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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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이 매섭게 불어오는 밤, 어니스트의 가족들이 한데 모여 장작불을 쐬고 있다. 불은 아버지 에드워드가 자연에서 찾아낸 것들 중 가장 훌륭한 물건이랄 수 있는데 반야 삼촌은 이 불을 아주, 엄청나게, 어마무시하게 비난한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나무가 아닌 땅에서 살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삼촌의 비난은 거셌지만 불을 이용할 때만큼은 아니었다. "동생아, 네가 결국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집구석에 화산을 들여놓다니! 이건 주제넘는 짓이야! 자연에 어긋나는 일이라구!"(p11) 친환경적이고 자연 순응적인 삼촌은 여전히 나무 위에서 먹고 잔다. 그러니까 원숭이적인 거다. 엄청난 거구에 떡 벌어진 어깨, 무시무시하게 긴 팔다리, 날카로운 송곳니만 봐도 여전히 아주 많이 동물적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런 삼촌 눈에 동생 에드워드는 얼마나 미친 놈처럼 보였을까? 에드워드는 육식동물이 지천으로 깔린 나무 밑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이 두 살만 되도 땅에서 기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섭게 때리며 반듯하게 걸으라고 훈육했다. 걷고 뛰는 것만이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야! 우리는 계속해 진화해야만 해!! 그놈의 진화, 진화. 어니스트는 귀에 딱지가 않을만큼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컸지만 아버지의 말처럼 삶이 그렇게 가파르게 바뀔 수 있을런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결국 해낸다. 풀뿌리로 연명하고 유충이나 씹어 먹던 삶, 덩치 크고 힘 좋은 육식동물들을 따라다니며 남은 고기로 연명하는 삶, 잡아먹겠다고 쫒아오면 고스란히 먹혀주던 삶이 불씨 하나로 달라졌다. 불은 곰을 내쫓고 사자를 위협하고 매머드를 허둥지둥 달아나게 만든다. 에드워드는 무리지어 사냥하는 법도 깨달았다. 돌을 쳐 뾰족하게 날이 선 무기도 만들어낸다. 에드워드는 과학자고 조금이라도 빨리 진화해 후손들이 풍요롭게 살게 하기 위해 자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에드워드의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성장한다. 오스왈드는 발 빠르고 끈기 있는 사냥꾼이 되었고 알렉산더는 예술적 감각을 깨달으며 동굴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윌버는 용암지대에서 부싯돌로 쓸만한 바위를 발견한다. 윌리엄은 좀 엉뚱한 녀석인데 처음엔 개 그다음엔 돼지 최종적으로는 사슴을 사육해보겠다며 호기롭게 시도 중이다. 이 이야기의 화자인 어니스트는 형제들 중 처음으로 꿈이라는 걸 꾸게 된 철학자 같은 녀석이다. 녀석은 자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고 자아성찰에 푹 빠졌다. 그의 얼굴은 매일매일 변화 중이다. 턱은 작아지고 눈 뒤쪽 부분이 커지고 있다. 아마 모든 형제들의 아이를 제치고 어니스트의 자식이 가장 큰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겠지. 불쌍한 그리젤라, 그녀의 출산에 위로를 보낸다.

구제불능 진화론자 에드워드를 쫓아 직립보행을 하고 도구를 이용하고 불을 찾고 고기를 익히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족외혼을 하고 영역을 넓히며 야만인을 만나는 어니스트 가족!! 인류 진화의 연대기를 이만큼 재미있고 수월하게 풀어가는 모험 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제목을 바꿔가며 6번이나 개정 출판된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캐릭터 작가 호조의 일러스트가 몇 장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유쾌산뜻발랄코믹한 동시에 실은 많은 잔인한 역사를 품고 예견하고 있는 원시인들의 투쟁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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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크 에프 그래픽 컬렉션
로리 할스 앤더슨 지음, 에밀리 캐럴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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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된 첫날이라고 해서 느끼는 설렘 같은 건 일절 없다. 멜린다는 왕따다. '머리 모양이 이상하고 옷은 촌스럽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 문제라고 남들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입학 전부터 멜린다의 왕따는 기정사실로 땅땅 아이들 사이에 판결이 나있었다. 16살, 8월의 여름 파티, 세 잔의 맥주, 훨씬 어른스럽고 빛이 나는 것만 같았던 고등학생 언니오빠들. 위축되고 주눅들어 있던 멜린다는 기꺼이 다가와 말을 걸어 준 앤디 에반스를 반기고 환영했다. 키스까지는 그래, 동의가 맞았다. 그 어른스러운 키스에 멜린다는 고등학생으로 대우받는 느낌이었고 존중받는 기분이었고 설렜다. 그러나 그 이상까지 허락한 건 아니었다. 멜린다는 폭력을 거부하지만 두려움에 꽉 막힌 목구멍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토해내질 못했다. 소리없는 아우성이 끝난 후 멜린다는 파티장으로 들어가 경찰에 신고한다. 혼비백산한 아이들 사이에 뒤섞여 16살의 어린애는 제가 겪은 일을 고발조차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달아난다. 파티에 온 모든 아이들이 멜린다의 신고를 알았다. 아이들은 멜린다를 관심 종자 정도로 해석했을지도 모르겠다. 멜린다가 앤디 에반스의 행위를 침묵했으므로. 누군가는 대입이 취소되었고 누군가는 알바에서 잘렸고 아마 파티의 주최자이자 인기인이었을 카일도 부모에게 꽤 혼이 났을테다. 아이들은 공공의 적으로 멜린다를 지목한다. 멜린다 또한 변명하지 않는다. 어쩌면 시간이, 모쪼록 자연스럽게 해결해주리라, 모든 것을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채기 하나 없이 낫게 하리라 믿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돌아섰다. 부모님은 이혼 직전에 다다라 매일 같이 싸우거나 서로에게 냉랭하다. 무엇보다 앤디 에반스, 그가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식당에서 교실에서 앤디 에반스를 보고 듣고 느낀다. 멜린다는 인어 공주처럼 목소리를 잃었다. 거품처럼 보글보글 사라지는 일 외에 멜린다가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은 없는 것만 같다.

청소년 장편 소설 스피크를 원작으로 한 그래픽 노블이다. 2003년 문예출판사가 번역 출간했지만 현재는 절판 상태. 그래픽 노블이 전성기를 맞으며 훌륭한 소설이 그림을 입고 또한 훌륭하게 독자들을 다시 만난 경우인데 그래픽 노블만 봐도 원작 소설 또한 얼마나 대단할지 대략 유추가 되었다. 3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학교에서 수업 교제로 쓰이고 있으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성폭력을 당한 다수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멜린다는 부당한 폭력 앞에 분노하면서도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못한다. 그는 남자고 덩치가 크고 힘이 세며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멜린다를 제압하고 새로운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존재다. 믿음직한 어른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멜린다는 파탄 직전의 부모에게 자신의 문제를 끼얹고 싶지 않다. 더 솔직히는 부모와 대면하는 일 자체가 그냥 싫다. 무엇보다 수치스러워서,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봐, 이미 겪은 고통이 큰데 또다른 비난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멜린다를 위축시킨다. 침묵이, 인내가, 약이 되어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없다. 역사 시간, 여성 참정권자에 관한 발표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멜린다가 낙제점을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보충수업을 받게 된 멜린다는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말하지 않았다고 날 처벌하다니 그게 대체 말이나 되나. 이건 불공평해."(p282) 하며 분노하지만 수업의 짝꿍인 데이빗 페트라키스는 말한다. "말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하지만 만약 여성 참정권론자들이 말을 안 했다면, 여자들은 아직도 투표를 못 했을지도 몰라. 네가 스스로 목소리를 안 내는데 어떻게 변화를 기대하겠어."(p284) 데이빗의 말은 아쉽게도 멜린다를 설득하지 못했지만 프리먼 선생님의 미술 수업이 있었기에 멜린다는 차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강의 첫시간 이곳이 생존방법을 가르치는 유일한 수업시간이라던 프리먼의 말이 멜린다에게만큼은 정답이었다. 멜린다는 주먹을 불끈 쥐고 목청을 크게 높여 앤디 에반스에 맞설 힘을 끌어낸다. 멜린다는 승리한다. 앤디 에반스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적어도 멜린다의 내일에는 앤디 에반스가 없을테니 멜린다는 안전하게 울 수 있다. 우선은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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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이재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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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 휴가만을 바라며 호텔 프런트에서 고군분투 하던 로리. 퇴근 종이 울리자마자 해방을 외치며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꿈에도 바란 적 없던 눈부시게 빛이 나는 남자를 만난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로리는 버스 안, 그 남자는 버스 밖 정류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는건데 로리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면) 그 또한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운명의 벼락을 맞고 정신줄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영화였다면 로리는 냉큼 버스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또한 영화였다면 그가 냉큼 버스에 올라타 그녀 옆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이도저도 어려웠다면 창문을 열고 휴대폰 번호를 외치기라도 했을텐데 첫눈에 반한 게 처음이었던 로리는 너무 경황이 없었다. 남자가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고 크리스마스 전야의 도로 정체 속에서도 버스는 지나치게 서둘러 문을 닫았으며 그 또한 버스를 쫓아오지 않았기에 여자와 남자는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채로 이별을 하고 말았다. 거의 1년 동안 로리는 남자를 찾아 헤맨다. 그가 앉았던 정류장에 전단지를 붙이는 정도의 정성까진 기울이지 않았어도 거리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술집에서 백화점 또 어쩌면 그녀가 일하는 호텔 프런트에서 그의 얼굴을 찾았다. 끊임없이 그의 얼굴을 복기했고 그와의 재회를 꿈꿨고 다정한 인사를 상상했다. 설마하니 룸메이트이자 인생 친구이며 자매와 같은 세라의 남자친구로 그 남자를 소개받을 줄은 상상도 못한 채로 말이다!

2008년 12월 21일, 아버지의 사망 후 지나치게 자신에게 의존하는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면 잭은 살짝 넌더리가 나는 느낌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책을 읽던 그가 문득 눈을 들었을 때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그녀를 보게 된다. 머리에 반짝이 머리띠를 하고 있는 울새 같은 여자. 보통의 로맨스 소설처럼 운명이 척추를 훑고 가는 느낌이었는지 는 알 수 없지만 잭은 그녀를 인상 깊게 기억한다. 조금 더 빨리 일어나 책을 챙기고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어야 한다고 후회도 한다. 1년이 다 되도록 문득문득 아니 실은 자주 버스의 그녀가 꿈 속에 등장하고 있으므로. 꿈에 나타나는 여자가 물론 그녀가 처음이었던 건 아니지만 이런 감각 이런 인상으로 남았던 적은 없었다. 빨간 머리가 아름다운 새 여자친구 세라를 만나고 난 이후로도 그건 마찬가지였는데 맙소사! 세라가 허구헌 날 자랑하며 사이 좋게 지내달라 요청하던 룸메이트가 버스의 그녀라니.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잭은 로리를 눈에 담는다. 로리의 곁에 선 남자를 질투한다. 로리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로리의 등을 받쳐주고 그러다가는 급기야 로리에게 키스하고 만다. "이 일에 대해서 서로에게 친절하자. 우리 둘 다 알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이 일에 의미를 둘 필요도 없어. 이 일로 달라질 상황도 없고."/ "우리 둘 다 남은 평생 그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는 거야. 세라한테도, 서로한테도, 심지어 금붕어한테도."(p151)

소시적 할리퀸 로맨스 꽤 읽은 사람인데 급변하는 로맨스에 발 맞춰 나가는 게 쉽지가 않다. 아니 이런 반전이, 이게 요즘 로맨스 소설 시류인가 깜짝깜짝 놀란다. 얼마전엔 애인 있는 남자가 아예 남남인 여자랑 한 집을 공유하며 사랑에 빠지는, 영국의 셰어하우스 커플이 나를 놀래키더니 이번엔 첫눈에 반한 남자 주인공을 두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영국 여자 로리가 나를 놀래켰다. 페이지가 한참이나 남았는데! 친구 세라와 잭이 헤어지기까지 했는데! 로리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웬열!! 보통의 로맨스 법칙에서 벗어난 예상 밖의 전개에 갖은 호들갑을 다 떨었다는 거 아니겠는가. 초반에만 해도 남녀 둘이 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만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진 듯이 친구 몰래 사랑하다 뒤통수 치는 얘기겠거니 했는데 잭과 로리의 경우 잠깐의 실수가 있긴 했지만 최선을 다해 마음을 정리한다. 로리는 우정과 사랑 중 우정을 택했고 잭은 의리와 사랑 중 의리를 택한다. 물론 누구에게도 옳았다고 할 만한 선택이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중반도 되기 전에 로리가 남편이 될 남자 오스카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므로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돌고 돌아 끝을 맺을지 영 감을 못잡았다. 뭐가 어떻게 끝나야 해피엔딩이냐는 확신도 서지가 않더라. 로맨스 소설에 삼각관계가 등장하면 언제나 '최선'이란 것에, 가급적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결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나름 크리스마스 로맨스로 이만하면 최선을 다한 해피엔딩이었던 것 같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딱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세라와 로리든 로리와 오스카든 로리와 잭이든 이보다 더 영화 같은 관계들을 찾기도 힘들테니까. 로맨틱 코메디의 여왕 리즈 위더스푼이 강력 추천한 소설! 재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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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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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오셀로>의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강철이 없으면 자동차를 생산할 수가 없으며, 사회적인 불안정이 없으면 비극을 생산할 길이 없으니까요.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그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창밖에 던져버렸어요, 야만인 씨. 자유 말입니다!"(p333-334)

번역의 힘일까? 1932년에 출간된 도서인데도 고전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출간된 세련된 디스토피아 소설 같이 느껴졌다. 대량생산의 원칙이 생물학에도 적용되는 세상, 공장 하나를 가동하는 근로자들이 한 난자에서 출발한 수백만의 쌍둥이들로 채워지는 세상, 스테이크가 먹고 싶으면 소를 죽이지 말고 스테이크를 키우라던 현대 세포농업자들의 주장처럼 육체 근로자가 필요하면 그 기질에 맞는 인간군을 인공 부화시키는 세상, 슬픔과 괴로움과 좌절과 고통 같은 감정이 약물로써 거세된 세상, 죽는 순간까지 20대의 젊음을 유지하다가 한순간에 숨을 멈추는 세상, 신이 의미를 잃은 세상,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놀림거리가 되는 세상, 소유가 실종된 세상, 형제가 있으되 형제인 줄 모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그런 세상, 내가 그간 보아왔던 많은 디스토피아 영화들이 아마 여기 멋진 신세계에서 출발을 했었던가 보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남은 비문명화된 사회 말파이스에서 태어난 존. 그에게 있어 엄마 린다에게 들어왔던 런던은 낙원과도 다름없는 환상의 세계였다.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오 멋진 신세계여!"(p318) 셰익스피어의 작품 템페스트에서 이방인을 만난 미란다가 외쳤던 것과 같이 버나드를 따라 런던을 방문한 존도 멋진 신세계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붕어빵처럼 찍어낸 똑같은 얼굴들이 쏟아져 나오고 죽음 앞에서도 모두가 한결같이 즐겁게 무관심하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행복하고 한 극장 안에서 대중이 동시에 애욕을 처리하는 과정들을 목격하면서 존은 점차 멋진 신세계에 경악과 공포, 환멸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 할 권리는 물론이겠구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p363)

구세계와 신세계 모두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자 특유의 고독을 느껴야만 했던 야만인 존. 신세계의 통제관과 대화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분명하게 깨달은 존은 신세계의 외딴 대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지만 대중들은 그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다.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채찍질로 스스로를 엄벌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피 흘리는 금욕적인 삶은 몰래 카메라에 찍혀 대중이 누리는 또 하나의 오락거리가 된다. 신세계의 헬리콥터들이 벌떼처럼 존에게 몰려든다. 열명 스무명 백명 그를 포위한 대중들이 그에게 채찍질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채찍을 들고 덤비는 그에게 환호한다. 존은 대중에게, 멋진 신세계에게, 화냥년이라 욕하며 채찍질 한다. 대중은 웃으며 달음박질 치고 존은 목을 맨다.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 행복해지는 자유를 누리고 싶지 않나요?"(p152) 버나드가 레니나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야만인의 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멋진신세계

#올더스헉슬리

#소담출판사

#리딩투데이

#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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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머린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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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칠드런을 읽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칠드런의 속편 서브머린을 읽기 위해 펼치고 보니 인물도 내용도 너무 익숙하다. 넘기지 않아도 다음 내용을 알 것만 같고 그렇게 넘겼더니 역시나 내가 아는 그 내용이 맞는 지금 이 상황! 설마 나 칠드런을 읽었던 거야? 그런 거야? 러시 라이프 이외에는 20대 때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책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반갑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도 한 상태로 그럼에도 확신을 못가져서 결국 칠드런을 끝까지 다 읽고서야 서브머린을 펼쳤다. 어떻게 이 엉뚱한 청년 진나이를 잊었던건지 이해를 못하면서도 반갑고 정다운 마음에 가슴이 부푼다. 반갑다 친구야!!!!

영업 종료 직전에 은행을 방문해서는 왜 업무를 안봐주냐며 직원에게 진상을 부렸던 진나이. 결국 진나이의 이런 어깃장에 발목이 잡혀 친구 가모이까지 무장강도에게 붙들리게 된다. 간이 부은건지 간이 없는건지 영 감이 안잡히는 진나이 곁에서 처음에는 창피해서 나중에는 무서워서 가모이는 어쩔 줄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강도의 정면에 서서 가짜 총으로 뻥치지 말라며 덤비지를 않나 뜬금없이 자기 기타를 달라고 소리 지르지를 않나 난데없이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기까지 하니 이러다가 총맞을까봐 겁난 것이다. 좋게 보면 엉뚱발랄하고 나쁘게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의 중심은 나다! 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후안무치인데 어쩐 일인지 운도 따르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붙는진나이다. 친하지 않다며 온몸으로 진나이를 거부하면서도 내내 진나이에게 끌려다니는 가모이 뿐만 아니라 함께 은행인질로 활약했던(?) 시각장애인 나가세와 그의 여자친구 유코, 그리고 소년 조사관이 된 진나이의 후배 무토가 그렇다. 진나이 덕분이랄지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한 사건 사고에 끌려가는 이들의 앞에 펼쳐쳤던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고 특별한 소동이 서브머린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칠드런 이후 12년 만에 뭉친 진나이와 나가세, 유코, 무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진나이의 밑에서 갓 신입으로 업무를 시작했던 무토는 이제 두 아이의 아빠다. 진나이는 여전히 독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독신이려나? 다섯개의 단편 연작 소설로 엮어졌던 칠드런과는 달리 서브머린은 진나이와 무토가 소년조사관으로서 맡게 된 촉법 소년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칠드런 속의 단편이었던 칠드런, 칠드런 2가 깊이 있는 질문과 의견을 입고 한층 성장해 돌아온 느낌이랄까. 무면허 운전으로 사람을 죽인 다나오카 유마, 인터넷에서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댓글러들을 똑같이 협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험감찰 중인 오야마다 슌, 10년 전 졸음운전으로 등교길 초등학생을 치여죽였던 청년 와카바야시 등 야쿠마루 가쿠의 <천사의 나이프>나 고바야시 유카의 <저지먼트>와는 또다른 기운을 풍기는 소년범들이 등장한다. 어떤 소년은 입을 꾹 닫고 변명하길 거부하고 어떤 소년은 어른의 눈으로는 영 이해가 안가는 방식으로 사회를 도우며 또 어떤 소년은 반성하고 회개하며 매일 같이 과거를 사죄하는 삶을 산다. 그런 소년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싸잡아 거부하고 매도해도 좋은가 하고 무토가 묻고 진나이가 함께 답을 찾아가며 성장하는 소설이었다.

나를 포함해 소설 속의 많은 사람들이 촉법소년에게 분노한다. 저지른 죄에 비해 경미한 처벌을 받고 사회로 돌아오는 이들. 피해자들은 어쩌면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어린다는 이유로, 뭘 몰랐다는 이유로, 사실은 뭘 모르지도 않는다는 걸 그들도 알고 우리가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죄가 사해지는 것만 같은 현실 앞에서 화가 난다. 벌조차 가벼운데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마저 관대할 이유가 있는가, 이렇게 쉽고 용서하고 포용해도 되는건가 의문도 느낀다. 그 의문을 이해하면서도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자고 독자를 찬찬히 설득하는 책 같았다. 가정법원의 소년 조사관으로 살아가며 사회 속으로 소년소녀들을 돌려보낼 의무와 책임을 떠안은 진나이와 무토의 이야기는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답게 낭만적이고 감동적이며 동화 같고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촉법소년의 연령을 낮추고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지만 무거운 주제를 이만큼이나 술술 풀어간 이사카 코타로의 도전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진나이와 함께 한뼘 커진 그의 월드가 정말이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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