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오늘의 일본문학 5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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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루세 : 숨 쉬는 거짓말탐지기. 안타깝게도 살아오면서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은 아내와 자폐증이 있는 그의 아들 다다시 밖에는 본 적이 없는 남자다. 아마도? 그랬던 아내가 아들의 선생님과 바람이 났을 때는 너무 황당해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이혼 도장을 쾅 찍어주기도. 열 길 우물 속뿐만 아니라 한 길 사람 속도 거뜬히 간파하며 속 시원해지는 계략을 짜는 명랑한 갱들의 리더이다. 평상시엔 시청 공무원.

교 노 : 숨 쉬는 내내 뻥을 친다고 일컬어지는 수다쟁이 달변가. 자신이 논리적으로 굉장히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며 은행강도짓을 할 때마다 피해자들을 앉혀놓고 열띤 강의를 하며 박수 받기를 기대하는 엉뚱한 남자. 나루세와는 오랜 친구 사이로 투닥투닥 해도 깊은 애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평상시엔 카페 주인.

구 온 : 동물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인간이 개를 죽이는 장면을 보는 것보다 개한테 물려 죽는 사람을 보는 편이 낫죠" 라던가 동물에 의한 인간 약탈, 인간파괴를 꿈꾸는 신낭만주의자. 은행강도로 번 돈으로 뉴질랜드로 떠나 양떼 속에서 휴가를 보내는 부러운 인물이다. 평상시엔 소매치기. 잠깐, 다른 직업도 있었던가?

유키코 : 몸 속에 초단위로 측정 가능한 시계를 장전하고 있는 초능력자. 아들을 위해서라면 테러범을 차로 치어 죽이는 일도 불사할 수 있는 강인한 어머니이지만 남자 보는 눈이 문맹수준이라 평생 싱글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사건 발단의 시초, 극의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는 히든카드. 평상시엔 계약직 직원.

그 밖으로 교노의 아내 쇼코, 유키코의 아들 신이치, 나루세의 아들 다다시, 유키코의 전남편 지미치와 갱의 적 악당 간자키 등이 등장. 


 


평범한 남자가 심심해서 벌인 극장테러사건으로 우연히 만나 은행강도단이 된 일당 나루세와 교노, 구온과 유키코는 고요 은행을 털기로 모의한다. 나루세의 성공 확률 백 프로에 입각한 "첫째, 경보장치를 차단한다. 둘째, 돈을 챙긴다. 셋째, 도망친다."(p253-254)의 간략하고도 대담무쌍한 작전에 투입되어 희희낙락 돈을 훔쳐 달아다던 이들 앞에 끼어든 의문의 RV자동차. 그리고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총을 든 강도단이 명랑한 갱들의 돈가방 두 개를 덜렁 훔쳐 달아나 버린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먹는다는 속담처럼 눈 깜짝할 새에 남의 품으로 날아가버린 4천만엔.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 초조, 히스테릭해진 초시계 인간 유키코와 타인의 거짓말을 호흡하듯 가볍게 간파해버리는 남자 나루세의 의뭉스런 눈초리 속 음모와 배신의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는데. 강탈 당한 현금을 추적하던 와중 발견한 시체, 시체의 집에서 발견한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동료 교노의 목소리. 유키코와 나루세, 유키코의 아들 신이치를 미행하는 의문의 인물 X, X', 구온이 소매치키한 지갑속 신분증의 비밀까지. 지질함의 끝을 보여주는 악당들과 명랑한 갱들의 대척 그 해프닝에 요절복통 유쾌상쾌해지는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를 읽었다.

어쩌다 보니 연달아 두 번이나 읽으며 재탕해버린 이 책을 덮고 나니 기분 좋은 두근두근함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어제 아침부터 시작해 밤 사이 읽고 또 읽은 책을 앞으로 펼쳐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벅찬데 그럼 정말 한숨도 못잘 것 같아서 대신에 리뷰만 끄적끄적. 초시계인간으로써 운전사 역할을 맡은 유키코가 사전탐사로 고요 은행 주변을 배회하며 전남편을 상기하다 마주치게 된 인물 X. 이 X가 전남편일까? 지질이 중의 지질이 같은 도박중독 빚쟁이 전남편과 엮어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건가? 유키코 이 남자 보는 눈이 발바닥에 달린 것 같은 여자가 갱들 배신 하는 거 아냐? 난 아직 이사카 고타로 작가 스타일도 잘 모르는데 이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막 꼬이고 엉망진창 되고 이러면 나 못 견뎌! 하며 부르르부르르 끓는 속을 못이기고 때려부시듯이 속독을 하며 스토리를 파악하고 나서야 안도의 웃음이 씨익 지어졌다. 유키코의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내적갈등에 함께 불안초조해 했던 게 누구였냐는 듯이 느긋한 마음으로 유키코의 정찰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꼼꼼하게 재독 시작. 결말을 다 알고 읽으면 무슨 맛이냐 하시겠지만 워낙 깔아놓은 퍼즐 같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이리저리 꿰어 맞춰 가며 읽는 것도 신나고 재미있다는 말씀!  편편이 인물명 아래 적혀 있는 어떤 단어에 대한 작가의 정의, 이를테면 "살인 : 독자의 관심을 붙들어 놓기 위해 갑자기 발생하는 사건" 같은 구성도 피식피식 웃음나게 재미있는데다 돌려가며 비꼬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인간에 대해 대놓고 지적하는 면면들이 통쾌했다. 크게 복잡할 것 없는 사건들을 간결하면서도 단조롭지 않게 통글통글 풀어놓는 게 이 작가님의 가장 큰 매력인 듯, 무지 상투적일 수 있는 사건들인데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다. 인물들의 면면이 판타지스러워서 그런건지 필력의 힘인지 신기할 정도의 몰입감을 품고 있는 책이다. 이사카 코타로 작가님과 관련해 여태 읽은 책이라야 기억에도 없는 십몇년 전의 러시라이프를 비롯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이 있을 뿐이지만 그중에서도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가 최고였다고 감히 추천하고 싶다. 작가님의 못읽어 본 책들이 아직 많지만 이보다 더 재미있기는 힘들지 않을까? 명랑한 갱의 일상의 습격지구를 돌린다 중에 뭐가 속편이고 전편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해 지구를 돌린다부터 읽었는데 일상의 습격도 얼른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엄청나게 기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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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 2020-02-02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쓰시네요. 잘 보고 가요!!!
 
Tripful 트립풀 후쿠오카 - 유후인.벳푸.다자이후, Issue No.01, 2018 개정판 트립풀 Tripful 1
안혜연 지음 / 이지앤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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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많았음 좋겠다 했더니 아주 듬뿍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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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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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그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차기작이다. 뻔할 수도 있는 코믹범죄활극 내지는 갱생을 가장한 범죄자 집단의 모험을 기발하고 활기차게 그려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유쾌하고 발랄하고 속이 뻥 뚤리는 웃음에 정신없이 빠지는 순간 무시못할 현실을 걍팍하게 치고 오는 진지함에 흠뻑 빠져 마음도 머리도 흐물흐물, 또다시 작가에게 반하게 되지 않을까? 책을 읽기 전까지 내 기대가 그랬다. 책표지만 봐도 뿌듯한 마음이라 아끼고 아끼다 다 읽고 난 지금 말하고 싶다. 아끼다 똥됐다, 안 아껴도 됐겠다. 차라리 일찍, 후딱, 책 받은 즉시 잽싸게 읽어버릴 걸. 그러면 지금보다는 더 후한 평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적게 믿고 적게 실망하고... 아무래도 나는 두고 두고 기대를 너무 키웠나 보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에는 매력적으로 다가올만한 요소가 넘쳐난다. 인물, 배경, 스토리. 작중 직업을 모두 담고 있는 표지의 일러스트까지. 따로따로 보면 뭐 하나 빠지는 건 없다. 총을 쏘고 목을 자르는 등 일찍이 사람을 죽이며 생의 절반은 감옥살이를 했을 연쇄(?)살인마이자 해결사인 요한 안데르스, 속칭 킬러 안데르스를 위시하여 집안 대대로 대물림 되는 목사직에 강제로 안착 당해 친부에게 핍박 받다 그 아버지 돌아가시자 지옥에 잘 가시라 쌍욕을 퍼붙고는 파면 당해 거지가 된 목사 요한나 셸란데르, 대대손손 부자로 잘 먹고 잘 살다가 할아버지 대에 폭싹 망해 일찍이 색시집 잡부로 일을 시작해 이제는 땅끝 하숙텔의 리셉셔니스트가 된 회의주의자 페르 페르손.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 인물들만으로도 별점수의 절반은 먹고 들어가겠다 싶었다. 거기다 줄거리는 또 어떤가. 스웨덴의 땅끝 하숙텔 7호와 8호, 뒷방과 복도에서 시작한 이 세 인물의 동업으로 킬러 안데르스의 해결사 사업이 번창하는 와중 엉뚱하게도 안데르스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투신하며 더는 남의 팔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겠다고 파업을 선언한다. 요한나와 페르는 피치 못하게(?) 그런 안데르스의 등을 처먹으려다 덜미를 잡히게 되고 의뢰인들과 적들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안데르스와 함께 도망을 시작한다. 이 때부터 벌어지는 좌충우돌 요절복통 킬러의 전직 이야기, 정확히는 "킬러-> 목회자-> 산타클로스"의 여정은 마땅히 재미있어야 하건만 틈틈히 비집고 나오는 웃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엄청나게 지루하다. 나홀로 집에 등장하는 도둑들처럼 모자란 악당들이 줄기차게 등장하고 킬러 안데르스와 요한나와 페르의 갖은 말장난과 성경해설과 헤프닝에도 갈수록 재미가 반감되었다. 느슨하게 줄줄 늘어지는 이야기는 재미도 없으면서 길기는 얼마나 긴지 다 읽었나 하면 다음 장, 이제는 작가의 말이나 번역가의 말이 나오겠지 하면 또 다음 장이 나와서 한숨이 폭폭 터졌다. 읽은 게 아까워서 덮지는 못하겠고 남은 장수를 확인하려니 두려워 꾸역꾸역 읽어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어떻게 다 읽었나 스스로는 신기할 정도지만 순전히 취향의 차이로 좋은 평도 많았다는 걸 알고 있다. 여전히 인정 받는 작가라는 것도. 이 작품에 매력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고 그저 나의 기호와는 조금 많이 거리가 있지 않았나, 요나스 요나손의 작품은 굳이 더 읽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정도의 느낌으로 정리하면 될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도 패스. 혹시나 다음 번 작품을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어떤 기대도 없이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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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7-02-23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황한 설명가득한 이 작가스타일이 좀 안맞지만 까막눈이 여자는 읽을만 합니다. 100세는 진짜 어휴...ㅋㅋㅋ

캔디캔디 2017-02-24 15:34   좋아요 1 | URL
기대감 마이너스에서 읽으면 좀 나을까요. 킬러가 지루해도 넘 지루했어서 까막눈이 여자는 시간 넉넉할 때, 이 지루함의 충격이 좀 사그라들면 읽어봐야겠습니다^^
 
갈매기의 꿈 - 완결판
리처드 바크 지음, 공경희 옮김, 러셀 먼슨 사진 / 현문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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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출판된 갈매기의 꿈 개정증보판 소식을 들었다. 45년만에 작가가 쓰다 잊어버린 4장을 더하여 반세기만에 완전판이 나온 것이다. 읽고 난 후의 감회가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갈매기계의 석가모니를 목도한 기분이랄지 갈매기판 무협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이라고 해야할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의 조나단 리빙스턴이 허공답보에 대한 노력으로 기연을 얻어 금강불괴, 환골탈태의 경지를 거쳐 완벽한 자아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신선의 경지에 올라 불로장생 하는 이야기 라고 하면 설마.. 하겠지만 정말 느낌이 딱 그랬다. 깨달음을 얻은 갈매기들이 황금색 몸으로 화하며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영화 서유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끌끌 웃고 말았을 정도다. 오색빛깔 구름까지 나오면 딱인데 하고. 석가모니의 해탈 과정을 우화화한 것 같기도 하고 갈매기계의 예수재림 내지는 메시아의 등장이라고 해도 될 것 같고 윤회, 도교의 기운까지 물씬 난다. 본래 갈매기의 꿈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아무리 돌이켜봐도 기억이 없다. 아무래도 나는 어렸을 때 갈매기의 꿈을 안읽었던 것이 확실한 모양이다. 일찍이 접한 요약본으로 읽었다고 착각한 책이 워낙에 많은데 갈매기의 꿈도 그 중의 한 권인 듯. 굉장히 허무맹랑하면서도 독특한 고전이다. 표지가 아름답고 책 분량 늘리기인지 의미없게 느껴지는 갈매기 사진 삽화도 많고 이야기도 어딘지 얼토당토 않은 느낌이지만 조나단의 자유에의 갈망이 인상적이었던데다 무협처럼 느껴지는 장면들도 재미있다. 그렇대도 굳이 완전판으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추가된 4장이 워낙에 인상적이어서 1장의 감동이 휘발된다. 완전판으로 재독하시려는 분들께는 신중을 기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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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없음 오늘의 젊은 작가 14
장은진 지음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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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온다고 한다."

ㅡ 날짜 없음, p책의 시작부터 책의 끝까지, 민음사


날짜 없음은 "그게 온다고 한다"는 서정이 넘쳐 다분히 시적인 느낌으로 시작하는 소설이었다. 실제로도 읽는 내내 소설이 아니라 장문으로 된 시집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세계관도 세계관이지만 작가의 필치 자체도 굉장히 건조해 바삭바삭 부서질 듯 여릿한 느낌이 강했다. 디스토피아 소설 같지 않은 느낌으로 절망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절망 안에 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회색눈으로 얼어 붙은 세계, 그 세계 속 어느 회색 도시, 그 회색 도시 속 구둣방, 그 구둣방 속의 한 남자와 남자의 생의 반의 반을 함께 살아온 흰둥이 개 반과 그 남자와 그 개에게 반한 여자 '해인'. 그들이 어떻게 만나고, 그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남았는지에 관한.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과 폭설과 얼음으로 인해 단절된 세계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려는 사람들과 회색인들의 여로에 섞여 희망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남자의 구둣방을 찾아 오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조금씩 조금씩 종말을 맞이해가는 하루, "그게 오고 있는" 마지막 그 하룻밤의 짧은 이야기였다. 종말 속 세계치고는 그 하루가 굉장히 고요하고 침착해서 절망에의 느낌이 없다는 점과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도 차분하고 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해인, 그리고 흰둥이 반이라는 인물들이 스토리 보다 깊게 각인되었다. 재미있었다 없었다는 말은 이 책에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재미를 논하기 전에 책이 얼른 끝나버렸으므로. 시작부터 끝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책의 결말이 희한할 정도로 간결하고 깨끗해 갓 지어진 새집을 보는 것만 같았다는 게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문짝 하나 없이 시멘트 냄새, 쇠 냄새, 도료 냄새 가득한 이제 막 토대가 세워져 정비에 들어간 그런 집 말이다. 종말의 그날이 어떻게 무너진 집 같지 않을 수 있는지, 글의 여명이 어떻게 그렇게 푸르른지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차고 시리고 손이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 죽은 개를 사이에 두고 천천히 숨과 온기를 나누다 스러지는 연인들을 마주하며 책을 덮으려니 나도 모르게 여름 한낮의 타는 듯한 더위가 그리워진다. 날짜 없는 그 세계 속, 끝이 바스라진 다음 어딘가에도 봄과 여름이 찾아오고 있을까. 그게 온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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