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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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그가 읽었던 책들이 궁금하고, 그가 즐겨듣는 음악이 궁금하고,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이전의 사랑이 궁금하다. 아주 우연히 옛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 궁금증은 마치 풍선을 불 때 어느 한 순간을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작은 숨에도 엄청나게 커지듯 한 순간의 촉발은 궁금증을 겉잡을 수 없을만큼 크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래도 귀여운 수준이다. 그래, 얘도 한 때는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다 속삭였구나. 미래를 약속했겠구나. 나보다 멋진 여자였을까? 등등. 그러다 그 질투는 의심으로 바뀐다. '혹시 지금 나한테 한 선물 예전에 그 여자한테도 했던거 아니야?','그 여자한테 했던 똑같은 말로 사랑을 속삭이는게 아닐까?','혹시 아직도 잊지 못하는거 아닐까?'... 여기서부터가 위험하다. 그 의심이 광적인 집착으로까지 진행되면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 지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질투하고 사랑하기는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 질투의 끝장을 보여주는 한 남자가 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책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서른여덟 살의 그레이엄은  런던 대학의 교수다. 아내 바버라를 좋아하고, 딸  앨리스를 사랑하며 15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너무나 모범적이고 평범했던 15년의 생활은 자아를 구속하는 상실의 시대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친구인 소설가 잭의 소개로 전직 여배우 출신인 앤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레이엄은 그 순간을 '마치 오래 끊긴 어떤 통신선이 20년 전의 자아에 갑자기 연결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표현한다.

결국 그는 무단 외박을  하고 다음날 집에 들어가 자신의 물건을 챙겨 이별을 고하고 앤의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그 둘은 결혼을 하게 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앤은 그레이엄에 비해 젊고 아름다웠고, 너무나 멋진 여성이었다. 그레이엄은 그 지점 때문에 2년이 지나도록 안심(?)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2년이 지난 어느날에서야 두려움과 불신이 잦아들고 그는 비로서 앤과 결혼을 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예측할 수 없는 거야. 내말이 그거야.
질투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질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지.
_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60쪽

 
   

 

그러다 문제가 터졌다. 전처인 바버라가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앤이 출연했던 영화를 딸 앨리스와 함께 보게 한 것이다. 아내의 정사 장면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나오고 그것을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순간을 겪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 그레이엄은 아내에게 장난삼아 영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그 영화 속 배우와 정사가 있었음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그레이엄은 현실과 상상의 간극을 잊어버리게 된다.

처음에는 앤과 함께하지 못한 15년의 시간이 안타까웠고 아쉬웠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나 함께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금세 질투로 바뀌었다. 그녀가 출현했던 모든 영화를 찾아 보며 영화 속 남자 배우들과 그녀의 관계를 의심했고, 그녀의 서재에 꽂혀있던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다른 남성들이 그녀에게 바쳤던 글들을 찾아 읽었다. 함께 여행 계획을 짜는 순간에도 그녀의 지도에서, 여행 책에서, 노트에서 그는 나를 만나기 전 그녀의 남자들을 자꾸만 찾게 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묘미는 거기에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어디까지 질투할 수 있는가를 그레이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아가 같은 영화를 세 번씩 보고, 상대 역을 했던 배우들과 앤과의 정사 장면을 상상하고, 한 달 얻은 휴가 기간 동안 집안 곳곳 그녀의 물건에 남아있을 옛 남자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한 인간의 질투에 대한 끝장을 보여주는 거다. 때로는 엄청나게 웃기고, 때로는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부끄럽고, 때로는 상대방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하나의 물건을 통해 망상을 펼치는 그레이엄의 모습은 귀엽고 유쾌하기도 하면서, 이 소설의 결말을 생각했을 때는 섬뜩해지기도 한다. 그의 상상이, 그의 의심이(과거를 의심한다는 말은 좀 안 맞는 감이 있긴 하지만) 사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떠나, 이 소설이 보여준 한 사람에 대한 불안감이 질투로 번져 서로를 지치게 하는 과정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적당한 질투는 사랑의 활력소가 되지만 지나친 질투는 사랑을 힘들게만 할 뿐이다.

D선배는 그랬다. 자기는 그 여자가 과거에 만났던 사람이, 사랑이 궁금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고. 선배 변태죠. 라고 말하는 내게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 준 사람들이니깐 고맙지. 지금 이 모습을 내가 사랑하게 된 거니깐. 그 안에 녹아 있는 모든 경험들을 나는 좋아해' 라는 아주 성인 군자같은 말을 남겼다. 이 소설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난 사랑 없는 질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과거의 사랑까지 인정하기엔 여전히 나의 그릇은 작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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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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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_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93쪽 중에서

키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으로 온 네티즌의 질타를 받았던 한 방송이 보여주듯이 사랑에 있어서도 '외모'는 참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만해도 내 남자친구가 못생겼다면, 그 남자와 함께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걷는 다는건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싫다. 그래도 여자는 덜하다고 생각한다. 한 케이블 방송의 '남녀탐구생활, 소개팅편'에서 보여주듯이 소개팅 녀에 대한 남자의 관심은 오로지 '예쁘냐?' 뿐이다. 예쁘지 않으면 사랑도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만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사랑에 외모가 전부가 아님을 난 주변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너무나 상반되는 외모를 가진 커플들, 쟨 분명 눈에 콩커풀이 백만겹쯤은 씌어져 있는 걸꺼야라고 느껴질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연인들. 그들 사이에는 분명 외모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기? 분명 빛나는 외모도 아니고, 나의 이상형도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을 풍기며 자꾸만 내 눈길을 빼앗아 가는 사람. 말을 건네고 싶고, 그 사람의 주말이 궁금하고, 그 사람의 세계가 궁금한. 세상 사람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가버린 사람. 사랑은 그렇게 예측할 수도 없고, 이해 불가능한 상태에서 찾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여기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못생긴 외모에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언제나 혼자 외톨이로 살아온 여자가 있다. 고등학교 때 유일한 친구였던 뚱뚱이 친구는 어느날 살을 빼고 나타나 이제 자기는 너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임을 선은 긋고, 최우수 성적에 학교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서는 외모가 안된다는 이유로 줄줄이 낙방을 하고 겨우겨우 근처 백화점에 취직을 하게 된다. 백화점에서도 그녀는 늘 혼자였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으며 궂은 일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짐을 들어주며 말을 건넨다. '저랑 친구하지 않을래요?'

누군가에게 친절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그녀와, 이상하게도 자꾸만 자신의 눈길을 끄는 그녀에게 다가가고픈 그는 그렇게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의 친구 요한까지 함께 셋은 퇴근후면 '켄터키 치킨'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그 맞은편 호프집 간판에 영문으로 쓰여있는 'hope'를 바라보며 희망이 가까이 있음을 즐거워했다. 붐비는 인파가 싫다는 그녀를 위해 11월의 첫 데이트를 하는 어느날 고궁을 거닐었고, 각자의 사정으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수 없게 되자 자신들만의 크리스마스 날을 만들어 고요하고 거룩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자신의 삶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미인도 불 꺼진 전구와 같은 거지. 불을 밝힌 평범한 여자보다도 추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거야.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_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86쪽

박민규는 이 소설을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난 그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르고 평생을 살아온 한 여자에게 당신은 충분히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준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답다. 대부분의 인간은 빛을 잃은 전구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만나면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혀줘 세상이 밝아지게 되는 거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불이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인거다. 불을 밝힐 수 있는 건 자신임을 미처 모르고 있다. 배우들이 아름다운 건 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기 때문에 그 빛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다른 사람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는거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다른 사람들만을 부러워 한채 말이다.

그는 그녀에게 불을 밝혀주었다. 숨어버린 그녀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었고, 어둠 속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밝은 세상의 기쁨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현실이 아닌 '상상'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시한 그 사람을, 아니 곧 시시해질 한 사람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다. 그리고 서로의 그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거다. 서로가 노력하면서.

누군가가 이 책의 마지막은 반전이라고 했던 글을 본 적이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반전이라는 생각보다는 너무나 완전한 앞뒤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음을 할 수 있어 이 소설이 더욱 빛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지배했다. 곳곳에 박혀 있는 보석같은 글귀들과 사랑의 단상들이 추운 겨울 밤을 따듯하게 뎁혀주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박민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게 아닐까? 우리 모두는 세상의 시녀도 아니고 들러리도 아니다.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두가 왕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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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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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화 <배틀 로얄>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놀랐던 적이 있다. 같은 반 학생을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 최후의 1인이 남는 날 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 게임. 그로인해 하나하나씩 변해가는 친구들. 그 아이러니한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친구를 죽이는 것 밖에 없는 방법이 없는 아이들. 너무나 끔찍한 상황이었다. 

'헝거 게임' 역시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게임이다. 해마다 12개 구역에서 각기 두 명씩의 십대 소년 소녀를 추첨으로 뽑아 거대한 아레나(밀림이나 사막, 숲, 빙하지대 등 그 환경은 해마다 다르다)에 가둔 후,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잔인한 유희다. 이 게임은 지배층의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수단이자 수도 시민들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고, 유한계급은 자기가 찍은 승자(최후의 생존자)에게 앞 다투어 돈을 베팅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날. 전쟁과 각종 재난으로 북미 대륙의 나라들은 전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국가 판엠(PANEM)이 건설된다. 판엠의 중심부에는 캐피톨(CAPITOL)이라는 이름의 수도가 있고, 모든 부와 기술력은 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캐피톨 주변은 12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수도 시민들과 생활수준의 차이가 극심하다. 가난과 불평등을 견디다 못한 주변 구역 거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지배층은 이들을 철저히 짓밟고 더욱 심한 공포정치를 펼친다. 그리고 다시 반란을 꿈꾸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드는데, 그 중 하나가 ‘헝거 게임’이었던 것이다.  

쉽게 읽히는 빠른 전개와 끔찍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생생한 심리묘사로 손에 책을 잡는 순간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었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책이라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간만에 읽는 숨막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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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괴짜경제학 - 세상의 이면을 파헤치는 괴짜 천재의 실전경제학
스티븐 레빗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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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 벌어진다

지금 미국의 온라인 세계를 한 권의 책이 핫(hot)하게 달구고 있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라고 불리는 이 온라인 논쟁은 4년 전 <괴짜경제학>으로 '괴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스티븐 레빗과 스티븐 더브너의 후속작인 <슈퍼괴짜경제학>에서 시작되었다. 출간 일주일만에 수믾은 논란과 비판을 일으키며 세계 지성인을 컴퓨터 앞으로 불러모와 논쟁에 참여하게 한 이 책은  관련된 글만 153만건, 블로그 포스팅은 20만 6000건에 달했다(구글에서 '슈퍼괴짜경제학'으로 검색한 건에 대한 집계이며 한국경제신문의 통계를 인용하였다).  

이 논쟁이 더욱 화제가 되며 연일 언론매체에서 보도되었던 건 일반 블로거 뿐만 아니라 전문가 집단과 지성계 집단이 이 배틀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8년 노벨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 등 세계 최정상급 경제학자들이 대거 이 논쟁에 참여했다. 또한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AP통신 등 각각의 언론매체들은 저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통계자료와 갖가지 수치들로 이 거대한 논쟁에 참여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과 학자, 전문가들이 자신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통해 마치 일반 블로거들처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또 한번의 '괴짜 신드롬', 일어날 것인가

우리의 경제학적 접근법은 세상을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나 꺼리는 모습으로, 또는 간절히 원하는 모습으로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고치거나 변화시키길 원한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_ <슈퍼괴짜경제학>, 36쪽 중에서

<괴짜경제학>이 출간되었을 때도 스티븐 레빗, 스티븐 더브너 콤비는 경제학의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했었다. '마약 판매상은 왜 부모와 함께 사는 걸까?','낙태의 합법화가 범죄율을 줄였을까?', '총보다 집 안의 수영장이 더 위험한 이유는?' 등 경제학과 동떨어진 분야의 이야기를 경제학자의 눈으로 명쾌하게 풀어내며 단순히 경제학의 논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사회경제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소재 하나하나가 우리의 상식과 통념을 깨는 것들이었으며,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센티브'라는 원리로 그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이번 책 <슈퍼괴짜경제학>은 말 그대로 'SUPER'스러워진 주제들과 논리로 돌아왔다. 다루는 소재들도 전작보다 스케일이 커졌다. 전 인류의 난제라 꼽힐만한 매춘, 테러리즘, 지구온나화 등이다. 사회학자도, 수학자도, 인류학자와 과학자도 풀어내지 못한 이 거대한 문제에 이 두 괴짜 경제학자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책이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도 바로 그들이 건드린 문제가 너무나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간단하게 설명해낼 수 없는 부분을, 이 두 괴짜천재는 경제학자의 눈으로 너무나 명쾌하게 풀어냈기에 학자들의 화를 돋운 것이다.

앞서 말한 키보드 배틀이 일어난 부분은 이 책의 5장인 지구온난화를 다룬 부분이었는데, 저자들은 지구온난화가 아닌 '지구 냉각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의 최고의 악당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AP통신은 통계학자들에게 의뢰해 최근 130년 간의 지구 온도를 추적해 저자들의 의견에 반박했고, 환경전문가인 켄 칼데이라는 '이산화탄소야말로 진짜 악당'이라고 받아쳤다.

 그 주장이 옳고 그르든 책에서 주장하는 저자들의 주장과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주장이 모두 논리와 근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5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뽑아든 제2의 칼자루는 '외부효과'이다. 전작에서 '인센티브'로만 모든 것을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외부효과'라는 제 2의 칼자루를 뽑아 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풀어나가는 그 논리는 마치 인디애나 존스가 모험을 떠나 하나하나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주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전작보다 풍성! 경제학을 뛰어 넘어 사회경제학으로 

<괴짜경제학>의 표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과인지 오렌지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그려져 있다. 겉은 사과의 모양과 색인데, 안은 오렌지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것, 그리고 우리가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깨자는 책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이미지였다. 이번 <슈퍼괴짜경제학>에서는 그 알 수 없는 사과-오렌지가 '빵'하고 터졌다. 그 안의 오렌지 물빛을 물들이고 사과의 파편을 날리며 마치 총에 맞은 듯 터져버렸다. 전작보다 더 강력한 주제들과 탄탄한 논리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이미지였을거다.

이번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사회경제학에 가깝다. 19세기 중반 빈의 종합병원에서 발생하는 높은 산모의 사망 원인을 밝혀나가는 것(범인은 다름아닌 의사였다. 인세티브-외부효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등장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경제학의 기본 명제를 뒤집는 인간의 기부 행위를 '독재자 게임'이라는 실험을 통해 박애주의를 설명하는 것, 구타 당하는 인도 여성을 해방시킨 것은 지참금도 성별 낙태법 금지도 아닌 텔레비전이었다는 주장 등 흥미로운 소재들을 통해 거시적으로 세상을 일어낼 수 있는 눈을 보여준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미국식 경제교양서의 방식에 피로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미국 지성계를 발칵 뒤집을 만큼 센세이셔널한 주장은 담고 있는 책이다. 그들이 펼치는 논리는 역시 만만찮다. 전작보다 짜임새도 좋아졌으며 읽는 재미도 더해졌다. 인세티브와 외부효과로 문제 하나하나가 풀려나갈 때면 통쾌함과 짜릿함마저 느껴진다.  '경제학'이라는 이름이 갑갑하게 느껴질 만큼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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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민은행 이야기 - 착한 자본주의를 실현하다
데이비드 본스타인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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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결국 부는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꾸준하고 냉정하게 가난한 사람에게서 부자에게 흘러간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마을. 어떤 남자가 인력거를 끌면서 하루에 지불해야 하는 인력거의 임대료는 8타카(약 0.2달러). 1년이면 약 2,500타카를 내는 셈이다. 그런데2,500타카면 인력거 한 대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날마다 인력거 주인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겨우 먹고살 정도의 돈만 손에 쥐는 그에게는 한번에 그만큼의 돈을 지불할 능력도, 은행에서 그 돈을 대출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인력거 주인의 착취 속에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간다.

여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로 수공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녀들이 재료를 사서 마음 놓고 일하기 위해 맨 처음 필요한 돈은 856타카(약 27달러). 하지만 그 자본금이 없는 그녀들은 장사꾼들의 횡포와 자본가들의 착취로 하루에 고작 2센트 정도만을 벌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다른 자본가들의 배만 불려줄 뿐 자신들에게 남는 건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객인 은행, 그라민은행 

   
 

가난한 사람들을 수혜자가 아니라 고객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자영업을 통해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수단을 제공한다.

_ <그라민은행 이야기>, 37쪽 중에서

 
   

 

세계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는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의 소액금융 사례가 등장한다. 돈을 빌려줌으로써 그들이 가난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 담보가 없이도 은행은 대출을 해주는가? 은행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꾸준히 들어오는 월급, 부동산, 부모님의 탄탄한 직업 혹은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다면 절대 불가다. 은행의 고객은 담보가 있는 부자들이다. 은행의 대출 역시 부자들이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있다. 지난 25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방글라데시의 땅 없는 농촌 사람들이 자영업을 할 수 있도록 79억 달러 이상을 빌려주었고, 2544개가 넘는 지점을 통해 780만 명이 넘는 고객에게 돈을 빌려준 곳. 고객 가운데 98%가 여성이고 대출금 상환율은 98퍼센트로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상환율과 비견할만한 은행. 바로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이다.

'그라민'은 벵골어로 '그람gram'에서 온 단어로 '마을'을 뜻한다. 그 이름 그대로 그라민은행은 농촌 마을에만 있다. 이 은행의 특징은 주로 여성들에게 소액으로 단기 대출을 한다는 것이다. 고객 대부분은 그 어디에서도 대출을 할 수 없는 빈곤층이다. 하지만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이들에게 돈을 값을 것이라 약속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라민은행이 주목한 지점은 바로 전통적 의미의 담보인 금전적 담보가 아닌 '신용'이라는 사회적 담보였다. 

그라민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그 여성은 5명의 채무자로 구성된 모임과 이런 모임 8개가 모여 40명의 채무자로 구성되는 센터에 무조건 가입해야하고 , 일주일에  한번씩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그 구성원의 한 사람이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그 구성원 전체가 앞으로 돈을 빌릴 수 없다. 때문에 자동적으로 상호 감시가 되며, 서로가 돈을 갚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농촌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서로간의 유대가 강하고 비밀이 없는 공간이라 서로를 관찰하는 데 유용했다. 또한 자그마한 마을에서는 서로간의 '신용'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 지점을 바로 '담보'라는 것으로 연결해 사람들이 약속을 지켜낼 수 있도록 끌어냈다.
 

사람들이 굶어 죽는데, 도대체 경제학이란 학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건 모두 동화에 지나지 않았어요. 모두 정말인 척하는 것들뿐이었죠.
스스로 환멸을 느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어요?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내가 하는 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_ <그라민은행 이야기>, 45쪽 중에서

 
   

이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자신의 고향 방글라데시로 돌아온 유누스는 치타공대학의 경제학과장으로 들어갔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던 그에게 1974년 방글라데시에 닥친 기근은 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기근이 닥치자 유통업자들은 쌀을 사재기 하기 시작했고 수만 명의 농촌 사람들은 굶어죽어갔다. 밖에서는 사람이 굶어 죽는데 치타공대학 건물 안에서는 평화롭게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의실 안에서는 사람들은 오직 상상하는 세상만 보고 있었다. 유누스는 세상에 필요한 경제학을 만들고 싶었다. 

시작은 대학 안에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만든 신용대출 프로그램에서였다. 재료를 살 돈이 없어,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소액대출로 그들의 삶의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는 시범 그라민은행의 설립, 나아가 그라민은행을 탄생하게 만들었고 3년 만에 500여 가구가 절대 빈곤에서 탈출하게 했으며 지금은 2천여개가 넘는 지점이 운영되고 있다.

무함마드 유누스의 이 성공적인 사례는 그 지역에 대한 이해와 빈곤층에 대한 철저한 연구, 그리고 학자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확신과 열정에 기반한다. 유누스는 그 지역과 지역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인터뷰 했으며,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얼만큼의 도움이 필요한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농촌'이라는 마을의 특성과 그 안에서 유대 관계에 포착했으며 작은 마을 안에서 '신용'이라는 것이 가지는 중요도도 알아냈다. 포드 재단과 크리스은행 임원을 직접 만나 끊임없이 설득했으며 자신을 담보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등 대범함과 열정을 보이기도 한다.

'착한 자본주의를 실현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그라민은행 이야기>는 그라민은행의 탄생과 그것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계 빈곤을 해결하는데 얼만큼의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준다. 유누스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낀 한 저널리스트가 방글라데시에 직접 찾아가 유누스를 비롯해 그가 만났던 사람들, 그라민은행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 그라민은행의 역사와 그 찬란한 업적을 추적했다. 낯선 영역의 이야기이지만 '세계 빈곤'과 '소액 금융'이라는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저널적 관점에서 그 사건이 사회적으로 가지는 가치과 의미를 짚어가며 잘 풀어냈다. '착한 자본주의'가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희생이 아닌 조그마한 도움으로 우리 사회가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이야기였다.

2006년 그라민은행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은 그라민은행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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