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낙관주의자 - 번영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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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0년 전 사람들보다 우리는 지금 더 행복한가?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불평한다. "예전보다 사는 환경은 더 나아졌는지 몰라도 삶은 팍팍해. 옛날이 더 행복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증명해주듯이 각국 정부들은 국민총생산 대신 국민총행복(GNH)이라는 수치를 만들어 그것을 극대화 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심지어 부탄은 이 국민총행복지수를 잣대로 삼아 정책을 심사한다). 영국 정부에는 '웰빙 부서'라는 것이 생겨났고, 리처드 이스털린은 경제성장과 행복은 꼭 연결되는 것이 아니며 잘 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다는 주장까지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행복하기는커녕 더욱 불행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최근 점점 높아져가는 우울증 환자의 수나 주변에서 심심지 않게 만나게 되는 자살을 마주할 때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생활 수준과 소비 수준은 불과 1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자, 그럼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정말 10년 전,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생활할 자신이 있는가? 더 쉽게 말해 휴대폰이 없는 세상, 컴퓨터가 없는 세상, 자동차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 생활 할 자신이 있는가 말인가. 


2. 사실상 세상은 모든 면에서 나아지고 있다.

 

건방진 말이지만 매트 리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잘살면서 불행한 것은 못살면서 불행한 것보다 분명이 낫다(<이성적 낙관주의자> 52쪽 중에서)". 1974년 이스털린이 부유한 국민들이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는 주장한 이후  '이스털린의 역설'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요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행복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유해질수록 더 행복해 진다"는 것이었다.

 

쉽게 하루 세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만 생각해보자. 수백년 전 자급자족 사회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이 하루 세끼를 위해 하루종일을 준비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니 수백년 까지 갈 것도 없이 2,30년 전만 생각해보자. 돈 벌고 모으기도 급급해 외식은 자주 할 수 없었을 뿐더라, 음식점의 메뉴 역시 몇 가지 되지 않아 외식 문화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나라에 가지 않아도 몇 시간 전에 예약만 하면 각국의 새로운 요리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고, 심지어 맞춤식 요리까지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의 하루 세끼를 위해 쓰던 시간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는 자신만을 위해 온전하게 쓸 수 있는 여가 시간이 되었다.

 

의료 분야는 어떠한가? '건강한 노년'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건강하고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여행까지 다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생겨났다. 이전에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전염병의 공포도 벗어던졌고, 죽지 않고 한 살을 넘겼다며 하던 돌 파티의 의미도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다. 여성의 인권 역시 크게 신장되었다. 남녀의 임금차이를 운운하는 것 조차 오래된 논쟁이 되어버렸고, 정치,경제 등 각종 분야에서의 여성 파워는 매년 눈에 띄게 커져가고 있다. 매일같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IT분야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접속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손에 잡히는 아주 작은 스마트폰 하나가 세상의 모든 정보를 날라다 주는 신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분명 우리의 삶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가?

 

각종 그래프나 수치들은 몇십년 전에 비해 우리 삶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거나 심지어 자신이 혜택을 입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는 듯 보인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해결된 원래의 문제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문제에 주목하며 안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식량은 풍부해졌지만 유전자 변형이라는 문제에 대해 불안해하고, 의료 서비스는 나날이 향상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는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자동차는 편리함을 안겨다 주었지만 사고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큰 그림 대신 작은 그림만을 보고, 더 큰 긍정적인 그림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부정적인 그림만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과장된 불안이다. 이는 회의주의를 조장하는 언론이나 엘리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들은 나쁜 뉴스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위기감이 고조 되었을 때 비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고, 자신들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과장된 위기를 조정하고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그들이 조정한 위기에 사회는 여전히 불안하고 나는 점점 불행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로 풍요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본성이다. 자신들이 '잘 산다'고 생각하냐고 묻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년 전에 비해 99%잘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상대적인 빈곤감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부자들은 상속이나 부정한 계급제로 인해 재산을 모았기 때문에 잘 산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이 묻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4. 이성적 낙관주의자로 살아가는 방법 

 

매트 리틀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와 그레그 이스터브룩의 <진보의 역설>는 똑같이 우리는 전에 없는 번영의 시기를 누리고 있고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심리리적인 외침이 아닌 각종 수치와 그래프, 수학적인 모델을 통해 객관적으로 나아졌음을 보여준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인구폭발로 인한 식량 부족을 우려하고, 1972년 로마클럽이 펴년 <성장의 한계>에서 한 세기 안에 전 세계는 파멸의 길로 치달을 것이라 경고한 것과는 달리 매트 리틀리는 더욱 더 과감하게 "경제붕괴, 인구폭발, 기후변화, 테러리즘, 빈곤은 모두 해결 될 것이고 앞으로 100년 인류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그들의 주장을 전면으로 반박한다.   

 

결국 세상은 자신이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이다. 모두가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또 인간의 욕심은 무한한 것이라 유토피아에 도달했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또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게 될 것이다. 모두가 위기와 불안으로 가득한 미래의 모습에 대해 경고할 때, 우리의 상황은 점점 나아져 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 말해주는 <이성적 낙관주의자>와 <진보의 역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아지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두 권 합쳐 천 페이지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었지만 메시지는 똑같았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충분히 괜찮고 앞으로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불안해 하지 말고 지금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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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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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어마어마한 분량에 놀랐었다. 권당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무려 3권! 추리소설로는 보기 힘든 분량이었다. 그 다음으로 놀랐던 건 이렇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어내려가도록 하는 필력에 있었다. 3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고, 계속해서 뒷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200페이지의 소설이라도 한 장을 넘기는 것이 힘든 다른 소설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감으로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하나의 사건을 연결고리고 수많은 인간상을  보여준다는 데 놀라움이 있었다. 그의 소설 속에는 단편 소설 10편을 읽은 것을 맞먹을만큼의 인상상이 담겨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그랬다. 

 <이유>를 읽는 내내, 그리고 680여 장의 페이지를 다 넘긴 후에 다시 한번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 경탄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에 간만에 집어든 추리 소설이었는데 역시 미야베 미유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유>는 1998년 출판 된 것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비교적 초창기 작품이며 이 소설로 120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다(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모방범>은 2년 뒤인 2001년 작이다). 한 고급 아파트에서 일어난 의문의 일가족 4인 살인사건으로 이야기는 시작되며 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전체적인 이 책의 내용이다.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 모으듯 '사건'은 많은 사람을 빨아들인다.
폭심지에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각자의 가족, 친구와 지인, 근처 주민, 학교 친구나 회사 동료,
나아가 목격자, 경찰의 탐문을 받은 사람들, 사건 현장에 출입하던 수금원, 신문배달부, 음식배달부 등,
헤아려보면 한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새삼 놀랄 정도다.
_ 91쪽 중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날,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 웨스트타워 2025호에서 4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중년의 남자와 여자, 할머니, 그리고 젊은 남자(엄밀히 말하면 이 시체는 아파트 난간에서 발견된다). 처음에는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간주하고 수사를 시작하지만 이웃들의 증언과 경비원의 진술은 이들의 정체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버린다. 원래 이 집에는 살해 당한 4인 가족이 아닌 세 가족(부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아파트에도 그렇게 등록되어있고, 2025호에서 나오는 사람들 봤다는 이웃들의 증언도 그랬다. 그런데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언제 이사를 왔는지도 모르는 이 4명이 2025호에서 살고 있었으며 살해를 당한 것이다.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전에 살던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는 그 어떤 작은 실마리도 없었다. 

소설의 3장을 시작하면서 작가가 미리 언급했듯이 이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며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여겨졌던 이 사건은 알고보니 아무런 연관이 없는 4명이 한 집에서 살인을 당한 것이었고, 이들 네 명은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한 가족인냥 행세를 하며 그 집에서 살고 있었떤 것이다. 이들의 정체와, 왜 어느날 갑자기 2025호에 살던 가족이 바뀌었는가를 밝혀 내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화자는 사건이 종결된 시점에서 관련자들을 하나씩 만나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그 궁금증을 풀어준다. 시공간을 초월하며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끼쳤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추측하게 만들고, 이들을 극단으로 몰고가버린 우리 사회 구조의 모순점을 고발하기도 한다. 한 명의 한 명의 이야기가 하나의 단편으로 구성되어도 손색 없을 만큼 완결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웨스트타워 2025호로 다시 모인다. 그 치밀성과 완결성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소설의 핵심에는 '가족'과 그 가족들의 보금자리인 '집(부동산)'이 있었다. 살인사건의 배경이 우리로 치면 타워펠리스와 같은 최고급 아파트인 것도, 그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 화목하던 가정이 깨지고 가장은 극단의 상황까지 상황을 몰고가는 것도, 가족이 싫어 가짜 가족을 만들어 생활하다 그것이 정말 가족이 되어버리자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도 모두가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의 '가족'과 '집'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 소재로 채택된 것이었다. 가족들의 가장 편안한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집' 때문에 불화가 생기고, 살인이 벌어지고,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살인사건을 각종 매체들이 사실과 추측을 구분하지 않은채 앞다투어 보도를 해 무엇이 '리얼리티' 이고 무엇이 '버추얼리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 사건에 '참가'하고 싶어 꾸며낸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스스로까지 속이면서 허위 증언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은 소설 중간중간 등장하며 이 소설을 단순한 추리물이 아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풍부한 텍스트로 만든다.  

 
어떤 소설은 읽을 때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들만큼 재미 있어도 읽고 나면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유>만큼은 다 읽고 나서도 끊임 없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그 사건을 둘러 싼 인물들을 다시 그려보게 만들었다. 그만큼 복잡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고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 아닐까?  '재밌다'는 말 이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책을 만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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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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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세상이 참 불공평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병든 부모를 모시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성실한 청년이 불의의 사고로 한 순간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못하며 자신이 모든 손해를 감수하며 살아가던 아가씨는 강도를 만나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 반면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거짓말을 일삼고 교묘한 방법으로 남의 돈을 갈취하던 사람은 여전히 위풍당당 잘 살고 있으며,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자들도 오히려 행복한 모습으로 즐겁게 살아간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내게 닥친 불행은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감당할 수 없는 힘겨움이 닥쳤을 때, 계속해서 실패의 쓴 맛 만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왜, 하필 나야?"라며 세상을 먼저 탓하게 되지 않는가?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한적 없고, 누군가에게 해 한번 끼친적 없는데 왜 내가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왜 하필 그 순간 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왜 하필 그때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일까, 라며 언제나 '왜 하필'을 외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  한 수도사가 있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자기가 개종시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 속에 깃든 고통들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가난하고 완고한 개종자들에게,
그 답을 역사적으로, 수학적으로 증명해주고 싶었다.
_ 34쪽 중에서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져 여행객 다섯 명이 다리 아래 깊은 골짜기로 추락했다." 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인간의 비극이 특정인이게 닥치는 것이며, 그 비극이 왜 그에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지를 밝히고자 한 주니퍼 수사의 기록이다. 신의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주니퍼 수사는 페루에서 일어난 다리 붕괴 사고에 주목한다. 그날 그 다리 위를 건너다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다섯 사람, 이 다섯 사람의 종적을 찾아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밝혀내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거라 판단한 주니퍼 수사는 6년간 리마(페루의 지방 이름)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수없이 질문을 하고, 수십 권의 공책을 채우며 목숨을 잃은 다섯 사람 하나하나가 완벽한 신의 피조물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사실 그 다섯 명의 종적을 읽고 있으면 왜 하필 그들이 그 다리를 건너고 있어야 했고,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든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그녀는 외로운 과부로, 딸 클라라에게 숨막히는 사랑을 보내 딸을 저 멀리 스페인으로 시집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자기 연민에 빠진 자아도취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딸에 대한 강박적인 사랑을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하녀 페피타의 편지를 훔쳐 보다 그동안 자신의 삶의 실수를 깨닫고 모든 강박과 히스테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딸에게 (마지막이 된)편지를 쓴다. 그리고 이틀 뒤 하녀 페피타와 함께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다 사고를 당하게 된다.

피오 아저씨의 죽음은 더욱 절망적이기만 하다. 그는 당대 유명한 배우 카밀라의 가정부였다. 아니, 그는 그녀의 노래 선생님이자, 이발사이자, 안마사이자,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자, 연기 지도자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피오 아저씨가 카밀라를 만난 건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열두살 소녀 카밀라였을 때였다. 피오 아저씨는 카밀라의 노래를 듣고 그것에 매료되어 그녀를 최고의 배우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소녀를 돈을 주고 샀다. 카밀라에 대한 피오 아저씨의 사랑은 남녀 관계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있었다. 최고의 연기를 해내 피오 아저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카밀라는 노력했고, 피오 아저씨는 그런 카밀라를 위해 냉정을 유지하며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왔다. 하지만 카밀라는 최고의 배우에 오르며 피오 아저씨를 점차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고 그녀는 다른 백작과 결혼을 해 아들을 낳게 된다. 피오 아저씨는 변해 가는 카밀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녀의 아들에 대한 배우적인 기질을 키우고 싶어 그녀에게 아들을 자기에게 보내 교육 시킬 것을 권유한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그녀였지만 결국 그 둘을 떠나도록 허락하고 그날 카밀라의 아들과 피오아저씨는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게 된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과 페피타, 피오아저씨와 카밀라의 아들, 그리고 쌍둥이 동생을 잃은 에스테반까지 이 다섯 명은 산 루이스 레이 다리가 무너지는 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들의 이야기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가 지금까지의 삶의 고통을 딛고 새출발을 결심한 다음날 불행한 사고를 당하게 된다. 정말로 신이 존재해 이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면 이것이야말로 불합리하고 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인간의 삶은 더 잔인하고 고통스럽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이 소설의 마지막 장, 다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 날 비로소 풀리게 된다. 장례식인 열린 대성당의 수녀원장을 찾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녀에게 건네는 죽은 다섯명과 얽힌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소녀 때부터 이어져온 외로움과 오랜 절망 때문에 고통받던 카밀라는 피오 아저씨의 죽음에서, 클라라는 어머니가 보내온 마지막 편지 속에서 사랑의 힘을, 삶의 기쁨을 깨달으며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평안을 비로소 찾게 된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인 사랑!" 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주니퍼 수사가 그토록 밝히고자 찾아 헤맸던 신의 의도이자 우리 삶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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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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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_ 그리스인 조르바, 22쪽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윤기 선생님을 뵈었던 건 지난 겨울 과천의 한 상가 자하의 음식점에서였다. 그날도 선생님은 처음 선생님을 뵈었을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청 멜방바지에 커다란 가방을 둘러 메고 내 두 발이 다 들어갈만큼 커다란 신발을 신고 계셨다. 건강 탓에 얼굴 색만큼은 밝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그 어느 누구도 누그러뜨릴 수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윤기 선생님은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분이라 그날도 선생님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처럼 선생님의 말씀만 고분고분 듣고 있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이어지다 어느 순간 함께한 선배들이 자리를 비워 선생님과 나만 자리에 남게 되는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해' 라며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그 즈음 읽기 시작한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선생님, 요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는데 책이 진도가 잘 안나가요."

 

사실 그때는 정말 <그리스인 조르바>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이었다. 잠들 기 전 몇 페이지씩 읽고 있었는데 이야기에 잘 몰입이 되지 않았었다. 책이라는 것도 '때'가 있듯이 아마 내가 그 책을 집어 들었을 그때는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뉴욕 여행때 조르바가 듬직한 친구가 되어 줬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책 정말 재밌어요.' '최고에요'라는 말은 커녕  '책이 잘 안 읽혀요.'라고 말을 해버리는,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해버렸던 것이다.

 

때마침 자리로 돌아오는 선배에게 선생님은 "이 처자가 '조르바'가 진도가 안 나간다네. 이를 어쩌나"라며 허허 웃으시더니 한바탕 조르바 이야기를 쏟아내시기 시작했다. 조르바를 번역할 때 원서를 잡고는 10번을 읽고는 단번에 번역을 완성했다는 말씀에서부터, 자유롭지만 야성미 넘치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충실하는 영혼의 자유를 외치는 거인 조르바의 삶이 너무 멋있다는 이야기까지 조르바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간인가에 대해 한바탕 강의를 들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조르바의 이야기는 <그리스인 조르바> 속 조르바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 이성보다는 감정에 충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인간들의 약속과 도덕률에 속박되기 보다는 영혼의 부름에 몸을 맡긴 채 자유를 쫓아 떠돌아 다니는 사람. 조르바는 이미 이윤기 선생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_ 그리스인 조르바, 82쪽 중에서 

지난 금요일 이윤기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떠오른 것이 이 책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내게는 인생의 새로운 도약이 되어줄 50여일간의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줬던 책, 그리고 곳곳의 조르바의 말에 줄을 치고 옮겨 적으며 서둘지 말고, 안들을 부리지도 말고 살자며 몇번을 다짐하게 만들었던 책, 조르바가 주인공에게 호통을 치며 한바탕 자신의 인생관을 쏟아낼 때면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던 책 말이다. 다음에 만나 뵙게 되면 '조르바, 다 읽었어요'라고 자랑하고, 곳곳에 밑줄 그은 책도 보여드리고, 다시 한번 조르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 이 책으로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지는 몰랐다.

 

이윤기 선생님의 소식에 슬퍼하는 한 선배에게 그런 말을 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라요. 육체의 속박에, 세상의 틀에 갖혀 지내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었고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났잖아요. 이제는 선생님이 정말 조르바가 되었는지도 몰라요. 너무 즐겁고 너무 재미있으셔서 세상에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에게 호통을 치실지도 몰라요. 네가 진정 내 행복을 방해하려 하느냐! 라고요."

 

신화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이 났던 사람, 작가로서 소소한 부분까지 챙기며 작가로서의 사명을 다 했던 사람. 이제 그의 글을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쉽지만, 난 왠지 선생님이 더 행복해 지셨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마냥 슬프기만 하지는 않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을 애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그 사람들 오래도록 기억하는 데 얼만큼의 힘을 주는지, <그리스인 조르바>와 이윤기 선생님을 통해 깨달은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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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윤기 님을 실제로 만나시다니,, 부럽습니다^^
저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유명하다길래 올해 처음 읽었는데 조르바란 인물의 매력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 읽고난지 얼마 안 되어 이윤기 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마음 한 구석이 슬프면서 먹먹해지더군요.
결말에 조르바가 죽기 전에 젊은 작가의 꿈에 나타나는 장면이 떠올리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비보라서 아쉬웠기도 했구요. 페이퍼 보는 겸에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조르바 리뷰가 있길래 읽어봤습니다.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측천무후
쑤퉁 지음, 김재영 옮김 / 비채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너희들 중에 나의 말을 길들일 방도를 낼 자가 있겠느냐" 황제가 물었다. 그러자 한 궁녀가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저에게 세 가지 도구만 주시면 능히 그것을 길들일 수 있사옵니다. 그것은 채찍과 망치, 그리고 날카로운 검입니다. 먼저 채찍으로 말의 등을 후려치고, 그것으로 여의치 않으면 망치를 쓰고, 그래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비수로 말의 목을 찌르고야 말 것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대답을 했던 궁녀는 바로 훗날 당나라의 여황제로 세상 위에 군림했던 측천무후였다. 열 네살의 나이로 황궁에 들어가 태종 이세민의 재인으로 지내다 그의 총애는 받지 못하고,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 고종 황제의 총애를 입어 황후의 자리에 올라 훗날 여황제의 자리까지 올라 천하를 다스렸던 자가 바로 측천무후다. 그런 측천무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중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여성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권력 앞에서는 자신의 아들도 독살할만큼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여성"이었다는 평가로 말이다. 때문에 측천무후를 소제로 한 영화나 소설 역시 이 상반된 입장에서 기술이 되고 있는데 쑤퉁은 후자의 입장을 주축으로 측천무후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해 풀어내고 있다.


이야기는 재인 무조가 황궁에 들어오는 날부터 시작된다. 예측불허의 끝 모를 궁중 생활에 대한 암담함, 아무리 노력해도 황제의 눈에 들 수 없었던 그녀의 슬픔,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더욱 야심을 불태우고 강인해질 수 밖에 없었던 사연들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의 이야기 사이사이로는 그녀의 큰 아들이자 자신의 손으로 독극물을 먹였던 태자 홍, 서인으로 강등기키고 유폐시킨 태자 현, 그리고 측천무후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도록 허수아비 왕 역할을 제대로 해준 예종의 이야기가 각각 그들의 시점에서 기술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담담하고 건조하면서도 냉랭하게 써내려간 측천무후의 이야기와는 달리 억울함과 답답함, 절절함이 묻어 나는 세 아들들의 이야기가 엇갈려 나오면서 소설은 더 다채로워진다.

측천무후의 자식들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이 소설에서 다루어진만큼 그들의 시각으로 읽혀는 측천무후의 모습을 보는 부분이 재미있다. 어머니에 상반된 입장을 취해 결국 독이 탄 술잔을 받았던 태자 홍은 "하얀 분가루로 뒤덮인 그 거대한 손이 어느 곳이든 속속들이 더듬어대다가 필요한 걸 강탈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며 황궁 내에서 펼쳐진 어머니의 더러운 음모를 묘사했다. 태자 현은 형의 죽음과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하며 자신의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멀리하기 시작한다. 현은 '저 여자가 내 어머니일리 없어.'라고 읊조리며 측천무후를 모정이라고는 하나 없으며 자신의 의견에 반기를 들면 모조리 숙청해 버리는 무자비한 여성으로 기술했다. 욕심이 없었던 예종은 자신의 성격처럼 "숭배와 경외, 혹은 공포라는 말만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내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며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풀어 놓았다.

세 아들들이 바라보는 측천무후의 모습은 후대의 평가 중 그녀를 극악무도하며 잔인한 여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해 놓는다. 그것이 어머니의 손으로 죽임을 당한 아들이라는 측면에서 기술되면서 그 잔임함의 강도는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쑤퉁의 이 노련한 서술 방식은 다른 측천무후의 이야기와 차별성을 꾀하며 그녀의 인간됨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측천무후는 정말 극악무도한 황제였던 것일까?

대학시절 내가 읽었던 측천무후는(작가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총명하고 노련하며 재치있는 정치가였다. 사람을 얻는 길이 천하를 얻는 길임을 알고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어두는 치밀함을 가지고 있었고, 외교 관계에 있어서는 당나라를 위협하던 거란을 제압하고 티베트 왕국까지 정복한 능력있는 외교가였고, 부역과 세금 감면 정책을 통해 유랑민을 정착시킨 태평성대를 누리게 한 황제였다.  

측천무후의 이야기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양산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능 앞에 세워진 '무자비' 때문이 아닐까 한다. 측천무후는 죽기 전 유언을 통해 자신의 능 앞에 세우는 비석에 아무것도 적지 말라고 명했다. 보통은 비석에 왕이 생전에 세운 업적을 적어 넣는데, 혹자는 측천무후 자신이 세운 업적이 너무 많으니 이 작은 비석따위에 다 적을 수 없어 그리하라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그 미스터리한 행동과 '여황제'라는 그 이름 자체가 그녀를 수많은 형태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는 10월 서극이 감독을 맡고 유가령, 양가휘 등이 주연으로 나오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이 개봉한다고 한다. '적인걸'이라는 중국 당대의 명탐정이 미스터리한 살인사건과 황실의 음모를 파헤쳐 나가는 내용을 그린 영화라고 하는데, 아마도 측천무후 시대에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오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그 전에 쑤퉁의 이 책과, 샨사의 <측천무후>까지 함께 읽고 간다면 영화를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한 한 여인이 천하의 주인이 되기까지의 결코 쉽지 않았던 그녀의 인생 대서사시가 무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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