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물검역소
강지영 지음 / 네오픽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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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출간되었으니 꽤 오래된 소설인데 저는 존재조차 몰랐던 한국 작가 강지영님의 작품 신문물 검역소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한국 작가 책이라 몰랐을 거에요. 저 정말 한국책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일 년 통틀어 한국 작가 책을 채 한 권도 안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작가를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내 취향이 아니다라는, 정작 몇 권 읽어본 책도 없는 주제에, 고정관념으로 꽉 막힌 독서를 하던 시기가 길었으니까요. 그 때 적에 이 책을 추천 받았다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을텐데 취향의 폭도 넓어지고 시야도 트여서 그런가요. 어라라, 이 책 정말 재밌습니다.

주인공 함복배는 과거날 오줌보를 못참아 자리를 뺏기는 수모를 겪고 시험을 옴팡 망쳐버립니다. 조선시대 시험은 선착순이라 늦게 들어온 사람은 시험지도 늦게 받고!! 문제도 늦게 확인하고!! 그만큼 문제 풀 시간도 줄어들고!! 심한 경우엔 문제를 아예 못봐서 시험을 치를 수 없는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더군요. 저 같은 과민성대장증후군 환자는 과거시험은 꿈도 못꿨겠구나 싶어 책을 읽으면서 또 살살 배가 아파왔습니다. 감정이입이 심하면 이래요. 그깟 오줌 때문에 시험을 망친 함복배가 남 같지가 않더라구요. 함복배는 몰락한 양반가의 자손이라 과거 급제로 집안을 일으킬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말짱 황으로 어쩌다 보니 제주도에 신설된 신문물검역소에 대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너무 열악한 환경이라 이차저차 실망도 했지만은 임금님을 곁에서 뫼실 날을 꿈꾸며 본디 소임, 신문물검역에 힘을 쓰지요. 갓 대신 머리에 쓰는 불아자나 치질 치료 도구인 칫솔의 두 사용처, 비누를 만드는 것과 같은 해프닝도 웃겼지만 박연이라 이름 붙인 표류자 벨테브레와의 만남이나 행적이 의심스런 암행어사 송일영과의 대치, 혼인을 앞둔 처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사건, 어지자지의 기수영이나 기수영에게 원한을 가진 미호, 함복배의 연정의 대상인 연지 등과 같은 아가씨들과의 얽힘, 함복배의 수줍음, 고뇌, 질투, 엉터리 추리 등이 참말로 재미나더군요. 함복배 이 녀석은 주인공 주제에 왜 이렇게 자꾸 헛다리를 짚는지. 근데 그게 답답하지를 않아요. 보통 소설 속 주인공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지면 막 갑갑하고 짜증나고 그렇잖아요. 근데 우리 주인공 코찔찔이 함복배는 그냥 귀엽고 막 귀엽고 계속 귀엽고 그래요. 또 등장인물(?) 중에 코끼리, 코선생이 있는데요. 조선시대 귀향 가 굶어 죽은 낙타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코끼리도 실제로 조선시대에 선물로 받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 놈이 살인사건을 일으켜 제주도로 귀향을 오는데 이 녀석과 얽힌 에피소드도 참 재미납니다. 얘가 뭘 자꾸 뿌수는데 그 뿌수는 얘기가 전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비누도 참외도 수박도 먹어 뿌시고, 움막도 깔아앉아 뿌시고, 함복배도 등허리에서 날려 뿌시고, 뿌시고 또 뿌시고 계속계속 뿌셔라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어 좀 슬펐어요. 코끼리와 대화가 된다면 그 부모의 성품과 생김을 묻겠다는 코 찔찔이 주인공 함복배의 정감있는 말이 책을 덮고도 계속 생각났을 정도로 코선생의 결말이 아쉬웠습니다. 이 녀석들 파트너쉽이 좋았는데 그래도 2탄은 없겠지요?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이 책, 신문물검역소는 조선시대 후기를 배경으로 한 코믹 코지 미스터리입니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나 사라진 놉의 딸과 비슷한 분위기라고 하면 감이 딱 잡히실 거에요. 역사물이지만 가볍고 발랄하고 산뜻합니다. 사람이 죽어가도 전반적인 극의 분위기는 깨방정이에요. 의도치 않게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비글미 넘치는 주조연과 연쇄살인사건과의 만남, 그리고 은근한 로맨스와 꽉 막힌 해피엔딩까지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다 모여있는 책이라 크게 흠 잡을 구석도 없었구요. 조선명탐정과 달리 신문물검역소의 주인공 함복배의 빙구미와 찌질미 수위가 높기는 한데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보다 보면 귀엽습니다. 초기 설정인 벙어리는 당최 이해가 안가지만, 큰 떡밥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주인공 연지와의 엇갈림을 위한 소재였다고 치면 별무매력, 그래도 그 부분이 아주 짧아서 상관없어요. 인기를 반증하듯 구판은 품절되고 개정판이 새로 나왔는데요. 표지의 미소년을 보고 박보검이 팟 하고 떠올랐어요.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미날 것 같은데 어떻게 좋은 소식 좀 있으려나요. 책이 재미있어서 그런지 2차, 3차 창작물들도 기대가 됩니다. 한국 장르소설을 좋아하시고 역사 변형물(?)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잘 맞을 것 같은 책. 저도 이쪽 장르와는 화합이 잘 되겠다 하는 확신을 얻게 된 책이라 가볍게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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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로소의 분홍 벽
에쿠니 가오리 지음, 아라이 료지 그림, 김난주 옮김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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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그림책 몬테로소의 분홍 벽입니다. 직전에 벌거숭이들을 읽지 않았다면 에쿠니 가오리 책 나왔는데 뭐, 어쩌라고 하며 스윽 넘기고 말았을텐데 벌거숭이들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던 탓인지 신간 소식에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워낙에 벌거숭이들을 술술, 가볍고, 재미나게 잘 읽은 탓이겠지요.

    

에쿠니 가오리가 그린 고양이 하스카프는 연갈색의, 낙천적이고 게으른 성격의 가정집 고양이입니다. 당연히 도둑 고양이일거라 생각했던 예상을 벗어나 외려 꽤 행복한 삶을 꾸리고 있는 고양이였어요. 집도 있고, 주인마님이나 가족들과의 사이도 좋고, 등 따시고 배부르니 게으름 부리며 늘어지기에도 딱 알맞은. 물론 나태하다고 입방정 떨며 괴롭히는 못된 이웃이나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구요. 그런데도 고양이 하스카프는 감은 눈 사이로 떠오르는 몬테로소의 분홍 벽을 잊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분홍벽의 꿈을 꾸기 위해 더 게을러지고 더 나태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못 말리게 아름다운 분홍색 벽, 꼭 감은 하스카프의 눈 위로 계속해서 떠오르는 환상 속의 별. 하스카프는 이 별을 찾아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지요. 꿈은 그저 꿈으로만 남겨두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용감한 고양이거든요. 

하스카프는 주인마님께 이별을 고하고 꿈 속의 남자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몬테로소의 분홍 벽을 찾아나서지만 그 여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사자를 만나 유혹 당할까봐 겁도 나구요. 열기구가 잘못 된 방향으로 흘러가 몬테로소로의 여행이 더욱 길어지기도 하죠. 배고픔도 겪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고, 강을 지나, 또 숲을 건너서, 다시 버스를 타기도 하는 등 긴 발걸음 끝에 드디어 몬테로소의 분홍 벽에 도착을 합니다. 그 벽 앞에서 고양이 하스카프는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꿈 속의 벽이 아니라 실망했을까요? 꿈 속의 벽이지만 편안하고 따뜻한 내 집, 맛잇는 집밥, 주인마님의 손길이 그립지는 않았을까요? 몬테로소의 분홍 벽 앞에서 고양이 하스카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할 수 없는 하스카프의 결말이 저는 아주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간결한 그림책인데 분홍 벽이 주는 이미지가 아주 또렷해서 책을 읽은 밤엔 제 감은 눈 속에서도 분홍 벽이 떠오를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건 고양이 하스카프의 별이잖아요. 어째서 제 별은 보이지 않는지, 잠들기 직전 조금 슬펐던 것도 같습니다. 고양이 하스카프와 분홍 벽은 사랑스럽고, 아라이 료지의 그림체가 마음에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고양이 하스카프에게 샘도 나더군요. 에쿠니 가오리의 질투를 부르는 고양이 하스카프와 함께 저는 행복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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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왔지만
다카기 나오코 지음, 고현진 옮김 / artePOP(아르테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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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다 보니 만화책을 두 권이나 읽게 된 4월입니다. 마스다 미리의 내 누나 속편에 이어 이번엔 어쿠스틱 싱글라이프로 유명한 다카기 나오코 작 "도쿄에 왔지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책이 뙇!! 너무너무 설레는 래핑본인 겁니다. 전 래핑 책은 뜯고 싶지가 않아요. 오랫 동안 새책의 상태로 유지하고픈 본능과 읽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손가락이 꿈틀꿈틀. 처음엔 본능이 승기를 잡아 일주일 정도를 더 래핑 상태로 묵히며 요모조모로 뜯어보려 했는데요. (표지만 봐도 재밌어요. 다카기 나오코 작가가 보이시나요?) 최근 묵직한 책으로 과식한 탓에 좀 산뜻하게 입맛을 돋우는 책을 만나고 싶더라구요. 노랑, 빨강의색감과 아기자기한 그림부터가 상큼한 "도쿄에 왔지만"이 아주 딱이었죠.

다카기 나오코는 아시다시피 일러스트레이터인데요. 처음에는 어느 회사에 취직해서 그 회사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일러들을 그렸던가봐요. 근데 그 일이 그녀의 적성엔 맞지 않았던 거죠. 이십대 초반이었고,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작은 체구와 반대되는 강단도 있었던지 1년 6개월만에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도쿄로 상경을 합니다. 도쿄는 사람도 너무 많구요. 길도 엄청 복잡하죠. 생활비는 비싸고, 방은 좁쌀만하고,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이 가족과 친구는 모두 고향에. 그래도 꿈을 향해 전진 또 전진하며 알바도 하고 은행 코너에 작품 전시도 해가며 됴쿄살이에 적응하는 잔잔한 에세이형 만화였어요. 에세이는 잘 못읽는 편인데 만화여서 그런가요. 술렁술렁 어찌나 잘 읽히던지. 만화라 글밥 자체도 적긴 했지만 단순한 그림체처럼 그녀의 이야기도 억지 감동이나 눈물 짜는 고생담 없이 담백한 느낌이라 더욱 좋았던 것 같아요. 비슷한 일상물인 마스다 미리의 작품과도 느낌이 좀 달랐는데요. '내 누나 속편'이 얼렁뚱땅한 유머로 웃음을 자아냈다면 '도쿄에 왔지만'은 지방에서 갓 상경한 아가씨의 쭈뼛쭈뼛하고 무섭고 설레고 또 어쩐지 부럽기도 한 그 느낌을 너무 잘 표현해서 피식 웃게 되더라구요. 저도 지하철도 없는 지방민인지라 서울도 아니고 혼자 부산 가서 처음 지하철 탔을 때의 긴장감은 여태 잊지도 못해요. 서울은 아직도 갈 때마다 긴장되구요. 사람 사는 데 다 똑같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막 울렁울렁 하더라구요. 이건 다른 관광지 갈 때도 마찬가지긴 하지만요. 배가 아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배가 막 부글부글할 정도로 긴장 백배. 그래서 고향 떠나 살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도쿄에 왔지만의 정서에는 마구 공감이 가더라구요. 타향살이 설움, 겪어본 적은 없지만 막 알 것 같은 그 느낌적 느낌 있잖아요. 특히나 좋았단 장면 하나를 꼽자면 아버지가 고향에서 올라와 다카기 나오코 작가와 며칠을 보내는 장면이었는데요. 티비선도 고쳐주고, 쌀도 10kg 사서 옮겨 주고, 대나무 발도 걸어주고 하는 그런 소소한 장면들이 열 페이지 백 페이지의 상세한 서술보다 더 감동적이고 예쁘더라구요. 이런게 청춘일상물, 만화 에세이의 묘미인가 했습니다.

도쿄는 복잡하지만 도쿄에 왔지만은 간결합니다. 두껍지도 않구요. 말씀드렸다시피 깔끔한 만화책으로 진땀 빼는 스토리도 아니랍니다. 심심한 날, 마음도 어지럽고, 이렇게 저렇게 머리 쓰기도 귀찮고, 묵직한 책은 부담스럽고, 소설도 싫고, 에세이는 좋지만 글밥 많은 책은 별로다 싶을 적에 가벼운 마음으로 쓰윽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초판 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 사은품 마그네틱 자석도 주거든요. 이 녀석도 아주 귀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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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지 마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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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모가 어른이 되어 돌아온 줄 알았다.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 수 있나요?" 묻고는 엉엉 울음을 터트렸던 자기 앞의 생, 14살의 그 성숙하고도 아름다웠던 아이가 성년이 되면 꼭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프랑스 태생의 병약한 아랍계 소년. 부족한 수의 내장기관과 성장할수록 비대해지는 폐, 외발의 타고난 장애인. 장기를 수집하듯 병원을 떠돌며 아이를 치료하다 끝끝내 자신의 폐를 이식하고 떠나간 모친.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할 줄 알았던,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될거라 생각했던 청년의 다섯 가지 꿈이 인상적이었다. 몽블랑 울트라트레일에서 외다리 영웅 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하기, 자식을 갖기, 죽을 때 나를 위해 울어주는 여인을 얻기, 세상에 빚을 갚기. 자말이 보여주고 풍기는 서정 그 어디에선가, 자말과 모나, 오세안의 관계 어디에선가 자꾸만 모모가 떠올랐다. 스릴러물인데 연쇄살인이라는 그 소재보다 추악한 악당보다 가질 수 없는 별 같은 여인을 사랑하고 그 사랑과 생명까지 맞바꾼 어리석은 남자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가여운 아이가 가여운 남자가 되어 돌아온 듯이 안타까워서. 

"우리는 살면서 악질 선생만큼이나 사악한 신을 무수히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투명인간이고 혼자일 뿐이니까. 원하는 쪽으로 동전을 떨어지게 하려면 다시 동전을 던져야 한다. 그것도 자주, 아주 많이, 쉼 없이 던지고 또 던져야 한다. 이것은 확률의 문제다. 결국에는 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p26-27)

생이 그닥 편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문구와 함께 푸른빛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과의 행복한 잠자리를 앞에 두고 자말은 기억의 편린 속으로 침잠한다. 마치 운을 시험하듯 그의 앞에 연속적으로 펼쳐졌던 고난들. 연쇄살인범의 누명의 쓰고 쫓겨야만 했던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그리고 끝끝내 이겨낸 그가 쟁취했던 한 여인... 이포르에서 보내는 겨울 휴가 동안 빼놓지 않고 달리기를 했던 어느 아침, 자말은 꿈에서나 그렸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속옷이 다 보이도록 찢어진 드레스, 상처투성이의 눈물 젖은 얼굴, 벼랑 끝에서 춤추듯 주춤한 발길에도 혼몽한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었던 여자 마갈리 베롱이었다. 죽음으로 내달리려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말이 내민 버버리 빨간 캐시미어 스카프는 그러나 결국 절벽을 뛰어내린 마갈리 베롱의 목에 매여 자말을 살인 용의자로 몰아간다. 성폭행 후 스카프로 목을 졸라 여성을 살해한 후안무취한 범죄자.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다중 살인, 연쇄 살인의 용의자다. 이미 십년 전 이포르에서는 모르간 아브릴과 미르티 카뮈라는 아름다운 소녀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해당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미해결 사건으로 공소시효가 완료되어 파묻힐 뻔한 그 사건이 마갈리 베롱의 죽음으로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분명 스카프를 내밀었을 뿐인데 절벽을 뛰어내리는 순간 그걸 제 스스로 목에 감았다는 설정 자체를 독자도 주인공 자말도 이해할 수 없다. 음모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혼란한 사건의 방향성이 긴장감을 높이는 와중에도 선의로 옳은 일을 한 자말이 의심받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다. 또한 이 격렬한 억울함이 혹 반전에 대한 암시인 것은 아닌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의심스럽다. 목격자 중 한 명은 실종되었고, 다른 한 명을 기억이 온전치 않다. 과거 사건을 알려주는 의문의 소포는 숙소와 도피처와 도피차량 안으로 속속들이 도착하며 그를 압박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경찰도, 우연히 경찰청에서 마주쳐 함께 밤을 지낸 빨간 머리 아가씨 모나도. 그 밖의 관계자들, 카르멘 아브릴(살해당한 모르간 아브릴의 어머니)와 프레드 생미셸(미르티 카뮈의 약혼자), 오세안 아브릴(모르간 아브릴의 자매), 자닌 뒤부아(미르티 카뮈의 할머니), 그리고 미르티 카뮈의 친구 알리나 마송과의 얽힘까지.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무너진 절벽 속에서 발견한 의문의 해골 세 구에 대한 호기심까지 더해져 속도감 있는 전개가 아닌데도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밝혀지는 여러 인물들의 정체가 놀랍고 스릴러에 익숙치 않은 사람으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반전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재미있는 작품이다. 극에 몰린 자말의 의심과 어딘지 찌질한 여러 면면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완전한 정신과 불완전한 육체와 꿈에 대한, 사랑에 대한 탐욕스런 욕심이 일견 사랑스럽게 느껴져 애정이 가기도 했고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으냐 한탄이 나오다가도 그의 떨어지는 확률과 희박한 운이 그저 안쓰러웠던 자말, 감성 스릴러의 정점을 찍는 주인공이었다.  

자말의 다디단 꿈이 아름답게 완성되면 좋았을텐데. 스릴러 독자를 실망시키는 해피엔딩이라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어쩐지 아쉬운 끝에 한숨 쉬다가도 또 이 아쉬운 결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맥주를 들이키며 한 번, 또 한 번 이 책을 읽고, 내일 다시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싶어 결국엔 합당한 결말이었노라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자말 앞의 생이었음을.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라는 질문에 대한 모모와 닮은 남자 자말의 답이었음을. 자기에게 필요한 여자가 아니라 치명적이게 아름다운 여자에 도취되는 미혹 또한 인정하기 싫지만 사랑이라고. 이포르의 회색빛 절벽과 얼어붙은 땅, 차가운 비바람, 거센 파도, 붉은색 캐시미어 스카프와 절벽을 달음박질하는 여자, 사랑과 우정, 배신, 얼어붙은 옷과 추위를 녹이는 뜨거운 밤, 등대 같이 높은 방, 외발의 사내 위로 쏟아졌던 달빛이 잊을 수 없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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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 속편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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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만나는 마스다 미리의 책입니다. 워낙 팬이 많은 작가라 한번씩 올라오는 늘 좋다는 리뷰에 혹하기는 했는데 너무 많은 책에 뭐부터 읽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이미 월드가 구축된 작가시라 시작하기가 두려운 느낌이기도 하구요. 한 권 사면 줄줄이 사모아야 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 거기다 결정적 한방이 없다고나 할지.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없어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출판사 책 소개란에 올라온 봄꽃과 어울리는 분홍분홍한 책 사진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요즘 점심이면 매일 같이 산책이니까 공원에 커피 한 잔 사들고 가서 책도 읽고 사진도 찍고 해야지 했거든요. 웬걸, 너무 궁금해서 펼쳐든 이 밤에 끝 페이지까지 홀랑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담백하고 깔끔하고 너무 재밌더라구요.


전 만화 에세이라고 해서 만화 한 바닥, 산문 한 바닥 이런 구성일 줄로 알았거든요. 마스다 미리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면 그런 것도 몰랐어? 하실 수도 있지만 저 같이 생각하는 독자도 많겠지요? 많을 거에요 아마. 전 정말 깜짝 놀라서 오잉? 했습니다. 요즘 나오는 웹툰 류의 느낌도 아니구요. 저희 어릴 때 유행이었던 뚱딴지 만화일기 같은 세로 네 칸의 만화책이라 추억이 스멀스멀, 갑자기 신이 나더군요. 만화책 오랜만에 보거든요. 최근에 구입한 우주 만화 플라네테스는 아직 비닐도 안뜯은 상태라 올 해 처음 읽는 만화책 되겠습니다. 마스다 미리, 영광이에요.

내 누나 본편은 읽어 보지 못해서 이번 속편과의 비교는 불가능이지만 이번 편에서 마스다 미리는 연애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30대 베테랑 직장인 누나 지하루와 풋내기 샐러리맨 남동생 준페이의 짤막짤막한 대화가 주인데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준페이 왈 "여자들은 예쁘다는 말을 참 많이 해. 손수건 한 장에도 감격하고 하루 종일 예쁘다는 말을 달고 살잖아." 그렇지. 준페이의 그 말엔 저도 고개를 끄덕끄덕 했습니다. 의식하진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전 못해도 하루에 쉰 번쯤은 예쁘다는 말을 하는 것 같거든요. 누나 지하루도 당연하다는 듯 맞다고 대꾸해요. 그리고 자하루의 그 다음 말에 저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이거 내 얘기잖아 하구요. 

"어이, 준페이. 여자에게 예쁘다는 이미 말이 아니야."
"그럼 뭔데?"
"호흡의 일부.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죽는 거야,"
"그럴 리가..."
"아, 또 있다. 호흡의 일부."
"뭔데?"
"살 빼고 싶어."
"........"

 ㅡ 내 누나 속편, p7, 이봄  


대체로 거의 모든 대화의 느낌이 딱 이래요. 그러니까 막 지글지글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재미가 있는 만화는 아닌겁니다. 자극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꼭 내 얘기인 것만 같거든요. 일부는 동의할 수 없지만 대체로 내 맘 속에 꼭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대화를 한단 말이지요. 그 공감과 동의에서 잔잔한 웃음이 터지고 소박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맞아맞아, 내 말이 이 말이라니까.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군 (뭔가 야한 얘기엔 속웃음, 흐흐흐) 여동생이 아니라 준페이라는 남동생과의 대화이기에 더 재미난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남자와 여자는 생각의 포인트가 영 다르기도 하니까 준페이가 이해 못하는 걸 짚어가는 것도 웃기더라구요. 예컨데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여자가 좋다는 준페이의 말에 "넌 재미없잖아, 너한테 잘 보이려고 재밌는 척 연기하는건데도 좋다 이거야?"는 지하루의 대답에 준페이가 "대답하기 싫어!" 하며 팽 하는 모습 같은 게요. 물론 애인을 두고도 다른 남자와 키스까지 가는 데이트를 하는 얘기는 좀 별로. 이것은 질투인가!도 생각했지만 (난 한 명도 없다구!!) 그래도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제게도 남동생이 있는데요. 가끔 남동생과 맥주 한 잔 마시며 대화할 때가 있어요. 물론 지하루와 준페이만큼 자주 대화하거나 이렇게 연애사, 세상사 핵심을 딱 짚는 유쾌발랄한 대화는 아니지만요. 이 책을 보고 나니 동생 붙들고 얘기 좀 하고 싶더라구요. 물론 붙드는 순간 귀찮다고 도망가겠지만. 그래서 대신에 내 누나를 한번 더 봤습니다. 재독해도 또 금방 읽어요. 만화니까요!! 남동생은 하나로 족하고 지하루 같은 언니나 한 명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내 누나 속편의 초판 한정 코스터에요. 예쁘죠? (보세요. 또 예쁘다고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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