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그가 읽었던 책들이 궁금하고, 그가 즐겨듣는 음악이 궁금하고,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이전의 사랑이 궁금하다. 아주 우연히 옛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 궁금증은 마치 풍선을 불 때 어느 한 순간을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작은 숨에도 엄청나게 커지듯 한 순간의 촉발은 궁금증을 겉잡을 수 없을만큼 크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래도 귀여운 수준이다. 그래, 얘도 한 때는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다 속삭였구나. 미래를 약속했겠구나. 나보다 멋진 여자였을까? 등등. 그러다 그 질투는 의심으로 바뀐다. '혹시 지금 나한테 한 선물 예전에 그 여자한테도 했던거 아니야?','그 여자한테 했던 똑같은 말로 사랑을 속삭이는게 아닐까?','혹시 아직도 잊지 못하는거 아닐까?'... 여기서부터가 위험하다. 그 의심이 광적인 집착으로까지 진행되면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 지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질투하고 사랑하기는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 질투의 끝장을 보여주는 한 남자가 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책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서른여덟 살의 그레이엄은  런던 대학의 교수다. 아내 바버라를 좋아하고, 딸  앨리스를 사랑하며 15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너무나 모범적이고 평범했던 15년의 생활은 자아를 구속하는 상실의 시대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친구인 소설가 잭의 소개로 전직 여배우 출신인 앤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레이엄은 그 순간을 '마치 오래 끊긴 어떤 통신선이 20년 전의 자아에 갑자기 연결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표현한다.

결국 그는 무단 외박을  하고 다음날 집에 들어가 자신의 물건을 챙겨 이별을 고하고 앤의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그 둘은 결혼을 하게 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앤은 그레이엄에 비해 젊고 아름다웠고, 너무나 멋진 여성이었다. 그레이엄은 그 지점 때문에 2년이 지나도록 안심(?)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2년이 지난 어느날에서야 두려움과 불신이 잦아들고 그는 비로서 앤과 결혼을 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예측할 수 없는 거야. 내말이 그거야.
질투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질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지.
_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60쪽

 
   

 

그러다 문제가 터졌다. 전처인 바버라가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앤이 출연했던 영화를 딸 앨리스와 함께 보게 한 것이다. 아내의 정사 장면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나오고 그것을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순간을 겪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 그레이엄은 아내에게 장난삼아 영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그 영화 속 배우와 정사가 있었음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그레이엄은 현실과 상상의 간극을 잊어버리게 된다.

처음에는 앤과 함께하지 못한 15년의 시간이 안타까웠고 아쉬웠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나 함께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금세 질투로 바뀌었다. 그녀가 출현했던 모든 영화를 찾아 보며 영화 속 남자 배우들과 그녀의 관계를 의심했고, 그녀의 서재에 꽂혀있던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다른 남성들이 그녀에게 바쳤던 글들을 찾아 읽었다. 함께 여행 계획을 짜는 순간에도 그녀의 지도에서, 여행 책에서, 노트에서 그는 나를 만나기 전 그녀의 남자들을 자꾸만 찾게 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묘미는 거기에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어디까지 질투할 수 있는가를 그레이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아가 같은 영화를 세 번씩 보고, 상대 역을 했던 배우들과 앤과의 정사 장면을 상상하고, 한 달 얻은 휴가 기간 동안 집안 곳곳 그녀의 물건에 남아있을 옛 남자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한 인간의 질투에 대한 끝장을 보여주는 거다. 때로는 엄청나게 웃기고, 때로는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부끄럽고, 때로는 상대방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하나의 물건을 통해 망상을 펼치는 그레이엄의 모습은 귀엽고 유쾌하기도 하면서, 이 소설의 결말을 생각했을 때는 섬뜩해지기도 한다. 그의 상상이, 그의 의심이(과거를 의심한다는 말은 좀 안 맞는 감이 있긴 하지만) 사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떠나, 이 소설이 보여준 한 사람에 대한 불안감이 질투로 번져 서로를 지치게 하는 과정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적당한 질투는 사랑의 활력소가 되지만 지나친 질투는 사랑을 힘들게만 할 뿐이다.

D선배는 그랬다. 자기는 그 여자가 과거에 만났던 사람이, 사랑이 궁금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고. 선배 변태죠. 라고 말하는 내게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 준 사람들이니깐 고맙지. 지금 이 모습을 내가 사랑하게 된 거니깐. 그 안에 녹아 있는 모든 경험들을 나는 좋아해' 라는 아주 성인 군자같은 말을 남겼다. 이 소설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난 사랑 없는 질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과거의 사랑까지 인정하기엔 여전히 나의 그릇은 작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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