를 챙기고 같이 게임을 하기도 한다. 외과의인 주조 아야와 병원장이나 외과의 나베시마 오사무, 내과의 아키시카 준노스케까지 4명의 의사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병원을 이끌어간다. (전작인 신의 카르테의 주된 배경은 혼조 병원이라는 24시간 응급실을 돌리는 종합병원이었는데, 정말 정신없이 바쁜 병원에 비교해서 하라다 병원은 여유가 있긴 하다.)

책을 읽으며 데쓰로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의대 증원과 전공의 파업, 그로 인한 문제들로 많은 이슈들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의학을 비롯한 각종 장비들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점차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에 비해 하라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 상당수는 노인이다. 그것도 8~90대 노인들이 많다. 그들은 어찌 보면,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수술이나 치료를 통해 획기적으로 소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보자면, 유능한 의사인 데쓰로가 하라다 병원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리쿠도 대학의 5년 차 내과의인 미나미 마쓰리는 그런 데쓰로를 보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져간다. 비효율적이고, 비능률적으로 보였던 데쓰로의 의사로서의 가치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세균성 폐렴을 앓는 90세의 아노 기쿠에나 알콜성 간경변증을 앓지만 가진 돈이 없어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상황에서의 치료만을 주장하는 쓰지 신지로의 경우 데쓰로의 가치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환자들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제목이 궁금했는데, 데쓰로가 의국 시절에 책상 위에는 의학 서적이 아닌 스피노자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의 책이 빼곡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철학자는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진찰실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제목이다.
앞의 신의 카르테가 시리즈로 나와서 그런지, 스피노자의 진찰실도 그랬으면 좋겠다. 데쓰로가 변하게 된 계기가 된 여동생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