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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흰 토끼 ㅣ 블랙 라벨 클럽 29
명윤 지음 / 디앤씨북스(D&CBooks) / 2017년 1월
평점 :

"Welcome to Wonderland!!"
루이스 캐롤의 원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한국 작가 명윤의 손을 거쳐 로맨스 판타지로 재탄생했다. 주인공은 한국인 대학생 소윤. 그녀의 남자친구를 짝사랑하는 가현에 의해 칼에 찔린 소윤은 판타지 소설 [원더랜드] 속 세상에서 깨어난다. 137번째 차원이동자로 국가 실험체가 되어 개조 당하던 어느 날 아웃랜드를 탈출해 원더랜드로 피신하게 된 소윤은 코커스 레이스로 기존 흰토끼를 살해한 후 자신이 흰토끼의 자리를 차지하며 원더랜드의 주민이 된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앨리스가 나타나 소설을 빠르게 완결내어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 원작의 흰토끼처럼 소윤 또한 앨리스의 안내자를 자청하며 극의 빠른 전개를 도우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방해하는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는데 그들은 바로 앨리스의 남자들이 되어야 할 인물들인 하트와 매드해터 그리고 트윈스 형제였다. 치유의 힘을 지닌 맑고 아름다운 영혼 앨리스에 감화되어야 할 남자들이 어쩐 일인지 앨리스가 아닌 흰토끼 소윤의 곁을 맴돌며 구애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예상 밖의 국면으로 꼬이는 듯 하지만..... 안꼬이면 그게 로맨스냐? 라고 말하듯 그 와중에도 거침없이 사랑하고 갈구하며 장르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 이틀 밤의 내 시간이 흡혈귀처럼 빨아 먹혀 제대로 유혹 당해 버렸다. 재미있다. 무척. 아주 많이.
"저놈의 목을 쳐라!"고 외치며 앨리스와 대적하던 붉은 여왕은 적의 목을 자르는 걸 즐기는 살인광이자 원더랜드의 지배자인 하트로. 찻잔과 모자에 집착하며 앨리스에 조력하던 미친 모자장수는 강인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 매드해터로. 대머리의 딸땅막한 난장이 트위들 디와 트위들 덤은 한 몸 속 이중인격 사이코패스 통칭 트윈스로. 흰토끼로 불리는 소윤은 마치 레지던트 이블의 주인공 앨리스처럼 강인하고 무뚝뚝한 살인병기로 재탄생 하여 파괴와 폭력의 신들이 나린 듯 두들겨 패고, 부수고, 성컹성컹 목도 자르고, 살도 찢고, 창자로 목걸이도 꿰어가며 만화 같이 유쾌통쾌한 이야기들을 694 페이지 가득 펼쳐낸다. 도덕이나 이성을 한껏 떨쳐버린 이 유혈낭자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는 그냥 잠깐의 유머같이 느껴질 정도로 아기자기 해서 피식피식 웃으며 읽다 보니 어느 새 페이지의 끝에 다다라 버렸다. 흰토끼 소윤에 대해 날이 갈 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세 사람(아니 네 사람)의 사랑이 잔인한 본성들과 별개로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어째 멀쩡한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하면서도 한껏 파괴적으로 맞춰놓은 원더랜드라는 배경이 지나치게 판타지스러워서 현실감도 안들고 상상하기도 깔끔했다. 본래라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어야 할 앨리스와 원작에서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체셔 고양이가 완벽하게 당하기만 하는 악당으로 등장하는 점도 독특했고 말이다.
팀 버튼 감독이 해석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큼이나 매력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에 푹 빠져 언제 다 읽나 했던 두꺼운 책을 낼름, 이렇게나 빨리 읽게 될 줄이야. 독자가 이만큼이나 아쉬워 할 줄을 미리 알아서 별책부록을 따로 끼워줬나 보다. 스트레스 해소라는 장르소설을 읽는 나의 목적성에 완벽히 부합한 재미난 소설로 세 남자가 (아니 네 남자가) 거의 동등한 분량을 차지하며 일처다부의 진행을 거의 끝까지 이어간다는 점, 외전까지 세 남자 모두에게 열린 결말인 점, 이들의 사랑에 큰 장애가 없다는 점, 악당이 좀 멍청하고 모자라며 그 역할이 크지 않다는 점, 주인공의 고난이 지리하게 이어지지 않고 이야기가 단순하게 똑 떨어진다는 점, 폭력이 지나치게 상세히 묘사되지 않는 점, 무엇보다 백점짜리 가독성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기복없이 읽힌다는 점에서 근래 읽은 로맨스 소설 중에서는 최고로 취향이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