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지 마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모모가 어른이 되어 돌아온 줄 알았다.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 수 있나요?" 묻고는 엉엉 울음을 터트렸던 자기 앞의 생, 14살의 그 성숙하고도 아름다웠던 아이가 성년이 되면 꼭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프랑스 태생의 병약한 아랍계 소년. 부족한 수의 내장기관과 성장할수록 비대해지는 폐, 외발의 타고난 장애인. 장기를 수집하듯 병원을 떠돌며 아이를 치료하다 끝끝내 자신의 폐를 이식하고 떠나간 모친.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할 줄 알았던,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될거라 생각했던 청년의 다섯 가지 꿈이 인상적이었다. 몽블랑 울트라트레일에서 외다리 영웅 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하기, 자식을 갖기, 죽을 때 나를 위해 울어주는 여인을 얻기, 세상에 빚을 갚기. 자말이 보여주고 풍기는 서정 그 어디에선가, 자말과 모나, 오세안의 관계 어디에선가 자꾸만 모모가 떠올랐다. 스릴러물인데 연쇄살인이라는 그 소재보다 추악한 악당보다 가질 수 없는 별 같은 여인을 사랑하고 그 사랑과 생명까지 맞바꾼 어리석은 남자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가여운 아이가 가여운 남자가 되어 돌아온 듯이 안타까워서. 

"우리는 살면서 악질 선생만큼이나 사악한 신을 무수히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투명인간이고 혼자일 뿐이니까. 원하는 쪽으로 동전을 떨어지게 하려면 다시 동전을 던져야 한다. 그것도 자주, 아주 많이, 쉼 없이 던지고 또 던져야 한다. 이것은 확률의 문제다. 결국에는 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p26-27)

생이 그닥 편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문구와 함께 푸른빛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과의 행복한 잠자리를 앞에 두고 자말은 기억의 편린 속으로 침잠한다. 마치 운을 시험하듯 그의 앞에 연속적으로 펼쳐졌던 고난들. 연쇄살인범의 누명의 쓰고 쫓겨야만 했던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그리고 끝끝내 이겨낸 그가 쟁취했던 한 여인... 이포르에서 보내는 겨울 휴가 동안 빼놓지 않고 달리기를 했던 어느 아침, 자말은 꿈에서나 그렸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속옷이 다 보이도록 찢어진 드레스, 상처투성이의 눈물 젖은 얼굴, 벼랑 끝에서 춤추듯 주춤한 발길에도 혼몽한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었던 여자 마갈리 베롱이었다. 죽음으로 내달리려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말이 내민 버버리 빨간 캐시미어 스카프는 그러나 결국 절벽을 뛰어내린 마갈리 베롱의 목에 매여 자말을 살인 용의자로 몰아간다. 성폭행 후 스카프로 목을 졸라 여성을 살해한 후안무취한 범죄자.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다중 살인, 연쇄 살인의 용의자다. 이미 십년 전 이포르에서는 모르간 아브릴과 미르티 카뮈라는 아름다운 소녀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해당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미해결 사건으로 공소시효가 완료되어 파묻힐 뻔한 그 사건이 마갈리 베롱의 죽음으로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분명 스카프를 내밀었을 뿐인데 절벽을 뛰어내리는 순간 그걸 제 스스로 목에 감았다는 설정 자체를 독자도 주인공 자말도 이해할 수 없다. 음모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혼란한 사건의 방향성이 긴장감을 높이는 와중에도 선의로 옳은 일을 한 자말이 의심받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다. 또한 이 격렬한 억울함이 혹 반전에 대한 암시인 것은 아닌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의심스럽다. 목격자 중 한 명은 실종되었고, 다른 한 명을 기억이 온전치 않다. 과거 사건을 알려주는 의문의 소포는 숙소와 도피처와 도피차량 안으로 속속들이 도착하며 그를 압박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경찰도, 우연히 경찰청에서 마주쳐 함께 밤을 지낸 빨간 머리 아가씨 모나도. 그 밖의 관계자들, 카르멘 아브릴(살해당한 모르간 아브릴의 어머니)와 프레드 생미셸(미르티 카뮈의 약혼자), 오세안 아브릴(모르간 아브릴의 자매), 자닌 뒤부아(미르티 카뮈의 할머니), 그리고 미르티 카뮈의 친구 알리나 마송과의 얽힘까지.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무너진 절벽 속에서 발견한 의문의 해골 세 구에 대한 호기심까지 더해져 속도감 있는 전개가 아닌데도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밝혀지는 여러 인물들의 정체가 놀랍고 스릴러에 익숙치 않은 사람으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반전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재미있는 작품이다. 극에 몰린 자말의 의심과 어딘지 찌질한 여러 면면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완전한 정신과 불완전한 육체와 꿈에 대한, 사랑에 대한 탐욕스런 욕심이 일견 사랑스럽게 느껴져 애정이 가기도 했고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으냐 한탄이 나오다가도 그의 떨어지는 확률과 희박한 운이 그저 안쓰러웠던 자말, 감성 스릴러의 정점을 찍는 주인공이었다.  

자말의 다디단 꿈이 아름답게 완성되면 좋았을텐데. 스릴러 독자를 실망시키는 해피엔딩이라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어쩐지 아쉬운 끝에 한숨 쉬다가도 또 이 아쉬운 결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맥주를 들이키며 한 번, 또 한 번 이 책을 읽고, 내일 다시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싶어 결국엔 합당한 결말이었노라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자말 앞의 생이었음을.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라는 질문에 대한 모모와 닮은 남자 자말의 답이었음을. 자기에게 필요한 여자가 아니라 치명적이게 아름다운 여자에 도취되는 미혹 또한 인정하기 싫지만 사랑이라고. 이포르의 회색빛 절벽과 얼어붙은 땅, 차가운 비바람, 거센 파도, 붉은색 캐시미어 스카프와 절벽을 달음박질하는 여자, 사랑과 우정, 배신, 얼어붙은 옷과 추위를 녹이는 뜨거운 밤, 등대 같이 높은 방, 외발의 사내 위로 쏟아졌던 달빛이 잊을 수 없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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