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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크 ㅣ 에프 그래픽 컬렉션
로리 할스 앤더슨 지음, 에밀리 캐럴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고등학생이 된 첫날이라고 해서 느끼는 설렘 같은 건 일절 없다. 멜린다는 왕따다. '머리 모양이 이상하고 옷은 촌스럽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 문제라고 남들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입학 전부터 멜린다의 왕따는 기정사실로 땅땅 아이들 사이에 판결이 나있었다. 16살, 8월의 여름 파티, 세 잔의 맥주, 훨씬 어른스럽고 빛이 나는 것만 같았던 고등학생 언니오빠들. 위축되고 주눅들어 있던 멜린다는 기꺼이 다가와 말을 걸어 준 앤디 에반스를 반기고 환영했다. 키스까지는 그래, 동의가 맞았다. 그 어른스러운 키스에 멜린다는 고등학생으로 대우받는 느낌이었고 존중받는 기분이었고 설렜다. 그러나 그 이상까지 허락한 건 아니었다. 멜린다는 폭력을 거부하지만 두려움에 꽉 막힌 목구멍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토해내질 못했다. 소리없는 아우성이 끝난 후 멜린다는 파티장으로 들어가 경찰에 신고한다. 혼비백산한 아이들 사이에 뒤섞여 16살의 어린애는 제가 겪은 일을 고발조차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달아난다. 파티에 온 모든 아이들이 멜린다의 신고를 알았다. 아이들은 멜린다를 관심 종자 정도로 해석했을지도 모르겠다. 멜린다가 앤디 에반스의 행위를 침묵했으므로. 누군가는 대입이 취소되었고 누군가는 알바에서 잘렸고 아마 파티의 주최자이자 인기인이었을 카일도 부모에게 꽤 혼이 났을테다. 아이들은 공공의 적으로 멜린다를 지목한다. 멜린다 또한 변명하지 않는다. 어쩌면 시간이, 모쪼록 자연스럽게 해결해주리라, 모든 것을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채기 하나 없이 낫게 하리라 믿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돌아섰다. 부모님은 이혼 직전에 다다라 매일 같이 싸우거나 서로에게 냉랭하다. 무엇보다 앤디 에반스, 그가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식당에서 교실에서 앤디 에반스를 보고 듣고 느낀다. 멜린다는 인어 공주처럼 목소리를 잃었다. 거품처럼 보글보글 사라지는 일 외에 멜린다가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은 없는 것만 같다.
청소년 장편 소설 스피크를 원작으로 한 그래픽 노블이다. 2003년 문예출판사가 번역 출간했지만 현재는 절판 상태. 그래픽 노블이 전성기를 맞으며 훌륭한 소설이 그림을 입고 또한 훌륭하게 독자들을 다시 만난 경우인데 그래픽 노블만 봐도 원작 소설 또한 얼마나 대단할지 대략 유추가 되었다. 3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학교에서 수업 교제로 쓰이고 있으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성폭력을 당한 다수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멜린다는 부당한 폭력 앞에 분노하면서도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못한다. 그는 남자고 덩치가 크고 힘이 세며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멜린다를 제압하고 새로운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존재다. 믿음직한 어른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멜린다는 파탄 직전의 부모에게 자신의 문제를 끼얹고 싶지 않다. 더 솔직히는 부모와 대면하는 일 자체가 그냥 싫다. 무엇보다 수치스러워서,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봐, 이미 겪은 고통이 큰데 또다른 비난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멜린다를 위축시킨다. 침묵이, 인내가, 약이 되어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없다. 역사 시간, 여성 참정권자에 관한 발표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멜린다가 낙제점을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보충수업을 받게 된 멜린다는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말하지 않았다고 날 처벌하다니 그게 대체 말이나 되나. 이건 불공평해."(p282) 하며 분노하지만 수업의 짝꿍인 데이빗 페트라키스는 말한다. "말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하지만 만약 여성 참정권론자들이 말을 안 했다면, 여자들은 아직도 투표를 못 했을지도 몰라. 네가 스스로 목소리를 안 내는데 어떻게 변화를 기대하겠어."(p284) 데이빗의 말은 아쉽게도 멜린다를 설득하지 못했지만 프리먼 선생님의 미술 수업이 있었기에 멜린다는 차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강의 첫시간 이곳이 생존방법을 가르치는 유일한 수업시간이라던 프리먼의 말이 멜린다에게만큼은 정답이었다. 멜린다는 주먹을 불끈 쥐고 목청을 크게 높여 앤디 에반스에 맞설 힘을 끌어낸다. 멜린다는 승리한다. 앤디 에반스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적어도 멜린다의 내일에는 앤디 에반스가 없을테니 멜린다는 안전하게 울 수 있다. 우선은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