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온 사람들 - 전쟁의 바다를 건너온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홍지흔 지음 / 책상통신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피난짐이 꾸려진다. 쇠고기 들어간 아침 떡국이 한김 식기도 전에 콰광, 쿵, 먼 하늘에서 포탄 소리가 들려온다. 경주의 고존 사촌 오빠가 화급히 뛰어와 소식을 준다. "곧 남쪽으로 내려갈 배가 들어온답니다. 당장 안 가면 큰일나요!"(p26) 이곳은 함경남도 흥남시 용흥리 1구. 후퇴하는 연합군의 배에 오르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하게 가족들을 챙겨 짐을 지고 나오던 어머니가 문을 걸어 잠그기 전 화급히 밥상머리를 짚는다. 가족들의 수저를 한손으로 휘이 감아 짐꾸러미에 챙겨넣었다. 어쩐 일인지 덩그러니 놓인 밥상이 마음에 걸려서. 그 장면에서 괜스레 코끝이 찡한 건 왜인지 모르겠다.

한 개 나라가 반쪽으로 나뉘어 총구를 들이밀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거나 젊은 장정들이 누구는 인민군이 되고 누구는 국군이 되어 영문도 모른 채로 적이 되었다. 경주의 오빠처럼 인민군 입대를 피해 다니며 변을 면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되었으랴. 날리는 눈발에 짐과 아이들을 이고지고 고향을 빠져나온 양민들이 사방 길을 채운 피난길. 두렵고 춥고 허기진 그 길 위에서 어느 집은 아이를 잃어버렸다. 어느 집은 총을 맞았다. 어느 집은 가장을 빼앗긴다. 먼데서 들려오던 총소리는 한층 가까워지고 생사의 기로에서는 슬퍼할 넉넉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아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도 온다. 부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기를 희망하며 어떻게든 살아있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길 재회할 내일을 찾아나선다. 그런 모든 혼란이 먹그림과 결이 곱고 다정한 만화 그림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험난한 전쟁사 읽다 보면 먹먹한데 와중에도 웃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아이들 때문이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경주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빅토리호의 귀환 사흘 이상으로 귓전을 환하게 만드는 기적이었다. 고향을 잃은 많은 피난민들이 더불어 이렇게 웃는 날이 꼭 왔으면 좋았을텐데.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한국전쟁의 흥남철수작전을 배경으로 작가 홍지흔의 가족이 실제로 겪은 일에 가상의 인물들을 설정하여 쓰여진 이야기다. 경주 가족이 일만 사천 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어떻게 오를 수 있었는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가족들과 어떻게 재회했는지, 흑백 같은 전쟁의 풍경을 뒤로하고 거제도에서 마주친 청보리 밭이 어떤 심상으로 다가왔는지, 애기 머리통만한 하얀 꽃이 맞아주던 거제도에서의 거짓말 같은 봄과 미래의 꿈을 차근차근 풀어간다. 한국전쟁 70주년. 길어야 삼 개월이면 끝나리라 예상하며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70년이 다되도록 떠나온 옛집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있다. 긴 세월 오래오래 기다려온 그들에게 소중한 옛집 그리운 얼굴들을 찾아주고 싶다고, 불행한 역사 속에서도 크고 작은 기적들을 일구며 살아온 민초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가능했음을 새삼 느끼며 감사하다고, 레너드 선장과 선원들에게 고마워 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홍지흔의 만화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강 머리 앤 그래픽노블
머라이어 마스든 지음, 브레나 섬러 그림, 황세림 옮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소녀가 기차를 타고 아담한 초록 마을 에이번리에 당도합니다. 초록 지붕집의 남매 매슈와 마릴라 커스버트씨가 집안일을 도울 아이를 구했기 때문이에요. 두 사람이 요청한 건 힘세고 튼튼한 사내아이였는데 간이역에서 매슈를 기다리는 건 수다쟁이 고아 소녀 앤. 매슈의 당혹스러움을 말해 무엇할까요. 수줍고 점잖은 매슈는 아이에게 어떤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고 조심스레 마차를 몰아 기쁨의 하얀 길과 빛나는 호수를 건너 초록 지붕집으로 앤을 데려갑니다. 다음 날 마릴라는 스펜서 부인을 방문해 오해를 풀고 앤을 보낼거라 호언장담 하며 집을 나섭니다. 초록 지붕 집에서 원한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앤도 그즈음에는 마음을 다잡고 얌전히 마릴라를 따라나서요. 심술궂은 블루엣 부인은 쌍둥이를 키운 적 있는 앤을 탐내지만요. 무뚝뚝해도 잔정이 많은 마릴라는 앤 같이 어린 여자아이가 블루엣 부인의 집에서 학대와 다름없는 노동을 하는 일이 탐탁치 않습니다. 결국 마음이 약해져 스펜서 부인댁에서 도로 앤을 데려오고 말지요. 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집 같은 집, 우리 집, 내 방이라 말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게 되요. 그리하여 마릴라에게 고백하지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장소를 사랑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전 그래요! 초록 지붕 집은 제 집이에요."(p47)

친구라고는 토마스 씨 댁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이름 붙인 수줍음 많은 케이티 모리스나 해먼드 씨 댁 강가의 메아리에게 이름 붙인 비올레타 뿐이었던 앤이 다이애나라는 절친을 사귑니다. 새옷을 받고 소풍을 가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학교를 다니고 다정한 친구들과 들판에 앉아 수다를 떨고 노래하는 일, 온통 처음인 일들이 초록 지붕과 그 문을 열고 나가 만나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 위에 가득 펼쳐져요. 책 속 가득한 앤의 설렘에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의 가슴까지 벅차더군요. 앤이 길버트의 머리에 석판을 깨부시는 명장면(?)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지도 궁금했는데요. 소설과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박진감 넘치는 화통한 장면은 여전하더군요. 제 머리가 다 아픈 느낌이었어요. 선생님의 말씀을 어겨 길버트의 옆자리에 않는 장면, 다이애나에게 딸기주스 대신 술을 먹여 배리부인에게 만남을 거절 당하는 에피소드, 케이크에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넣고, 조세핀 베리 여사가 잠든 침대에 다이애나와 함께 뛰어드는 순간, 가슴이 터질 듯이 긴장되던 학예회 발표날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게 표현되어 있었어요. 티비 만화로 또 소설로 다양하게 접하고 상상해왔던 앤이지만 그래픽노블의 삽화들은 또다른 예쁨! 이번 앤도 정말이지 좋았답니다.

고전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즐거움 중 하나는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된 다양한 판본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 같아요. 빨강 머리 앤만 해도 오디오북 앤, TV 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앤, 만화로 보는 세계명작애니메이션 앤, 초판본 앤, 앤 그림 에세이, 컬러링북, 다이어리북, 앤이 하는 말 등으로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거든요. 똑같은 내용이라도 표지와 삽화, 번역이 달라지면 앤을 읽는 맛도 달라져서 재독, 삼독, 오독을 멈추지 않고 거의 매년 앤을 만나오고 있는데요. 이번엔 생에 처음으로 그래픽노블 빨강 머리 앤을 만나 여태와는 정말 다른 느낌의 색다른 앤과 인사할 수 있었습니다. 머라이어 마스든 각색, 브레나 섬러 일러스트가 몽고메리의 원작을 거들었는데요. 원작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약간의 개성을 곁들여 앤을 만나는 즐거움을 더한 것 같아요. 원작소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뭐니뭐니해도 시간? 앤이 생각보다 두께가 있는 책이라 완독에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인데요. 그래픽노블은 만화책이다 보니 원작소설보다 읽는데 들어가는 시간적 공이 훨씬 덜하더라구요. 두 번째 차이점은 각색자의 취향에 따라 편집되다 보니 자잘하게 생략된 내용이 많다는 거? 다른 독자들은 원작의 어떤 점을 재미있게 느낄까 인상적으로 기억할까 궁금했던 적이 있는데요. 머라이어 마스든 각색을 읽으며 그 부분을 짚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저와 겹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그 차이를 찾아가며 읽는 게 재미났어요. 세 번째 차이점은 그림 작가 브레나 섬러가 앤의 옷에 다양한 색깔을 부여했다는 거였어요. 원작에서는 몇 벌 없는 옷이 다 단색으로 꾸려져있는데 그래픽노블의 앤은 분홍, 노랑, 하양, 하늘, 남색, 녹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거든요. 퍼프 소매의 옷은 여전히 매슈와 린드 부인의 합작품 딱 한 벌 뿐이지만요. 앤이 바라마지 않던 예쁜 색깔의 원피스들을 그래픽노블에서라도 맘껏 입게 되는 점이 저는 왠지 좋더라구요. 앤의 녹색 눈동자를 이번 그래픽 노블 때만큼 선명하게 인식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구요.

초록지붕 집과 앤, 매슈, 마릴라, 린드 부인, 다이애나, 그 밖의 에드워드 섬 이웃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즐거웠어요. 다른 판형으로 다른 역자님으로 다양한 출판사로 앤이 매번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 졸업반 때 맞닥뜨린 연이은 친구들의 죽음. 짝사랑하던 그녀 사토코와 함께 진실을 추적하던 가가가 어느 새 서른의 형사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잠자는 숲, 가가 형사 시리즈 그 두 번째 책은 소꿉친구가 사람을 죽였다는 전화를 받은 발레리나 미오의 두근두근 뛰는 심장소리로 시작을 합니다. 발레단 사무실에 침입한 강도. 가위를 쥐고 덤벼드는 놈을 저지하기 위해 하루코는 꽃병을 휘두릅니다. 어떨결에 맞은 한방에 강도는 즉사하고 이에 놀란 하루코 또한 덩달아 기절을 하며 몸싸움은 종결. 사건도 막을 내리는 것 같았죠. 단순 강도, 정당방위, 하루코가 휘두른 폭력의 당위만 입증된다면 아무런 처벌없이 풀려날, 형사들의 입장에선 좀 시시한 사건이었을까요? 가가는 사건이 금방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남자의 신원쯤 금방 찾아낼 줄 알았고 죽은자의 범행동기도 단순하리라 판단했던 겁니다. 그러나 좀체로 강도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신원을 간신히 찾아낸 후에도 남자와 발레단 사이에는 아무 접점이 없습니다. 목적이 돈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하루코와의 사적인 원한? 알고 보면 연인 사이? 치정과 발레단의 알력 등 여러 시각에서 사건을 쑤셔보지만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앞도 뒤도 깨끗하게 오리무중. 도통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둔 가가에게 날아든 두 번째 소식은 연출가 가지타가 공연 준비 중 니코틴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거였습니다. 단순 강도 사건이 어째서 발레단 내 연쇄 살인사건으로 확장될 기미를 보이는가? 예상치 못한 전개로 수사는 미궁에 빠지지만 독자인 저의 관심은 사실 온통 한군데로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바로바로 가가 형사의 사랑!! 가가가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가가 형사 시리즈 제 1권 졸업이 가가의 난데없는 고백으로 포문을 열었던 거 기억하십니까? 너를 좋아해, 결혼해줬으면 좋겠어, 고백은 맞지만 프로포즈는 아니고 내 의사를 표현한 것 뿐이니까 딱히 신경은 쓰지 마라. 이게 말이야 방구야 싶었던 그 고백!! 둘이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소설이 끝났었는데 알고 보니 설월화 살인 게임 후에 사토코랑 잠시 연애를 했던가 봅니다. 현재는 남남이 되어 일년에 한두번씩 연하장이나 주고 받는 그런 사이가 되었는데 짝 없이 독야청청하는 가가 때문에 주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버지나 주변의 성토로 마지못해 선도 보는.. 출간년도는 알 수 없지만 그래요. 서른이면 벌써 노총각 취급받던 그런 시절도 있었더랬죠. 가가의 아버지는 경찰인 네가 어디 가서 여자를 만나겠냐고 걱정이 태산 같지만 훗훗훗, 가가는 마음에 쏙 드는 여자를 다름아닌 수사 중에 만나게 됩니다. 미오, 소설의 문을 연 아리따운 발레리나이자 하루코의 가장 친한 친구이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플로리나 공주역을 맡은 아가씨. 눈치가 바닥인 독자도 위험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어떤 전조들을 가득 품고 있는 이 여인 곁에서 가가가 안절부절 못하더군요. 어쩌려고 수사 대상을!! 가가가 정신줄 놓을까봐 조마조마한 와중에도 이 의심스런 여인을 이리저리 챙기고 농담을 건내고 설레어 하며 폴짝폴짝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너무너무 웃긴겁니다. 제가 가가 형사 시리즈를 1권부터 차례대로 읽었으면 이런 느낌이 없었을텐데 어쩌다보니 역순으로 읽어서 중간권 <악의>와 완결권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먼저 읽지 않았겠습니까. 성숙하다 못해 좀 노회하고 까끄러운 가가에 익숙하다 보니 솜털 시절의 가가의 연애사는 암만봐도 어색하고 얼레리 꼴레리 놀리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든단 말이죠. 그게 싫었냐 하면 아니요. 무지무지 즐겁고 재미났어요 ㅎㅎㅎ

잠자는 숲이 특히나 좋았던 점은요. 발레라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내용들 그러니까 발레리나들의 잔인한 질투심, 경쟁으로 인한 아귀다툼, 보는 독자마저 숨막히게 하는 체중압박 등등의 상투성, 전형성에서 꽤 동떨어져있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훈훈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사건의 비밀과 결말을 앞에 놓고 제가 떠올린 작품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을 정도니까 말 다했죠. 이전에도 가가가 좋았지만 잠자는 숲의 가가는 더욱 좋더군요. 3권인 악의는 이미 읽은 책이지만 2권 관련하여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 재독도 하려고 합니다. 가가 형사의 사랑이 악의에서도 등장을 했던가 안했던가 눈을 빛내며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왜 형사 소설에서 로맨스를 찾고 있는가 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독자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5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4월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9권 여행자의 죽음을 읽었는데요. 10-14권을 껑충 뛰어 15권 중독자의 죽음으로 곧장 몸을 던지는 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괜찮냐구요?? 넵! 괜찮습니다!! 코지코지한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해미시와 프리실라의 사랑 외에는 줄거리가 이어지는 부분이 없거든요. 매권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 독립적으로 벌어져서 해결되기 때문에 꼭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의외였던건요. 9권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약혼했다는 기사까지 나서 소동이 벌어졌던 해미시와 프리실라의 꽁냥꽁냥함을 정말 1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거에요. 꽁냥은 커녕 아웅다웅조차 없습니다. 프리실라 등장 제로. 뭣때문에 헤어졌는지 알 순 없지만 대충 보니 해미시가 순경으로 강등 당한데에 어떤 원인이 있지 않을까 추측 중이에요. 권력욕도 명예욕도 없이 시골 순경으로 느긋하게 살고 싶은 해미시와 야망있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프리실라의 취향 사이엔 허물기 쉽지 않은 벽이 내내 존재했으니까요. 호텔일도 접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만 같은 프리실라의 행방이 궁금합니다. 살인사건만큼이나 중요한 두 사람의 애정사는 이쯤해서 접어두고요. 스코틀랜드 최북단 조용하고 폐쇄적인 마을 로흐두에서 이번에는 또 누가 살해당했는지 살펴봐야 되겠죠?

로흐두 마을의 주민이자 해미시의 친구이기도 한 패리 맥스포런은 세 채의 스위스 농가풍 별장을 임대 중입니다. 별장 한 곳엔 지구 온난화를 걱정 중인 불품없이 마른 몸에 가냘픈 목소리의 펄리시티 먼디가 살고 있고요. 다른 한 별장엔 마약 중독자였다가 이제는 갱생하고 자서전을 쓰고 있는 토머스 재릿이 살고 있어요. 엑스터시와 마리화나를 소지하고 밀매 혐의도 받은 적이 있었던 그를 패리 맥스포런은 곧장 내쫓으려하지만요. 눈썰미 좋은 해미시는 토미라는 친구가 이제는 괜찮아 보이지 않느냐며 한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합니다. 설마하니 그 청년이 며칠 후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한 채 발견될 줄을 꿈에도 모르고 말이지요.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의 팬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해미시 눈이 어디 보통 눈이던가요. 저 놈 죽겠구나 하면 꼼짝마라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마는데 이번엔 전혀 감도 잡지 못했단 말이죠. 본청의 경찰들은 마약하는 놈이 죽은건데 무에 그리 신경쓸게 있냐며 쳐다도 보지 않지만요. 해미시는 암만 해도 이번 사건이 찜찜합니다. 스스로의 감을 믿고 홀로 독자적인 수사를 해내가던 해미시는 얼떨결에 사이비 종교회에 잠입수사를 하고요. 세계적인 마약상과 독대를 하며 마약을 주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처음으로 스코틀랜드를 벗어나 강철팬티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답지만 냉혹한 올리비아 체이터 경감과 해외 출장도 나가는 해미시. 그의 운과 감은 타국 독일에서도 뿌듯하게 먹혔을까요?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중 스케일로만 따지자면 역대 최고이지만 해미시가 창녀에게 홀랑 넘어가는 등 마음 아픈(?) 장면들이 계속해 등장하며 제 속을 썩입니다. 순박하고 능청스럽고 의외로 인기가 많지만 그럼에도 프리실라만 아는 그런 순정남 해미시는 사라지고 창녀 사건으로 흑흑흑 처량하게 울며 후회하다가 다시 체이터 경감과 동거(?)하며 프로포즈를 하는 등 캐릭터가 성숙해졌달지ㅠㅠ 방탕해졌달지ㅠㅠ 그렇다고 성격이 바뀌거나 한 건 아닌데 해미시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자꾸만 벌여서 쿠크다스 맨탈 독자는 바사삭 부서질 지경이었어요. 이혼한 화가, 연상의 요리사 누님 등 그간 맘 준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어도 한 권에서 두 명의 여성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싶습니다. 아참! 저 10권에서 14권은 안읽었죠?? 그럼 한 두권쯤은 더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해미시의 화끈한(?) 변심이 있었던만큼 무척 재밌었지만 이 해미시는 내 해미시가 아닙니다. 프리실라 어디 간 거에요? 두 사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에요? 프리실라와 해미시 이대로 정말 끝인건가요? 제발, 얼른, 부디, 빨리빨리 돌아와 해미시 꽉꽉 잡아주십셔! 뒷권 읽고 궁금해 담주엔 앞권으로 달려가게 생겼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테 - 내세에서 현세로, 궁극의 구원을 향한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 19
박상진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5월
평점 :
일시품절


민음사의 신곡을 번역한 박상진 교수가 단테의 흔적을 쫓아 이탈리아에 갔다. 지옥과 연옥과 천국편에 남은 단테 생의 발자취를 찾아 흘러가는 이야기는 방탕한 작가, 이를테면 알콜중독에 가정폭력범이었던 레이먼드 카버편처럼 자극적이거나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방랑의 작가이자 은둔의 작가였으며 시인이기 이전에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탓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다 좀 딱딱하달까. 신곡을 읽기에 앞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마중물로 부으면 딱 좋을 책이다 싶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눈부시게 성장 중인 피렌체에서 태어나 도시의 시민으로서의 큰 자부심을 안고 살았던 단테. 공직자로 부임해 시에 공헌하고 기병대로 전쟁에 참여하는 등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명성을 높였다. 그러나 단테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던 당시의 피렌체는 교황권과 황제권의 다툼이 살벌했고 황제의 손을 들어 교황의 야심을 저지하고자했던 단테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의 끊임없는 충돌로 결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차 재판 때는 추방이, 추가 선고 때는 화형을 언도받았기에 결코 피렌체로는 귀환할 수 없었던 단테, 그 길 위에서 단테는 생에 새로운 길을 내듯 신곡을 쓰기 시작했다.

 

지성의 상징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단테가 지옥을 도는 동안에 그의 육체는 카센티노의 어두운 숲자락을 지나 파도바에 머물렀다가 다시 카센티노의 숲으로, 베로나로, 라벤나로 향한다. 두어 차례 피레네 복귀를 희망하며 일을 도모하기는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피렌체는 재차 사형을 언도하며 단테뿐 아니라 단테 자식들까지 죽이겠다는 으름장을 놓는다.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모두 용서해주겠다는데 단테가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니 아무래도 괘씸죄가 적용된 게 아닐까 싶다. 사후 7년 째엔 이단으로 선포됐다. 추기경은 단테의 뼈까지 태워 재로 날려버리겠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성경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800종의 필사본을 지닌 베스트셀러 작가의 유해를 도시 라벤나도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의 유해를 가져가려는 피렌체와 다퉈가며 몇 백년에 걸친 숨바꼭질을 벌이고 700년 넘게 유해를 지킨다. 단테를 품으려는 도시들의 신경전이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단테는 아주아주 오래 전의 사람이다. 1265년에 태어난 작가다 했을 적엔 솔직히 감이 잘 안잡혔다. 1547년생 세르반테스나 1564년생 셰익스피어보다 삼백 년쯤 더 선배 작가인 걸 알고는 조금 놀랐다. 르네상스 시대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가 라벤나에 묻힌 단테의 유해와 유물을 피렌체로 옮겨달라는 탄원서에 이름을 썼다는 구절에 가서야 아주아주 정말로 먼 옛날의 작가라는게 피부에 와닿았다. 그때가 1519년, 날짜는 정확하지 않다지만 단테가 사망한 1321년보다 벌써 이백 년쯤 지난 날의 일이었다. 중세를 대표하는 작가인데 어째서 앞서 두 작가보다 더 젊게 느껴지는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햄릿보다 돈키호테보다 더 옛날의 책을 내가 읽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뿌듯하기도 하고. 연옥편 앞에서 멈춤 상태이긴 하지만 지옥편 한권만은 다 읽었으니까.

 

중심 얘기는 아니었지만 곁가지에서 더 재미난 에피소드를 많이 발견했다. 이야기 1. 단테는 약제사 길드의 길드원(?)이었다. 약제로서의 지식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인데 약국에서도 책을 팔았던 시절이라 길드에서 단테와 같은 지식인들을 환영했다고 한다. 약국에서 단테에게 책을 처방받은 독자도 있었을까? 2.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상징하는 인물이 다름아닌 단테다. 생각하는 사람보다 앞서 제작된 작품 "지옥의 문에서 바윗돌에 앉아 발끝에 힘을 주고 지옥 풍경을 내려다보며 고뇌하는 단테를 똑 떼어와 따로 제작한 거였다. 3. 단테를 천국으로 이끌었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와는 실제로 연인 사이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생에 마주친 것도 딱 두 번 뿐이었다(고 단테는 쓰고 있다. 아홉 살, 열여덟 살, 그것도 길에서;;). 반면 결혼까지해서 자식들을 낳아 키우고 함께 망명길에 오른 아내에 관해서는 단 한 구절도 글로 남긴 것이 없단다. 4. 1519년부터 1865년까지 단테의 유해는 단테의 무덤 안에 없었다. 사람들은 빈 묘지에 가서 그를 추모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