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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모방범>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어마어마한 분량에 놀랐었다. 권당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무려 3권! 추리소설로는 보기 힘든 분량이었다. 그 다음으로 놀랐던 건 이렇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어내려가도록 하는 필력에 있었다. 3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고, 계속해서 뒷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200페이지의 소설이라도 한 장을 넘기는 것이 힘든 다른 소설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감으로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하나의 사건을 연결고리고 수많은 인간상을 보여준다는 데 놀라움이 있었다. 그의 소설 속에는 단편 소설 10편을 읽은 것을 맞먹을만큼의 인상상이 담겨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그랬다.
<이유>를 읽는 내내, 그리고 680여 장의 페이지를 다 넘긴 후에 다시 한번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 경탄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에 간만에 집어든 추리 소설이었는데 역시 미야베 미유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유>는 1998년 출판 된 것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비교적 초창기 작품이며 이 소설로 120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다(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모방범>은 2년 뒤인 2001년 작이다). 한 고급 아파트에서 일어난 의문의 일가족 4인 살인사건으로 이야기는 시작되며 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전체적인 이 책의 내용이다.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 모으듯 '사건'은 많은 사람을 빨아들인다.
폭심지에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각자의 가족, 친구와 지인, 근처 주민, 학교 친구나 회사 동료,
나아가 목격자, 경찰의 탐문을 받은 사람들, 사건 현장에 출입하던 수금원, 신문배달부, 음식배달부 등,
헤아려보면 한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새삼 놀랄 정도다.
_ 91쪽 중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날,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 웨스트타워 2025호에서 4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중년의 남자와 여자, 할머니, 그리고 젊은 남자(엄밀히 말하면 이 시체는 아파트 난간에서 발견된다). 처음에는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간주하고 수사를 시작하지만 이웃들의 증언과 경비원의 진술은 이들의 정체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버린다. 원래 이 집에는 살해 당한 4인 가족이 아닌 세 가족(부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아파트에도 그렇게 등록되어있고, 2025호에서 나오는 사람들 봤다는 이웃들의 증언도 그랬다. 그런데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언제 이사를 왔는지도 모르는 이 4명이 2025호에서 살고 있었으며 살해를 당한 것이다.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전에 살던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는 그 어떤 작은 실마리도 없었다.
소설의 3장을 시작하면서 작가가 미리 언급했듯이 이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며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여겨졌던 이 사건은 알고보니 아무런 연관이 없는 4명이 한 집에서 살인을 당한 것이었고, 이들 네 명은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한 가족인냥 행세를 하며 그 집에서 살고 있었떤 것이다. 이들의 정체와, 왜 어느날 갑자기 2025호에 살던 가족이 바뀌었는가를 밝혀 내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화자는 사건이 종결된 시점에서 관련자들을 하나씩 만나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그 궁금증을 풀어준다. 시공간을 초월하며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끼쳤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추측하게 만들고, 이들을 극단으로 몰고가버린 우리 사회 구조의 모순점을 고발하기도 한다. 한 명의 한 명의 이야기가 하나의 단편으로 구성되어도 손색 없을 만큼 완결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웨스트타워 2025호로 다시 모인다. 그 치밀성과 완결성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소설의 핵심에는 '가족'과 그 가족들의 보금자리인 '집(부동산)'이 있었다. 살인사건의 배경이 우리로 치면 타워펠리스와 같은 최고급 아파트인 것도, 그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 화목하던 가정이 깨지고 가장은 극단의 상황까지 상황을 몰고가는 것도, 가족이 싫어 가짜 가족을 만들어 생활하다 그것이 정말 가족이 되어버리자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도 모두가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의 '가족'과 '집'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 소재로 채택된 것이었다. 가족들의 가장 편안한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집' 때문에 불화가 생기고, 살인이 벌어지고,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살인사건을 각종 매체들이 사실과 추측을 구분하지 않은채 앞다투어 보도를 해 무엇이 '리얼리티' 이고 무엇이 '버추얼리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 사건에 '참가'하고 싶어 꾸며낸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스스로까지 속이면서 허위 증언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은 소설 중간중간 등장하며 이 소설을 단순한 추리물이 아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풍부한 텍스트로 만든다.
어떤 소설은 읽을 때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들만큼 재미 있어도 읽고 나면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유>만큼은 다 읽고 나서도 끊임 없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그 사건을 둘러 싼 인물들을 다시 그려보게 만들었다. 그만큼 복잡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고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 아닐까? '재밌다'는 말 이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책을 만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