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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리루이 지음, 김택규 옮김 / 시작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백사(蛇)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안 숲 속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선택을 만류했다. "뭣 하러 힘든 인간 세상에 가려고 해.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지 못할거야. 인간이 되는 게 뭐 좋을 게 있다고." 하지만 인간이 되고 싶었던 그녀의 욕망은 이미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도록 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사는 아미산 가장 깊은 곳 '백운동'이라는 동굴로 들어가 3000년이라는 시간을 명상에 들어간다. 처음 천 년은 인간의 육체와 꽃 같은 미모를 얻기 위한 시간이었고, 다음 천 년은 인간의 머리와 치혜를 얻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천 년은 인간의 마음을 얻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것이 가장 어려웠고 동시에 성패를 가르는 관문이었다.
2999번째 해가 되던 어느날, 동굴 속에서 지내던 백사는 난데없는 비명 소리를 듣는다. "살려달라"는 처절한 부르짖음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그녀만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단 1년만 버티면 인간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그 울부짖음을 듣는 순간 백사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뛰쳐나가 할머니의 목숨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순간 할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더니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너는 인간이 될 자격이 없다. 나는 방금 너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이다. 너는 끝내 인간이 가져야 할 잔인함을 갖추지 못했구나. 이제 너는 영원히 뱀도, 사람도 아니니 요괴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백사는 그렇게 완전한 인간도, 완전한 뱀도 아닌 반인반사 요괴가 되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백소정. 백소정이 그녀가 인간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채 가지지 못한 인간의 잔임함 때문에 또 한번 아파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남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허선. 백소정과 허선의 운명은 인간도 뱀도 아닌 요괴가 된 그녀가 동굴에서 뛰쳐나온 2999년 째 되던 해 결정되었다. 그들이 안타까운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도, 이 소설의 제목이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인 이유도 다 그녀가 가지지 못한 단 하나의 인간의 마음 '잔인함' 때문이었다.
누가 그녀의 마음속에 인간 세상의 등불을, 남녀 간 사랑의 등불을 켰을까?
그 등불이 켜지면 영원히 취소할 수도, 앗아갈 수도 없는 한 가지 약속이 삶에 생긴다. 영원히 길을 잃어 고향인 반도원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_ 228쪽 중에서
"하늘에는 천당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소주와 항주는 상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물과 함께하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 중 하나다. 두 도시중에서도 항주는 서호라는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는데, 말이 호수지 하루에 둘러보기도 힘들만큼 어마어마한 넓이의 호수다. 서호에는 뇌봉탑이라는 높은 탑이 있는데, 그 탑에는 아프고도 슬픈 전설이 담겨있다. 앞서 이야기 한 백소정의 이야기.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의 모티프가 바로 그 전설이다.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는 중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인 <백사전>을 소재로 새롭게 써내려간 소설이다. 인간이 되고 싶었으나 요괴가 되어 인간의 세상에서 살아가다 요괴를 쫓는 법사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뇌봉탑 안에 갇혀 영원히 봉인된다는 내용의 전설이다. 현대 작가 리루이는 중국 4대 설화 중 하나로 꼽힌다는 이 전설을 현대의 언어로 새롭게 각색해 다시 한번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백소정은 동생 청아와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와 허선이라는 남자를 만나 분해아라는 아이를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유난히 뱀이 많이 출몰했던 항주에서 그녀는 자신의 피로 독사에 물린 동네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요괴를 쫓던 법사는 허선을 찾아 백소정의 실체를 밝힌다. 처음에는 그녀가 요괴였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던 허선이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마음과 정성, 사랑에 그녀의 허물을 덮고 자신이 지켜주기로 한다. 하지만 그 비밀을 오래가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밝혀지고 만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포위한 마지막 날, 백소정은 허선에게 아들 분해아를 부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법사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영원히 뇌봉탑 아래에 봉인되고야 만다.
이야기는 분해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며(아들 역시 뱀의 피를 물려 받아 뱀의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버지인 허선에게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동안 숨겨뒀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이 소설의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 모든 비밀을 듣고 난 분해아는 오히려 가뿐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한다.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광대패를 따라다니면 뱀 흉내를 내며 살아가게 된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을 사랑했고, 거절할 수 없는 삶을 증오한다."는 그의 말대로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남은 생을 보내게 된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은 떨어진 것 같아"는 분해아가 사랑한 향류냥이 분해아를 만날 때마다 했던 말이다. 향류냥의 입을 빌어 한 말이지만 결국 백소정의 남기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3천 년을 기다려 찾을 만큼 그녀에게는 너무나 간절했던 인간 세상. 그리고 인간 세상에 온 그날 만나 목숨을 걸만큼 사랑했던 남자 허선. 그녀는 결국 사랑하는 마음 뿐, 잔인한 마음은 가질 수 없어 스스로 인간 세상에서 죽음을 택했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한 하루를 살고 떠날 수 있어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