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쑤퉁 지음, 김재영 옮김 / 비채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너희들 중에 나의 말을 길들일 방도를 낼 자가 있겠느냐" 황제가 물었다. 그러자 한 궁녀가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저에게 세 가지 도구만 주시면 능히 그것을 길들일 수 있사옵니다. 그것은 채찍과 망치, 그리고 날카로운 검입니다. 먼저 채찍으로 말의 등을 후려치고, 그것으로 여의치 않으면 망치를 쓰고, 그래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비수로 말의 목을 찌르고야 말 것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대답을 했던 궁녀는 바로 훗날 당나라의 여황제로 세상 위에 군림했던 측천무후였다. 열 네살의 나이로 황궁에 들어가 태종 이세민의 재인으로 지내다 그의 총애는 받지 못하고,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 고종 황제의 총애를 입어 황후의 자리에 올라 훗날 여황제의 자리까지 올라 천하를 다스렸던 자가 바로 측천무후다. 그런 측천무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중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여성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권력 앞에서는 자신의 아들도 독살할만큼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여성"이었다는 평가로 말이다. 때문에 측천무후를 소제로 한 영화나 소설 역시 이 상반된 입장에서 기술이 되고 있는데 쑤퉁은 후자의 입장을 주축으로 측천무후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해 풀어내고 있다.


이야기는 재인 무조가 황궁에 들어오는 날부터 시작된다. 예측불허의 끝 모를 궁중 생활에 대한 암담함, 아무리 노력해도 황제의 눈에 들 수 없었던 그녀의 슬픔,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더욱 야심을 불태우고 강인해질 수 밖에 없었던 사연들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의 이야기 사이사이로는 그녀의 큰 아들이자 자신의 손으로 독극물을 먹였던 태자 홍, 서인으로 강등기키고 유폐시킨 태자 현, 그리고 측천무후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도록 허수아비 왕 역할을 제대로 해준 예종의 이야기가 각각 그들의 시점에서 기술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담담하고 건조하면서도 냉랭하게 써내려간 측천무후의 이야기와는 달리 억울함과 답답함, 절절함이 묻어 나는 세 아들들의 이야기가 엇갈려 나오면서 소설은 더 다채로워진다.

측천무후의 자식들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이 소설에서 다루어진만큼 그들의 시각으로 읽혀는 측천무후의 모습을 보는 부분이 재미있다. 어머니에 상반된 입장을 취해 결국 독이 탄 술잔을 받았던 태자 홍은 "하얀 분가루로 뒤덮인 그 거대한 손이 어느 곳이든 속속들이 더듬어대다가 필요한 걸 강탈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며 황궁 내에서 펼쳐진 어머니의 더러운 음모를 묘사했다. 태자 현은 형의 죽음과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하며 자신의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멀리하기 시작한다. 현은 '저 여자가 내 어머니일리 없어.'라고 읊조리며 측천무후를 모정이라고는 하나 없으며 자신의 의견에 반기를 들면 모조리 숙청해 버리는 무자비한 여성으로 기술했다. 욕심이 없었던 예종은 자신의 성격처럼 "숭배와 경외, 혹은 공포라는 말만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내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며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풀어 놓았다.

세 아들들이 바라보는 측천무후의 모습은 후대의 평가 중 그녀를 극악무도하며 잔인한 여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해 놓는다. 그것이 어머니의 손으로 죽임을 당한 아들이라는 측면에서 기술되면서 그 잔임함의 강도는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쑤퉁의 이 노련한 서술 방식은 다른 측천무후의 이야기와 차별성을 꾀하며 그녀의 인간됨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측천무후는 정말 극악무도한 황제였던 것일까?

대학시절 내가 읽었던 측천무후는(작가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총명하고 노련하며 재치있는 정치가였다. 사람을 얻는 길이 천하를 얻는 길임을 알고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어두는 치밀함을 가지고 있었고, 외교 관계에 있어서는 당나라를 위협하던 거란을 제압하고 티베트 왕국까지 정복한 능력있는 외교가였고, 부역과 세금 감면 정책을 통해 유랑민을 정착시킨 태평성대를 누리게 한 황제였다.  

측천무후의 이야기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양산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능 앞에 세워진 '무자비' 때문이 아닐까 한다. 측천무후는 죽기 전 유언을 통해 자신의 능 앞에 세우는 비석에 아무것도 적지 말라고 명했다. 보통은 비석에 왕이 생전에 세운 업적을 적어 넣는데, 혹자는 측천무후 자신이 세운 업적이 너무 많으니 이 작은 비석따위에 다 적을 수 없어 그리하라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그 미스터리한 행동과 '여황제'라는 그 이름 자체가 그녀를 수많은 형태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는 10월 서극이 감독을 맡고 유가령, 양가휘 등이 주연으로 나오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이 개봉한다고 한다. '적인걸'이라는 중국 당대의 명탐정이 미스터리한 살인사건과 황실의 음모를 파헤쳐 나가는 내용을 그린 영화라고 하는데, 아마도 측천무후 시대에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오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그 전에 쑤퉁의 이 책과, 샨사의 <측천무후>까지 함께 읽고 간다면 영화를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한 한 여인이 천하의 주인이 되기까지의 결코 쉽지 않았던 그녀의 인생 대서사시가 무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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