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없음 오늘의 젊은 작가 14
장은진 지음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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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온다고 한다."

ㅡ 날짜 없음, p책의 시작부터 책의 끝까지, 민음사


날짜 없음은 "그게 온다고 한다"는 서정이 넘쳐 다분히 시적인 느낌으로 시작하는 소설이었다. 실제로도 읽는 내내 소설이 아니라 장문으로 된 시집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세계관도 세계관이지만 작가의 필치 자체도 굉장히 건조해 바삭바삭 부서질 듯 여릿한 느낌이 강했다. 디스토피아 소설 같지 않은 느낌으로 절망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절망 안에 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회색눈으로 얼어 붙은 세계, 그 세계 속 어느 회색 도시, 그 회색 도시 속 구둣방, 그 구둣방 속의 한 남자와 남자의 생의 반의 반을 함께 살아온 흰둥이 개 반과 그 남자와 그 개에게 반한 여자 '해인'. 그들이 어떻게 만나고, 그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남았는지에 관한.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과 폭설과 얼음으로 인해 단절된 세계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려는 사람들과 회색인들의 여로에 섞여 희망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남자의 구둣방을 찾아 오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조금씩 조금씩 종말을 맞이해가는 하루, "그게 오고 있는" 마지막 그 하룻밤의 짧은 이야기였다. 종말 속 세계치고는 그 하루가 굉장히 고요하고 침착해서 절망에의 느낌이 없다는 점과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도 차분하고 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해인, 그리고 흰둥이 반이라는 인물들이 스토리 보다 깊게 각인되었다. 재미있었다 없었다는 말은 이 책에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재미를 논하기 전에 책이 얼른 끝나버렸으므로. 시작부터 끝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책의 결말이 희한할 정도로 간결하고 깨끗해 갓 지어진 새집을 보는 것만 같았다는 게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문짝 하나 없이 시멘트 냄새, 쇠 냄새, 도료 냄새 가득한 이제 막 토대가 세워져 정비에 들어간 그런 집 말이다. 종말의 그날이 어떻게 무너진 집 같지 않을 수 있는지, 글의 여명이 어떻게 그렇게 푸르른지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차고 시리고 손이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 죽은 개를 사이에 두고 천천히 숨과 온기를 나누다 스러지는 연인들을 마주하며 책을 덮으려니 나도 모르게 여름 한낮의 타는 듯한 더위가 그리워진다. 날짜 없는 그 세계 속, 끝이 바스라진 다음 어딘가에도 봄과 여름이 찾아오고 있을까. 그게 온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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