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낙관주의자 - 번영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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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0년 전 사람들보다 우리는 지금 더 행복한가?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불평한다. "예전보다 사는 환경은 더 나아졌는지 몰라도 삶은 팍팍해. 옛날이 더 행복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증명해주듯이 각국 정부들은 국민총생산 대신 국민총행복(GNH)이라는 수치를 만들어 그것을 극대화 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심지어 부탄은 이 국민총행복지수를 잣대로 삼아 정책을 심사한다). 영국 정부에는 '웰빙 부서'라는 것이 생겨났고, 리처드 이스털린은 경제성장과 행복은 꼭 연결되는 것이 아니며 잘 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다는 주장까지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행복하기는커녕 더욱 불행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최근 점점 높아져가는 우울증 환자의 수나 주변에서 심심지 않게 만나게 되는 자살을 마주할 때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생활 수준과 소비 수준은 불과 1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자, 그럼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정말 10년 전,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생활할 자신이 있는가? 더 쉽게 말해 휴대폰이 없는 세상, 컴퓨터가 없는 세상, 자동차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 생활 할 자신이 있는가 말인가. 


2. 사실상 세상은 모든 면에서 나아지고 있다.

 

건방진 말이지만 매트 리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잘살면서 불행한 것은 못살면서 불행한 것보다 분명이 낫다(<이성적 낙관주의자> 52쪽 중에서)". 1974년 이스털린이 부유한 국민들이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는 주장한 이후  '이스털린의 역설'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요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행복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유해질수록 더 행복해 진다"는 것이었다.

 

쉽게 하루 세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만 생각해보자. 수백년 전 자급자족 사회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이 하루 세끼를 위해 하루종일을 준비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니 수백년 까지 갈 것도 없이 2,30년 전만 생각해보자. 돈 벌고 모으기도 급급해 외식은 자주 할 수 없었을 뿐더라, 음식점의 메뉴 역시 몇 가지 되지 않아 외식 문화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나라에 가지 않아도 몇 시간 전에 예약만 하면 각국의 새로운 요리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고, 심지어 맞춤식 요리까지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의 하루 세끼를 위해 쓰던 시간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는 자신만을 위해 온전하게 쓸 수 있는 여가 시간이 되었다.

 

의료 분야는 어떠한가? '건강한 노년'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건강하고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여행까지 다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생겨났다. 이전에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전염병의 공포도 벗어던졌고, 죽지 않고 한 살을 넘겼다며 하던 돌 파티의 의미도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다. 여성의 인권 역시 크게 신장되었다. 남녀의 임금차이를 운운하는 것 조차 오래된 논쟁이 되어버렸고, 정치,경제 등 각종 분야에서의 여성 파워는 매년 눈에 띄게 커져가고 있다. 매일같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IT분야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접속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손에 잡히는 아주 작은 스마트폰 하나가 세상의 모든 정보를 날라다 주는 신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분명 우리의 삶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가?

 

각종 그래프나 수치들은 몇십년 전에 비해 우리 삶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거나 심지어 자신이 혜택을 입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는 듯 보인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해결된 원래의 문제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문제에 주목하며 안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식량은 풍부해졌지만 유전자 변형이라는 문제에 대해 불안해하고, 의료 서비스는 나날이 향상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는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자동차는 편리함을 안겨다 주었지만 사고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큰 그림 대신 작은 그림만을 보고, 더 큰 긍정적인 그림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부정적인 그림만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번째는 과장된 불안이다. 이는 회의주의를 조장하는 언론이나 엘리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들은 나쁜 뉴스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위기감이 고조 되었을 때 비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고, 자신들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과장된 위기를 조정하고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그들이 조정한 위기에 사회는 여전히 불안하고 나는 점점 불행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로 풍요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본성이다. 자신들이 '잘 산다'고 생각하냐고 묻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년 전에 비해 99%잘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상대적인 빈곤감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부자들은 상속이나 부정한 계급제로 인해 재산을 모았기 때문에 잘 산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이 묻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4. 이성적 낙관주의자로 살아가는 방법 

 

매트 리틀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와 그레그 이스터브룩의 <진보의 역설>는 똑같이 우리는 전에 없는 번영의 시기를 누리고 있고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심리리적인 외침이 아닌 각종 수치와 그래프, 수학적인 모델을 통해 객관적으로 나아졌음을 보여준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인구폭발로 인한 식량 부족을 우려하고, 1972년 로마클럽이 펴년 <성장의 한계>에서 한 세기 안에 전 세계는 파멸의 길로 치달을 것이라 경고한 것과는 달리 매트 리틀리는 더욱 더 과감하게 "경제붕괴, 인구폭발, 기후변화, 테러리즘, 빈곤은 모두 해결 될 것이고 앞으로 100년 인류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그들의 주장을 전면으로 반박한다.   

 

결국 세상은 자신이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이다. 모두가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또 인간의 욕심은 무한한 것이라 유토피아에 도달했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또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게 될 것이다. 모두가 위기와 불안으로 가득한 미래의 모습에 대해 경고할 때, 우리의 상황은 점점 나아져 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 말해주는 <이성적 낙관주의자>와 <진보의 역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아지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두 권 합쳐 천 페이지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었지만 메시지는 똑같았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충분히 괜찮고 앞으로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불안해 하지 말고 지금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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