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흰 토끼 블랙 라벨 클럽 29
명윤 지음 / 디앤씨북스(D&CBooks)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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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Wonderland!!"

루이스 캐롤의 원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한국 작가 명윤의 손을 거쳐 로맨스 판타지로 재탄생했다. 주인공은 한국인 대학생 소윤. 그녀의 남자친구를 짝사랑하는 가현에 의해 칼에 찔린 소윤은 판타지 소설 [원더랜드] 속 세상에서 깨어난다. 137번째 차원이동자로 국가 실험체가 되어 개조 당하던 어느 날 아웃랜드를 탈출해 원더랜드로 피신하게 된 소윤은  코커스 레이스로 기존 흰토끼를 살해한 후 자신이 흰토끼의 자리를 차지하며 원더랜드의 주민이 된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앨리스가 나타나 소설을 빠르게 완결내어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 원작의 흰토끼처럼 소윤 또한 앨리스의 안내자를 자청하며 극의 빠른 전개를 도우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방해하는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는데 그들은 바로 앨리스의 남자들이 되어야 할 인물들인 하트와 매드해터 그리고 트윈스 형제였다. 치유의 힘을 지닌 맑고 아름다운 영혼 앨리스에 감화되어야 할 남자들이 어쩐 일인지 앨리스가 아닌 흰토끼 소윤의 곁을 맴돌며 구애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예상 밖의 국면으로 꼬이는 듯 하지만..... 안꼬이면 그게 로맨스냐? 라고 말하듯 그 와중에도 거침없이 사랑하고 갈구하며 장르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 이틀 밤의 내 시간이 흡혈귀처럼 빨아 먹혀 제대로 유혹 당해 버렸다. 재미있다. 무척. 아주 많이.

"저놈의 목을 쳐라!"고 외치며 앨리스와 대적하던 붉은 여왕은 적의 목을 자르는 걸 즐기는 살인광이자 원더랜드의 지배자인 하트로. 찻잔과 모자에 집착하며 앨리스에 조력하던 미친 모자장수는 강인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 매드해터로. 대머리의 딸땅막한 난장이 트위들 디와 트위들 덤은 한 몸 속 이중인격 사이코패스 통칭 트윈스로. 흰토끼로 불리는 소윤은 마치 레지던트 이블의 주인공 앨리스처럼 강인하고 무뚝뚝한 살인병기로 재탄생 하여 파괴와 폭력의 신들이 나린 듯 두들겨 패고, 부수고, 성컹성컹 목도 자르고, 살도 찢고, 창자로 목걸이도 꿰어가며 만화 같이 유쾌통쾌한 이야기들을 694 페이지 가득 펼쳐낸다. 도덕이나 이성을 한껏 떨쳐버린 이 유혈낭자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는 그냥 잠깐의 유머같이 느껴질 정도로 아기자기 해서 피식피식 웃으며 읽다 보니 어느 새 페이지의 끝에 다다라 버렸다. 흰토끼 소윤에 대해 날이 갈 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세 사람(아니 네 사람)의 사랑이 잔인한 본성들과 별개로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어째 멀쩡한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하면서도 한껏 파괴적으로 맞춰놓은 원더랜드라는 배경이 지나치게 판타지스러워서 현실감도 안들고 상상하기도 깔끔했다. 본래라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어야 할 앨리스와 원작에서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체셔 고양이가 완벽하게 당하기만 하는 악당으로 등장하는 점도 독특했고 말이다.

팀 버튼 감독이 해석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큼이나 매력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에 푹 빠져 언제 다 읽나 했던 두꺼운 책을 낼름, 이렇게나 빨리 읽게 될 줄이야. 독자가 이만큼이나 아쉬워 할 줄을 미리 알아서 별책부록을 따로 끼워줬나 보다. 스트레스 해소라는 장르소설을 읽는 나의 목적성에 완벽히 부합한 재미난 소설로 세 남자가 (아니 네 남자가) 거의 동등한 분량을 차지하며 일처다부의 진행을 거의 끝까지 이어간다는 점, 외전까지 세 남자 모두에게 열린 결말인 점, 이들의 사랑에 큰 장애가 없다는 점, 악당이 좀 멍청하고 모자라며 그 역할이 크지 않다는 점, 주인공의 고난이 지리하게 이어지지 않고 이야기가 단순하게 똑 떨어진다는 점, 폭력이 지나치게 상세히 묘사되지 않는 점, 무엇보다 백점짜리 가독성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기복없이 읽힌다는 점에서 근래 읽은 로맨스 소설 중에서는 최고로 취향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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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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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나를 만들어가는 곳이지, 내가 의존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걸 알게 되면 회사만큼 멋진 곳도 없습니다. 그리고 수행이 끝났을 때 당신은 언제고 회사를 그만둘 수 있습니다. 다만 '언젠가 회사를 졸업할 수 있는 자기를 만들 것. 그것만큼은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는 51세 무직의 봄입니다. "

ㅡ 퇴사하겠습니다, p193, 엘리

제목과 표지부터가 참 매력적인 책, "퇴사하겠습니다."

50세면 퇴사하겠다는 결심을 한 후 30대 중반부터 조금씩 퇴사 준비를 해왔던 아사히 신문의 사회부 기자 이나가키 에미코. 이십 년 넘게 한 직장에서 장기근속한 그녀가 퇴사한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보니 아무래도 퇴사 후에도 어떻게든 살아지더라는 그녀의 말에는 별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족히 십오년 전, 거의 내 나이대부터 차곡차곡 퇴사를 생각해 왔다는 그녀의 준비성에는 감탄과 함께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막연한 은퇴 준비가 아니다. 자발적인 퇴사 준비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실업급여조차 받지 못하는 자발적 퇴사는 젊은 친구들도 쉽게 엄두를 못내는 일인데 그녀 나이 50세. 다른 사람들이 은퇴 후의 경제력을 걱정할 시기에 (더욱이 독신여성인) 이나가키 에미코는 퇴사 후 자신이 정신적으로 회사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 월급이라는 걸 받으며 존재감을 발휘하고, 직장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끼던 시기를 벗어나서도 씀씀이를 줄여가며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를 말이다. 회사가 싫어서가 아니라, 일이 지겨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지긋지긋해서가 아니라 그 모두에 대한 존중과 존경과 애정을 밑바탕으로 한 채, 성장한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듯 언젠가 애정을 주고 받았던 이곳 회사로부터 자발적으로 이별하겠다는 그 마음 자세가 대단하달지. 약간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회사는 사랑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이러니저러니 불평하면서도 글 곳곳에 회사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묻어나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일이 힘들기도 하고, 거래처 진상도 갈 수록 늘어 스트레스를 받지만 인간적으로나 인생선배로서 존경스러운 상사를 모시고 그 밑에서 일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나름 만족하며 사는 터라, 나 같은 소시민, 평범한 직장인을 마냥 한심하게 보는 류의 책이거나 일의 가치 자체를 폄훼하는 글이면 좀 싫었을 것 같은데 그런 지적질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서문에 밝힌 그대로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해, 자신의 하루하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작은 계기"(p21) 를 마련해 주는 것이여서 그런지 글 내용도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았고, 그냥 농담을 듣는 것처럼 웃으며 그래그래 그렇기도 하지, 그렇게까지 생각했단 말이야 하는 식으로 읽게 되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물론 써볼만큼 써보고 누려볼만큼 누려본 후 돈 그까짓 별 것도 아니더라, 나는 그런 거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더라, 너희도 그럴 수 있을 거다 라는 느낌을 주는 내용 등에서는 아무래도 약간의 반감이 생기기는 했지만 술술 읽힌다는 장점만큼은 확실해서 에세이 장르에 대한 호불호와 관계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쯤 잡아봄 직한 책이지 않나 생각해 본다.   

단 평범하게 퇴사한 친구에게 선물할 만한 책은 아니지 않나 싶다. 작가가 느끼는 퇴사 후 현실이라는 게 좀 지나치게 낭만적인 구석이 있어서 (건강보험이니 신용카드니 퇴직금의 소득세니 이리저리 현실이 만만치 않다라고 말은 하는데 분위기는 썩...) 실제로 퇴사를 하고 먹고 살 걱정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 책을 읽다가 열불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살짝 있었다. 이 책은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적합한 책인 걸로,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덧붙여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회사의 필요가치에 처분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필요한 만큼, 또 회사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만큼 서로 도움을 주고 받다가 스스로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 회사와 이별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나의 퇴사 또한 졸업같은 느낌이기를. 너무 큰 소망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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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망고셩 2017-02-1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읽어봐야할 가치가 있을것 같애요.30대부터 차곡차곡 준비해온 퇴사라니.
지금의 저를 생각해볼수있을것 같애요

캔디캔디 2017-02-14 09:41   좋아요 1 | URL
유쾌하게 생각할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재미난 에세이였어요.
막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책은 아니었지만요^^

망고망고셩 2017-02-14 09:50   좋아요 0 | URL
힐링인가요? 좋습니다 ^^*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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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 부러뜨리는 남자의 주변 ★★★★

오가사와라 미노루 : "너 덩치는 큰데 완전히 쓰레기네."라는 평을 곧장 듣고 다니는 남자 오가사와라. 멸치 쭉쩡이 같은 놈들 앞에서도 기가 약해 주눅 들고 마는 속칭 찐따이다. 자신감도 없고 매사 의욕상실. 상대가 어떻게 굴어도 싫다라고 거절하지 못하는 남자라 직장 동료의 떠밀림에 사채빚까지 떠안고 말았다. 물론 그의 인생 시작 어디쯤에선 큰 덩치로 상대를 제압하며 용기백배한 시절도 있기는 했지만은 그 결과로 단체 이지메를 당한 후론 인생이 탄탄하게 내리막길, 사채까지 있는 이상 어디를 보아도 답이 없다. 그런 그가 의문의 남자 "오야부"로 오인받아 오야부의 대행역할을 하게 된다. "날 닮은 너는 빚이 있는 건가?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니 내가 해결해 줬다."(p62)

나카지마 쇼 : 오가사와라와 비슷한 인생 패턴을 밟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느끼는 하는 인물 고등학생 나카지마. 이른 바 힘있는 친구에게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이지메의 대상이 되고 만다. 친구와 선배들에게 돈도 뺏기고 폭력도 당하는 그의 앞에 나타난 의문의 덩치 큰 남자. "괜찮아, 괜찮아. 지켜보기만 할 거야. 네가 죽을 것 같으면 도와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가만히 보기만 할게." (p34) 

와카바야시 부부 : 목 부러뜨리는 남자에 의한 살인 사건. 아내 에미는옆집 총각이 마구 의심스럽다. 몽타주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남편 준이치는 그럴 리가 있냐며 아내를 타박하지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러다 어느 날 옆집 남자의 뒤를 밟게 되는데. 평범한 부부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축원. "분명 평화롭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p78)

그리하여 대망의 목 부러뜨리는 남자 오야부 료 : "아, 시공간 왜곡 현상을 믿니?"(p35) 여러 인연에 코를 갈래갈래 묶어 해피엔딩을 이끌어 내는 남자 오야부. 그리고 그의 난데없는 죽음과 그의 곁에 흐르는 의문의 음악. 그는 왜, 어째서 죽게 된 걸까? 그의 영혼이 정말 또다른 시간 속을 흐르고 있는 걸까? 두 번을 읽어도 아리송하다.

 
2. 누명 이야기 ★★★★


마루오카 나오키 : 아들이 죽었다. 그는 아내와 이별을 했고 직장을 관둬야 했고 아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도 떠나와야 했다. 아들과 연관되어 있는 무엇과도 안녕, 모든 삶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치여 죽인 여자는 여전히 자신히 살던 그 맨션에서 새로이 남자친구를 사귀고 더욱이 운전까지 하며 잘 살고 있는 듯 하다. 그 속은 알 수 없지만 겉보기로는 그렇다. 용서할 수 없다. 용서가 안된다. 별안간의  충동 속 벌어진 살인 사건.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의문의 형사.

오야부 료 :  단편 1의 목부러뜨리는 그 남자. "시공간 왜곡 현상을 믿니?"(p35) 라는 질문이 나온 이유가 단편 2. 누명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어릴 적 오야부와 캐치볼을 해주기로 약속했던 남자. 우연히 만난 남자아이에게 캐치볼을 가르쳐주기로 했던 마루오카. "조금 기대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봐."(p35). 그는 정말 타임워프 중인걸까? 


3. 나의 배 ★

"우연히 같은 이름인지, 아니면 잇츠 어 스몰 월드인지 모르겠지만, 후자라면 당신은 평생 이 남자의," 구로사와는 침대를 가리켰다. "'나의 배'"에 타고 있었던 셈이야."

-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P163, 현대문학

와카바야시 에미 : 이웃을 살인범으로 의심하면서도 어쩐지 명랑하던 준이치의 아내 에미에게는 한 가지 숙원이 있다. 50년 전, 겨우 나흘을 만났던 남자의 행방을 알고자 하는 것. 이제 일흔을 넘어가는 에미에게는 인생에 별 달콤한 기억이 없다. 첫사랑은 60년도 더 된 옛날에 단 하루 만났던 남자애이고, 그 이후 별다른 연애조차 없이 선으로 만난 남편 준이치와 결혼해 의리로 살아왔기에 고작해야 나흘, 입맞춤 한 본 해본 적 없는 남자와의 기억조차 너무나 소중하다.

와카바야시 준이치 : 암이 악화되어 병상에 누워 있다. 의식이 없음.

구로사와 : 에미의 의뢰를 맡은 탐정이자 도둑. 에미의 과거를 쫓다 터무니없이 달달한, 놀랍도록 아기자기한 인연의 이야기를 밝혀 낸다.

에미의 인생 속 운명같은 인연. 운명은 운명인데 뭔가 엄청나게 현실적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허구적이기도 해서 뭔가 뻥 같은 느낌의 이 인연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소설이란 게 원래 작가의 뻥인데 뻥 중의 뻥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표현을 못하겠다. 50년 전의 나흘, 60년 전의 하루, 그리고 침대 위 의식을 잃은 남편 준이치의 모습까지. 시종일관 담담한 문체가 오히려 낭만을 부각시키는 단편 로.맨.스. 였다.   


4. 사람답게 ★★★★★

"하지만 하느님은 있어요. 옆방에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죠. 마음이 내키면 상자를 들여다보고, 그때 알아차리면 도와주기도 하고요."
"나쁜 놈에게는 벌을 주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까? 신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는 게 아닙니다. 그 점은 실망스럽지만, 다만 보고 있을 때는 규칙을 적용해 주는 거예요. 규칙을 위반하거나, 불공평하고 부조리하게 편중되어 있으면 그걸 수정해 주지요. 악인에게는 천벌을, 착한 사람에게는."
"바나나를."

ㅡ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p 216-217, 현대문학

여자 : 제부의 불륜 현장을 잡아달라고 구로사와에게 의뢰한다. 병든 시아버지와 시노모를 모시는 편리한 도구로 이용 당하다 쓸모가 없어지자마자 버림받게 된 여동생의 처지를 가엾게 여긴다. "죄의식이랄까, 죄책감이 없는 걸까? 그래도 사람 맞느냐고 묻고 싶어."(p173)

: 학원에서 폭력적인 이지메를 당하는 중. 세상에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는 것만 같다 생각했던 그의 앞에 나타난 기기묘묘한 여자와 현상들. "법률을 초월하는 것.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없죠" (p188)
 
구보타 : 사슴벌레를 키우는 전업작가. 영역 개념이 확실한 사슴벌레를 사육하고 통제하며 인생 묘미를 깨닫는다.

구로사와 : 여자에게 불륜커플의 사진을 찍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온천을 찾았다 발이 묶이게 되어 구보타의 집에서 묶는다. 구보타와의 개똥철학에 불만을 품기도 했지만 불륜커플을 쫓다 그들의 사망을 목격하고선 그럴싸한 타당성을 느낀다.

자신의 폭행하던 학생이 빛처럼 사라졌다 머리가 다쳐오고, 박스 속 사슴벌레를 보며 느끼게 되는 신의 손길들. 뭐래? 하는 반감 반, 그럴싸한데 하는 동의 반. 읽는 동안은 좀 엉뚱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겨서 은근히 놓치기도 하지만 글쎄, 여기는 소설 속이니까. 적어도 이 허구의 이야기 안에서는 놓치는 것이 없는, 작품 전반에 걸쳐져 있는 작가의 촘촘한 그물과 천망회회의 소회가 마음에 들었다.


5. 월요일에서 벗어나 ★★

구키야마 : 됴코의 제작 프로덕션 소속. 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재미를 위해서라면 악의없는 방송 조작도 할 수 있는 류의 인성.

구로사와 : 어느 날 구키야마의 집에 걸리게 된 의문의 그림 한 점. 구키야마는 그것이 유명 작가의 그림으로 자신의 집에 걸린 연유를 알 수 없으니 구로사와의 도둑질 능력으로 그 그림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협박)한다.

책 속 인물들은 속 좋게 인상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구키야마 이 남자 정말 별로인데 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던 것 같다. 나의 배에 등장한 구로사와의 등장에 기대가 컸지만 구키야마 때문에 이 얘기가 좀 많이 싫었다. 생각하기 싫은데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있어서. 구로사와가 제대로 한 방 먹이는 장면이 나왔으면 좋았을걸. 이야기가 가다가 만 느낌이지만 글쎄 그게 작가님의 스타일인 듯. 이제 두 권 (기억나지 않는 러시라이프를 제외하고) 읽었다고 뭔가 작가님의 스타일이 조금 잡히는 것 같다. 측근 이야기가 뒤를 따라 그래, 언젠가는 이라고 의미심장하게 상상할 여지가 있는 건 좋았다. 구키야마에게 협박 당하는 찜찜한 월요일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오만은 프로도 실수하게 만들지만 그 실수가 구로사와에게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6. 측근 이야기

모두가 시선을, 그에게 던지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얼굴이었다. 이천 명이 넘는 사람들, 똑같이 표정 없는 얼굴의 사람들이 말없이 고발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사진 중앙의 그는 태평하게 웃고 있었다.

ㅡ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p301, 현대문학

얀베 세이베 : 무사 시대 백성의 입장에 섰던 관료이나 결국 정적의 손에 아들과 함께 살해 당한다. 그의 사후 그의 정적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사건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그의 혼을 달래기 위해 신사가 세워진다.

구보타 : 사슴 벌레를 키우는 전업작가. 싫어하는 대학동창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 심령사진 등의 찜찜한 경험을 하게 된다. 구로사와에게 그의 불륜사진을 찍어달라고 의뢰. 큰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륜이 탄로나는 정도의 불운은 겪게 해주고 싶다.

: 잘 생기고 돈 많고 성격 나쁜 이른 바 금수저의 전형같은 남자. 구보타의 동창.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아 젊은 나이에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현재 불륜 중이다. 얀베 세이베를 닮은 부하 이소베의 사후 주위 인물들이 연이어 사망 중이다. 미스터 시선의 대상. 

구로사와 : 구보타에게 동창의 불륜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촌스러워도 좋다. 나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현실의 대변처럼 그저 그렇게 악인이 잘 사는 이야기는 싫어, 딱 싫다. 그런 점에서 측근 이야기는 최고. 더는 연하장을 보내오지도, 근황 연락을 해 오지도 않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단편 4. 사랍답게와 연결해 제일 좋았다.

7. 미팅 이야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를 떠오르게 하는 미팅 이야기. 작은 밤의 음악이 여기 목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속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사망한 오야부 곁을 흐르던 음악, 나의 배 속 구로사와가 얘기하다 만 놀랍도록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던 그 밤, 헤어졌던 연인들이 이어지고, 특별한 인생을 사는 남자가 경험하게 되는 평범한 이들의 미팅. 처음엔 이거 뭐지? 좀 지루하겠는데 했지만 읭? 이 남자 오야부야 뭐야? 잠깐 의구심도 가졌지만 결말에 들어가기에 딱 적합한 단편이었다. 목부남의 대미를 장식해주는 참 예쁜 이야기.
  

놀랍다,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라고 감탄할만한 작가는 아닌데 소소하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탄탄한 팬층의 작가에 대한 믿음, 지지가 이해가 된달까. 사람과 인생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도 마음에 들고, 성긴 머리로도 절반쯤 쫓아갈 수 있게끔 깔아주는 복선들도 재미나다. 인물들의 성격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점도 좋다. 나의 배 속 에미가 마구 감격하며 울고 불고 내지는 회환에 빠지는 장면 등이 등장했으면 이렇게 인상적이진 않았을 것 같아서. 기쁜 건지 실망스러운 건지 모르겠다는 에미의 말이 마음에 폭 와닿았다. 잇츠 어 스몰 월드라 그의 세계에 펼쳐진 권선징악의 그물에 빠져나갈 구멍이 많지 않다는 점도 좋은 포인트이고. 등장한 인물들을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예감까지 더해지니 남은 책들에 대한 기대가 한층 커진다. 와카바야시 부부를 또한번 만날 수 있을까? 정신과의사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는? 읽지 못한 작품들, 만나지 못한 인물들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는 게 무엇보다 좋은 일인 것 같다. 구팬들은 이런 기대감 년에 한번쯤 밖에 못느끼겠지? 신팬의 행복이다.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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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맛 - 셰프가 편애한 현대미술 크리에이티브
최지영 지음 / 홍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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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 그림이 가져다주는 힘에 막 흥미가 돋운 참이라 그림의 맛 제목만으로도 많이 끌린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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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
바바라 오코너 지음, 이은선 옮김 / 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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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 파인애플, 파인애플"




화가 난 찰리의 얼굴에 푸르르 열이 오르면 친구 하워드가 귓가에 들려주는 마법의 주문. "파인애플, 파인애플, 파인애플" 효과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 주문을 괜스레 같이 읊어 본다. 내 얘기도 아닌데 내 얘기처럼 감정 이입이 심하게 되서 그런가 다혈질 찰리가 밉지가 않았다. 오은영 선생님이 출연하시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소설판을 보는 느낌도 들고, 찰리라는 아이가 왜 저렇게 곤두섰는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왜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지, 왜 저렇게 공격적인지 그 이유가 너무나 확연해서 아이가 그냥 짠하고 안됐고 모든 게 다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보고 키득키득 비웃는 오드리 패거리나 저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여하간 듣고 싶지 않은 얘기로 속을 뒤집는 하워드나 버서 이모, 자신에게는 영 관심없는 것 같은, 어쩌면 벌써 자신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의심이 드는 쌈닭 아빠, 우울증에 걸린 엄마, 언니 재키 외 기타등등의 이유로 분노를 폭발시키는 찰리의 순간들을 보며 그냥 어쩐지 처음부터 더 해 더 더! 화나면 화나는대로 화내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싶은대로 터트리고, 속에서 일어나는대로 마구 쏟아내라며 응원하고 말았다. 감정에 받치는데로 마구 소리 지르고, 걷어 차고, 밀치기도 하면서. 물론 그건 전혀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도 아니거니와 문제를 무한정 악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기도 하겠지만 요즘 정서가 좀 비틀어진 탓인지 소설 속 찰리가 현실을 마냥 참고 인내하며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는 아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착한 신데렐라의 출연은 찰리의 베갯잇으로 충분한 느낌이랄까. 물론 하워드는 제외.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싶게 순둥이에 착해빠진 녀석, 그러나 곧잘 마법같은 순간들을 만들어 내는 찰리의 베스트 프렌드이다. 라이프 오어 데스의 주인공 오디를 두고 감방 친구가 요다와 부처와 검투사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인물이라고 했는데 검투사를 빼고 요다와 부처만 남겨놓으면 딱 하워드일 것 같았다. 이야기 속에, 또 찰리 같은 성격의 아이 옆에 꼭 필요한 캐릭터였긴 한데 그래서 이 친구가 뭐 마냥 좋았나면 그렇지는 않았고 친구들의 놀림에도 그게 뭐 어때서? 하며 달관하는 태도가 답답해 숨이 퍽 막혔다가 찰리가 그 못된 친구를 들이박는 장면에서 다시 숨통이 확 트이고 뭐 그런 과정을 왔다갔다 밟았다. 



피곤했던 오늘, 마지막까지 따뜻한 이야기로 하루를 마무리 해야지 했었는데 정작 따끈따끈하게 사랑스러운 하워드나 가족들, 이모 내외, 찰리의 개 위시본, 찰리와 하워드가 소원을 비는 장면들이 아니라 찰리의 화내고 소리 지르고 다시 미안해 하는 이야기에 더 집중했다는 게 이 독서의 재미난 점이었다.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결국 이해를 받고 용서도 구할 수 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찰리를 보며 대리만족이 되었던건지 뭔지 스스로도 아리송하다. 기분이 좋을 때, 마음이 너그러울 때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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