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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_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93쪽 중에서
키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으로 온 네티즌의 질타를 받았던 한 방송이 보여주듯이 사랑에 있어서도 '외모'는 참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만해도 내 남자친구가 못생겼다면, 그 남자와 함께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걷는 다는건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싫다. 그래도 여자는 덜하다고 생각한다. 한 케이블 방송의 '남녀탐구생활, 소개팅편'에서 보여주듯이 소개팅 녀에 대한 남자의 관심은 오로지 '예쁘냐?' 뿐이다. 예쁘지 않으면 사랑도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만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사랑에 외모가 전부가 아님을 난 주변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너무나 상반되는 외모를 가진 커플들, 쟨 분명 눈에 콩커풀이 백만겹쯤은 씌어져 있는 걸꺼야라고 느껴질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연인들. 그들 사이에는 분명 외모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기? 분명 빛나는 외모도 아니고, 나의 이상형도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을 풍기며 자꾸만 내 눈길을 빼앗아 가는 사람. 말을 건네고 싶고, 그 사람의 주말이 궁금하고, 그 사람의 세계가 궁금한. 세상 사람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가버린 사람. 사랑은 그렇게 예측할 수도 없고, 이해 불가능한 상태에서 찾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여기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못생긴 외모에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언제나 혼자 외톨이로 살아온 여자가 있다. 고등학교 때 유일한 친구였던 뚱뚱이 친구는 어느날 살을 빼고 나타나 이제 자기는 너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임을 선은 긋고, 최우수 성적에 학교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서는 외모가 안된다는 이유로 줄줄이 낙방을 하고 겨우겨우 근처 백화점에 취직을 하게 된다. 백화점에서도 그녀는 늘 혼자였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으며 궂은 일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짐을 들어주며 말을 건넨다. '저랑 친구하지 않을래요?'
누군가에게 친절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그녀와, 이상하게도 자꾸만 자신의 눈길을 끄는 그녀에게 다가가고픈 그는 그렇게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의 친구 요한까지 함께 셋은 퇴근후면 '켄터키 치킨'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그 맞은편 호프집 간판에 영문으로 쓰여있는 'hope'를 바라보며 희망이 가까이 있음을 즐거워했다. 붐비는 인파가 싫다는 그녀를 위해 11월의 첫 데이트를 하는 어느날 고궁을 거닐었고, 각자의 사정으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수 없게 되자 자신들만의 크리스마스 날을 만들어 고요하고 거룩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자신의 삶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미인도 불 꺼진 전구와 같은 거지. 불을 밝힌 평범한 여자보다도 추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거야.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_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86쪽
박민규는 이 소설을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난 그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르고 평생을 살아온 한 여자에게 당신은 충분히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준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답다. 대부분의 인간은 빛을 잃은 전구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만나면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혀줘 세상이 밝아지게 되는 거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불이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인거다. 불을 밝힐 수 있는 건 자신임을 미처 모르고 있다. 배우들이 아름다운 건 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기 때문에 그 빛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다른 사람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는거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다른 사람들만을 부러워 한채 말이다.
그는 그녀에게 불을 밝혀주었다. 숨어버린 그녀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었고, 어둠 속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밝은 세상의 기쁨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현실이 아닌 '상상'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시한 그 사람을, 아니 곧 시시해질 한 사람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다. 그리고 서로의 그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거다. 서로가 노력하면서.
누군가가 이 책의 마지막은 반전이라고 했던 글을 본 적이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반전이라는 생각보다는 너무나 완전한 앞뒤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음을 할 수 있어 이 소설이 더욱 빛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지배했다. 곳곳에 박혀 있는 보석같은 글귀들과 사랑의 단상들이 추운 겨울 밤을 따듯하게 뎁혀주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박민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게 아닐까? 우리 모두는 세상의 시녀도 아니고 들러리도 아니다.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두가 왕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