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 - 김주영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5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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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다 보니 홍어가 내가 읽은 한국문학 중 제일 여러번 회차를 돌린 책이 되었다. 학생 때 빨간 양장 표지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본 후 머리속에 남은 이미지라고는 온통 북어포를 빨아먹는 아이뿐이었다. 이가 났는지 안났는지 기억은 없는데 칭얼일 때마다 아이 입에 물려지는 북어포가 나달나달해지던 광경이 꼭 내가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했다. 삼키지도 않고 내도록 핥아먹는 것을 두고 아이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지난한 과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구절이 마음에 남았던 듯도 하고. 문이당의 책을 중고로 사들여 다시 읽은 것이 지난 16년의 가을이었는데 꼬박 4년 만에 문동네 한국문학전집으로 다시 만나며 처음도 아닌데 뭐 얼마나 새로우랴 싶었다. 표지를 들추고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모조리, 철저하게 새로워 새삼 감탄했다. 아무렴. 내 기억력에 어디 쓸만한 구석이 있을 리가 없지;;

길안댁의 남편이자 세영이의 아버지 되는 작자는 참으로 한심한 인사다. 서방 있는 춘일옥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가 그 남편에게 들켰으니 잡히면 뼈도 못추릴 지경이 되어 걸음아 날살려라 내빼버렸다. 이후 동네 모든 우사와 수치는 길안댁의 차지가 되었음이니 나 같으면 쌓일대로 쌓인 분노와 원망이 오뉴월 대설주의보를 날리고도 남았을텐데 이 쑥맥 같은 여인은 이제나 저제나 집 떠난 가장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남편이 좋았했던 홍어포 한 마리를 부엌 문설주에 매어둔다. 친정에서 보내온 과일조차 염치 없다며 돌려보내는 성품에 옆집 사내와 내외한다고 한 마당 안에도 안서는 모습 등이 한때는 참 한심하게 읽히기도 했다. 세영이 또한 "어머니의 그 진부한 고독과 지나친 불행은, 사람들이 고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으리란 착각 속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p213)거나 어머니의 삶에 대해 "어머니 자신이 과장되게 만들어온 굴레"(p212)라는 생각을 내비치곤 했는데 삼회차쯤 되서 그런가 이번엔 소설이 좀 다르게 읽힌다. 그만한 착각조차 없었다면 길안댁은 가슴앓이 정도가 아니라 생병이 나 죽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결벽한 사람이요 실은 아주 겁도 많은 사람이었다. 세영의 부친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일생 변화가 없을 것만 같던 모자의 삶에 벼락이 내린 것은 어느 눈 내린 아침이었다. 펑펑 내린 눈이 집 밖을 모조리 둘러 싸다 못해 문까지 막아버린 그 날 부엌 아궁이 앞엔 낯도 모르는 손님이 코를 드르렁 골며 잠들어 있었다. 부모도 모른다 이름도 모른다 고향도 없다 하며 하늘 아래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처녀 아이였다. 길안댁은 12월 3일에 집안에 든 아이의 이름을 삼례라 고쳐 부르며 심부름 하는 아이로 발을 묶는다.

삼례의 등장은 모자에게 "호기심의 뇌관에다 불을 댕길 충분한 폭발력"(p34)이었고,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면 눈 위에 오줌이라도 갈겨야 속이 시원한"(p165) 반항심으로 놀랍게 다가왔다. 길안댁이 그리도 찾던 염치마저 잊고서 "날개를 달고 내 맘대로 휘젓고 다니고 싶은"(p165) 욕망을 들깨우게 했으며, "어디론가 간다는 일이 절벽과 마주친 것처럼 아득하고 막막하기만한"(p76) 모자의 눈 앞에 길을 닦고 이정표를 세워준다. 집 나간 남편의 새여자가 찾아오고 그 여자가 버리고 간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키우던 얌전스럽던 사람이,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동네를 가로질러 벽지를 사다 나르고 담벼락을 높이 세우던 사람이, 남편을 마중 가며 물옷 한복을 꺼내입고 새하얀 고무신을 신으며 얼굴에 홍조까지 피우던 그 길안댁이 남편이 돌아온 다음 날로 집을 나가버린 연유의 기미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세 번이나 읽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그럼에도 집을 떠나 어디론가 간다하는 그 확고한 행위에 대해서는 무작정 응원한다. 어쩌다 보니 길안댁이 중심이 된 리뷰를 써버렸는데 그밖으로도 매력이 많은 작품이다. 세영의 눈에 비치는 여러 환영들, 홍어포가 가오리연이 되어 헤엄치고 알몸의 삼례가 꿈결처럼 다가왔다 멀어지고 눈 위로 달빛이 무더기로 녹아내리고 어머니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날개가 돋아나고 세영 자신이 콘도르가 되어 눈의 궁전까지 저 보석같이 빛나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 같은 것들이 마법 같은 기운을 불러일으키며 환상성을 더한다. 도통 어디 사투리인지 감을 못잡았는데 작가님이 경북 청송 출신이셨다. 같은 경상도라 읽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구나 싶으면서도 나 사는 곳의 사투리와는 앵간히 다른 느낌인 것도 놀랍고 재미있다. (이전에는 어디 사투리인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읽었나보다. 찾아볼 생각도 안할 걸 보면;) 세 번을 읽어도 좋았고 아마 네 번도 꼭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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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 바로 지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클래식 클라우드 22
정여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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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아르테 출판사에서 <헤세로 가는 길>을 출간한 정여울 작가가

2020년 다시 아르테 출판사에서 <헤세>를 출간했다.

한번 맵을 개방해두니 헤세로 가는 길에 더 많은 경로가 생기는가 보다.

"헤세와 함께하는 시간은 아무런 해가 없는 진정제를 투여받는 시간이었다."(p13)

헤세 덕후 정여울의 진면목을 본 느낌?

헤세의 고향을 방문한 작가는 헤세의 흔적들을 마주하며 헤세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감상을 들려준다.

남편, 아버지, 연인으로는 너무나 부족했던 헤세의 인간적인 면모들.

2차세계대전 조국의 의사에 반대했다 작품 출간을 저지 당하고 매국노라고 비난받던 일.

짝사랑에 실패해 자살하려 하거나 정신요양원에서 생활했던 이력.

신학교에서 또 김나지움에서 퇴학해 걸어야 했던 독학자의 길.

자연과 뗄 수 없었던 삶.

인생의 마지막 항로까지로 열정도 재능도 노력도 부족하지 않았던 작가로서의 인생.

이 모든 것이 담긴 작품들을 정여울의 목소리로 소개 받으니 헤세가 다시 보인다.

실상 나한테는 헤세가 그리 매력적인 작가는 아니었던 탓에 읽은 작품도 몇 없다.

다만 데미안만은 출판사를 바꿔가며 세 번쯤 읽었다.

(중간에 한번은 읽다 접은거라 횟수로 쳐야하나 말아야 하나 살짝 고민;;)

첫 완독은 고등학생 시절에 뒤에 두 번은 첫 완독 때의 감동을 떠올리고 싶은 마음으로 성인이 되어 만났다.

읽을 때마다 감흥이 떨어져서 내가 나이 먹었다는 걸 알겠더라.

겉은 어른이지만 속은 아직 어린 그때랑 똑같다며 나도 "어른이" 라 되내곤 했는데 감수성만을 놓고 까발려보니

물욕만 "어른이"였을 뿐 결코 그 때 그 감성으론 책이 읽히지가 않아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앞으로 더는 데미안을 읽지 않으리라 했는데 어쩌다 보니 헤세와는 더 잦은 만남을 가져서

올봄에는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여름엔 정여울 작가가 쓴 클래식 클라우드 헤세를 읽는다.

이 기세면 가을겨울에도 꼭 헤세를 만나야 할 것 같은데 헤세의 책 중 페이지 적은 책들로 한번 들여다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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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토월 - 이문구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4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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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사투리가 아주 본격적인 책입니다. 경상도, 전라도, 간도, 이북 몇 몇 지역의 사투리는 여러 소설로 이차저차 접해봤는데 충청도는 난생 처음인 것 같아요. 백종원씨가 티비에 자주 등장하면서 저도 이랬슈 저랬쥬 하며 충청도 사투리를 좋아라 하고 또 익숙해졌다고도 생각했는데요. 아이쿠야 이문구 작가의 글들로 접한 해방 이후의 충청도 사투리는 외국어 뺨치게 낯설더라구요. 충청도 식으로 표현하자면 기가리가 맥혀서 이걸 어뜨케 읽나 할 지경이었는데 신기한 건요. 그래도 한국어라고 읽다 보니 어느 순간 눈이 트이고 말이 입에 붙어오더라구요. 사투리의 문장 속에서 음률이 느껴지고 뜻이 깨이면서 말들이 자박하게 밟히는 순간의 그 쾌감! 재미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는데 중반 어디쯤부터였는지 까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솔까 이야기가 그 자체로 구성지다 할 것은 없었는데 사투리가 정겹고 말맛이 좋아서 이문구의 작품 속에 답싹 빠졌슈!!

<암소>

패리로(8.15)와 육니오 사비언이 끝나고 때는 박정희 정권 시절. 황구만씨 댁에서 머슴살이 하던 선출이가 한푼두푼 모은 돈 8만원을 뭘 믿고 그랬는지 황구만씨 사업자금으로 대어줬지 뭡니까. 소창직 직조 사업을 시작하며 초반 바짝 벌 적에는 선출이한테 빌린 원금에 이자까지 따북 따북 갚겠구나 했는데 웬걸요. 근방에 들어온 공장에서 까시미룡을 만들면서 기저귀 감으로 밖에는 쓰일 일 없는 소창 공장은 쫄딱 망하고야 말았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농민을 살리겠다는 명목 하에 고리채 신고를 받았는데요. 시책의 의의는 참말 좋은데 황구만씨 영악하게 선출이 돈을 고리채로 신고해 버려요. 그 집서 머슴살던 선출이 입장에서는 코가 막히고 눈물이 주륵주륵 흐를 일이었쥬. 제대 후 배째라 들눕으니 양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 황구만씨가 암소를 한 마리 키워 그놈 팔은 값으로 빚을 갚겠다 계약서를 썼습지요. 저노므리 암소만 갖다 팔면 눈이 까아만 신실이 손 붙들고 서울 가서 한번 제대로 살아보리라 작정을 한 선출이. 아침부터 밤중까지 갖은 정성으로 키운 암소는 식구나 매한가지인데 차마 어찌 파나 싶어 하루이틀 어떻게든 수를 써서 암소를 붙들려는 황구만씨의 티키타카가 글케 재미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단박에 그 재미를 느꼈던 것은 아니고 이 책 끝까지 읽고 처음으로 돌아와 재독하며 알았네유. 처음엔 뭔 말이유..사투리 모르겠슈.. 울면서 읽었음을 고백합니다ㅋㅋㅋ

<일락서산>, <행운유수>, <녹수청산>, <공산토월>

네 편의 단편소설인데 관촌수필이라는 부제가 동일하게 붙어있습니다. 읽다보니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1인칭 주인공 시점에다 동일한 배경, 시대, 등장인물들 때문에 연작 수필만 같았거든요. 다 읽은 지금도 이게 소설이야 수필이야 헷갈리는데 작품해설을 읽을까 하다가 정답을 알고 싶지 않아 패스합니다. 고대광실 높은 집은 아니어도 체통있는 양반댁으로 고풍스러웠던 집 안팎의 풍경. "할아버지 대가리는 잠지 달렸대..." 하고 놀리면 고놈고놈 하면서도 벽장문을 열어 은수저 휘어지게 엿단지 엿을 돌돌 말아 주던 주인공 "나"의 상투 튼 할아버지.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이웃 혼사날 벌였던 춤사위와 노래. 모친이 옹기 사이에서 낳았다고 옹젬이라 불렸던 식모 옹점이.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어 잡혀가고 말았지만 어린 시절만 해도 주인공의 큰형 노릇을 제대로 했던 대복이와 섬아가씨랑 결혼하며 이냥저냥 잘 살면 좋았을 것을 남로당이었던 주인공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여러번 고초를 치르고 기어이 백혈병까지 걸린 석공 등 잊지 못할 이웃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시골의 풍경들이 정답고 따숩지만 마음 아픈 그 시절 이웃들의 이야기, 우리네 역사가 마음 아프기도 합니다.

개그집인가 싶게 웃겨서 뻘하게 터졌던 <우리 동네 김씨> <우리 동네 이씨>, 관촌수필이라는 부제는 붙어있지 않지만 관촌수필과 같은 배경, 인물이 또다시 등장하는 <명천유사> <유자소전>, <암소>와 함께 드물게 소설 같이 읽혔던 (다른 작품들은 소설 같지가 않았슈) 장동리 싸리나무 등 모든 작품이 다 기억에 남습니다. 경상도는 말이 짧고 톡톡 쏘는 맛이 있다면 충청도는 감치고 능치면서 굴러가는 맛이 참말 좋았어요. 인물도 이야기도 하나 같이 수더분허니 정이 갑니다. 충청도 사투리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암만 읽는 게 좀 고역일 작품이긴 한데 저는 그래도 추천할랍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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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식당 (특별판)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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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독특한 책이에요.

청소년 소설로 2018년에 출간된 책인데 소설의 인기가 좋아

성인판으로 내용 보강을 해서 2020년에 특별판을 냈지 뭐에요.

성인판이라는 말에 19금을 생각한 나야 반성해~ ㅎㅎ

15세 왕도영과 42세의 이민석.

아무 친분도 없는 두 사람이 우연처럼 한날한시에 저승길에 올라

천년 묵은 구미호 서호를 만나 제안을 받습니다.

이승에서의 사십구일의 시간을 보장받는 댓가로 뜨거운 피 한모금을 달라!

배다른 형과 할머니의 손에 크면서 갖은 고초를 겪은 도영이는 이승에 아무 미련이 없지만요.

누군가를 꼬옥 만나야만 하는, 죽기 진전에도 누군가를 미행 중이었다는 민석은,

덥석 서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무슨 심보인지 서호의 제안에 무관심한 도영이까지 애걸복걸 붙잡은 채로 말이죠.

부모가 봐도 못알아볼 새얼굴(아주 시체같은 모양새)로 변신한 채

서호가 지정한 장소, 구미호 식당에서 사십구일을 보내야만 하는 두 사람.

간절히 만나고픈 누군가를 찾기 위해 셰프인 민석과 조수로 분한 도영이는

공짜 밥까지 풀면서 3백만원의 상금을 내건 이벤트를 개최합니다.

"구미호 식당의 대표 음식인 크림말랑의 재료는 무엇일까요?

크림말랑 재료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직접 찾아나설 계획입니다."

먹는 순간 온몸에 온기가 돌고 얼큰하고 속이 확 풀린다는 따뜻한 국물요리 크림말랑!

뽀얀 국물의 비밀 재료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또는 그녀를 애타게 찾는 민석의 비밀은??

만나고픈 사람도 없고 누군가와 풀어야 할 감정도 없다고 확신하는 도영.

도영의 마음도 도영의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었을까요??

구미호 식당을 찾는 손님들과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풀려가는 수수께끼!!

일견 황당하고 일견 화도 나는 숨은 이야기들 속에서

사랑에 대해 깨달아가며 씩씩하게 성장하는 두 사람이 대견합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을 얻는 출발점에 섰을 때 죽음이라는 것도 함께 얻어.

더불어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도 같이 얻지.

살아가며 행복과 불행,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오로지 자신들의 몫이야.

제대로 살면 행복하지.

제대로 산다는 것은 후회하지 않는 삶이지.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마음을 열고 살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어."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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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 -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 클래식 클라우드 21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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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영화로 봤는데 내용이 뭐였는지 모르겠어요. 명화 속 진주 귀고리 소녀와 영화의 스칼렛이 닮았다며 박수를 짤짤 친 기억하고 배경이 어두컴컴해서 갑갑했던 기억만 또렷또렷 합니다. 알고 보니 그 귀걸이가 진주가 아니라 유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클래식 클라우드 021번 전원경 작가의 페르메이르를 읽으며 영화 내용을 떠올리려 머리를 쥐어짜다가 가소로와 포기했어요. 제 머리 수준을 제가 아는데 이 정도 짠다고 떠오를 리가 없거든요. 췟 ㅡ.,ㅡ 페르메이르 뒷부분에 등장한 영화 내용이 처음인냥 생소해서 선별적 기억상실도 의심 중입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낯설 수가 있냐구요. 췟췟췟ㅡ"ㅡ

고흐, 렘브란트와 더불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명인 페르메이르. 앞서 두 사람에 비해 페르메이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오죽하면 페르메이르 기념관 앞에 붙어 있는 대리석 명판에 쓰여 있는 글귀가 "얀 페르메이르 1632년 이 자리에 있던 건물에서 태어났다"(p93)일 정도래요. 저처럼 뭔데뭔데? 뭐가 잘못됐어? 의문을 느끼실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페르메이르의 이름은 얀이 아닌 "요하네스" 입니다. 이 명판은 195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화가의 고향 사람들이 화가의 이름이 얀인지 요하네스인지 헷갈려할 정도로 페르메이르는 오래도록 베일에 가려진 화가였다고 해요.

1632년에 태어나 20년 남짓 화가 생활을 한 후 1675년에 사망한 페르메이르는 아내인 카타리나와 결혼하며 카톨릭으로 개종했는데요. 초반 종교화에 손댄 적도 있지만 이후 뚜쟁이, 진주 귀고리 소녀, 델프트 풍경, 편지를 읽는 여자 등의 명작을 남기며 풍속화가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페르메이르는 든든한 후원자와 자산이 넉넉한 처가의 도움으로 삼십대까지는 넉넉한 중산층 화가로 평온한 삶을 영위합니다. 그의 작품 속 유명한 파랑, 건드리면 바삭바삭 쏟아져내릴 것만 같은 푸른빛은, 당시 금보다 비싼 라피스라줄리(청금석)을 갈아서 만든 색이라고 하니 화가의 넉넉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예상이 되요. 17세기 네덜란드, 예술이 꽃피는 황금시대에 태어나 재능 넘치는 화가들과 자유롭게 경쟁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던 그는 1672년 네덜란드의 국가적 재난 프랑스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파산 지경에 이릅니다. 빵을 사지 못해 그림을 사주던 빵장수 고객에게 2년여 외상 빵을 져야했고 그 와중에 자식은 열명이나 됐으니 (당시 네덜란드 가정의 평균 자녀수는 넷) 정신적 압박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분명한건 40대의 건강한 남성이 부지불식간에 쓰러져 사망할 정도로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는 거에요.

사후 유럽과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는 거의 2백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립니다. (3백년인가? 급 헷갈려요ㅠㅠ) 36점 정도에 불과한 그의 그림들은 그 사이 다른 화가의 그림으로 알려지기도 하고 후대 화가에 의해 덧칠되어 훼손도 되고 도난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되는데요. 그중 페르메이르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메이헤런 한 판에 의해 벌어집니다. BBC에서 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기꾼 1위(2008년)에 빛나는 메이헤른은 위작을 아주 목숨 걸고 판매하는데요. 다섯점의 작품,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는 매우 희귀한 종교화들을, 전문가들에게 공인 받아 나치 정권의 2인자 헤르만 괴링에게 넘겨요. 나치에게 국가의 보물과도 같은 그림들을 팔아넘겼으니 네덜란드 사법 당국이 그를 가만뒀겠습니까.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체포하는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사기! 황당한 한편으로 네덜란드 국민들 입장에서는 통쾌한 일이었겠다 싶더라구요. 메이헤런은 직접 그림들을 그려서 나치 부역의 혐의는 벗지만 사기죄로 형을 살다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해요. 읽으면서 엠사 서프라이즈 쀨의 사건이다!! 싶었는데 진짜로 서프라이즈에 나왔더라구요 ㅋㅋㅋ

진주 귀고리 소녀 외에는 아는 작품이 단 한점도 없었던 페르메이르의 여러 그림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습니다. 많지 않은 기록에 기대어 페르메이르를 풀어나가야 하는 전원경 작가님의 고초가 느껴졌는데 대신이랄지 본인의 이야기를 많은 부분 화가의 그림과 함께 풀어 잔잔하게 읽는 재미를 더했어요. 350년의 시간을 통과해 거장 페르메이르와 마주하는 시간,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 여행도 대만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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