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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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응? 러시아 커피? 조선시대? 김소연...... 아닌가? 주진모에 박휘순 나오는 그 영화잖아 하고 검색해 보니 영화의 원작 소설이 맞았다. 가비라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고 티비에서 방영하는 걸 얼핏 스쳐 본 기억이 있다. 광고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 제목도 깜깜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별 관심이 없는 작품이었는데 이걸 읽어야 하다니, 그것도 책으로!! 하며 잠깐 좌절했다. 조선시대 로맨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같은 건 좋아도 심각한 역사 소설은 다 별로라고 생각하는지라 고종도 나오고, 아관파천에, 이완용, 일본-러시아 사이에서 정쟁 얽히고 이러면 이야기가 복잡하겠는 걸, 아이코 머리야 하며 책에 대한 기대나 설렘도 조금 식어버렸다.  페이지 수도 적고 양장인데도 가볍다는 이유로 노서아 가비를 들고 나온게 살짝 후회가 됐다.

영화에서 얼핏 본 김소연은, 그러니까 영화 속의 따냐는 서양식 복식까지 모두 다 하여 어딘지 청승 맞은 사연으로 똘똘 뭉쳐진 여성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노서아 가비의 따냐는 내가 예상했던 그런 류의 여성이 아니었다. 쾌걸 조로가 여성화 된 느낌이라고 하면 적합한 비유려나. 딱 떨어지게 대입할만한 인물이 생각나지 않는데 여하간에 당혹스러울만큼 독특한 여성이었다. 켜켜히 쌓인 사연으로만 보면 청승은 늘어지고 팔자는 오그라져야 마땅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일테면 배경인 개화기 조선 말, 아비는 나라 패물을 빼돌리다 사망한 역관이고, 그 자신은 열 아홉에 노비 신세를 피해 아버지 친구 손을 잡고 압록강을 건넌다. 그 밤 자신의 방에 숨어 든 아버지 친구 둘을 제 손으로 헤치우기까지 하며 평범한 중인 출신의 여성이였던 그녀는 길거리의 막나가는 인생살이로 편입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감성 꽤나 자극하는 소설이겠구나 싶지만 결코 아니올시다였다. 사실 아버지 친구들이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오는 장면까지만 해도 나는 살짝 불안했다. 가장 싫어하는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겠구나 짐작해 버린 탓이다. 불운한 조선 여인에게 그럴 듯한 사연 하나를 안겨서 깊은 한을 끌어낼 것이라고. 아주 쉽게, 자극적으로, 여주인공의 불운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를 갖다붙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불행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사건, 열 아홉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 아비처럼 대하라는 친구 둘, 야심한 밤, 불법 침입. 상상할 수 있는 건덕지라야 그 친구들에게 겁간을 당하거나 중국인에게 팔려가 첩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무지렁뱅이 사내의 매 맞는 아내가 되었다가 도망하거나 이지 않겠느냐고 추잡스런 이야기로 쉽게 단정해버렸다. 그러나 여기, 이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시작된 내 빈약한 상상력에 대한 반전으로 노서아 가비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재미없겠다에서 얼른 다음 장을 읽고 싶다로.

아버지 흉내내는 놈들 모두 사기꾼이야. 그런 놈들한텐 이걸 선물해라. (p24)

살아 생전 부친이 딸에게 경고하며 선물했던 폭탄, 따냐는 그 폭탄을 터트린다. 아비처럼 대하라는 그들의 말에 흰눈을 뜨고 살금살금 뒷문으로 나와 제 방을 살피는 조심성 많은 소녀, 그 의심에 다름없이 침입하는 남자들에게 한 치 망설임 없이 날아간 폭탄, 장정 스물도 날려버릴 어마어마한 위력을 뒤로 하고 살아남기 위해 쿨하게 사기꾼이 되고 시원하게 남을 등쳐먹고 유쾌하게 뒷통수를 치며 따냐는 살아간다. 러시아어도 잘하고 중국어도 잘하고 낙관 파는 기술도 뛰어난데다 그녀 자신의 타고난 매력까지 더하여 대동강 물을 팔았던 김선달처럼 러시아 숲까지 팔아넘기며 대사기꾼으로 레벨업!  말발도 어찌나 좋은지 (나는 잘 못느꼈지만 서술에 따르면) 청나라 황제 애첩도 됐다가 러시아 황제에게 알현하는 지위도 됐다가 아프리카도 가고 유럽도 가고 별 짓 다했노라 뻥을 치지만 의심하는 사람도 하나 없다. 외려 이 나라 저 나라 귀족들이 껌뻑 죽다 못해 사기 치려고 만난 놈이 청혼까지 하는 지경이다. 그런 사기꾼으로서의 삶에 그녀 자신이 회의감을 느끼거나 후회를 하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과거에 미련없이 현재에 충실하게. 사기꾼으로서의 깨달음과 경험들을 잊지 않은 채, 옳고 그름과는 좀 무관하더라도, 아주아주 성실한 범죄인의 삶을 산다. 곁다리로 남자 하나가 나오지만 ㅡ 이반이라고 조선 사람인데 역시 사기꾼이다ㅡ 여느 소설과 달리 이 남자와의 사랑에 안주하지도 그의 배신에 가슴 아파하지도 않는다. 쓸모없어진 것은 언제든지 버릴 준비를 하고, 어디로든 떠날 준비를 하며, 먼저 배신하는 것도 주저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모험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여자 따냐. 한국 소설에서는, 적어도 내가 본 소설에서는, 이런 여주인공은 없었다. 남자 주인공을 뒷발차기로 친히 날려버리는 여주인공이라니!! 사랑 앞에 흔들리지 않은 이가, 살아남기를 선택한 이가, 먼저 손을 써서 움직인 이가  그가 아니라 그녀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고종이 등장하고, 고종의 바리스타가 되어 러시아 커피를 타고, 고종과 우정을 쌓고, 그 밖의 남다른 커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좋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암울한 시대적 배경에도 가볍고 산뜻하고 경쾌한 삶을 살아가는 따냐라는 사람이 그 자체로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가져나간 책이 이 책 한 권 뿐이라 어쩔 수 없이 읽는다는 느낌이었는데 읽다 보니 어느 새 버스 정류장에서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쩐지 창피해 잘 읽지 않는다.) 버스 기다리는 5분, 10분이라도 이 책을 안 읽고 그저 서있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정도의 재미였다. 한, 청승, 눈물 절절, 여성의 인격을 말살하는 류의 사건, 구구절절한 회한, 이런 것들이 없어서 더욱 좋았고 말이다. 아참 책이 따냐의 성격처럼 아주 간결하다. 큰 따옴표, 작은 따옴표조차 모조리 생략돼 있는 핵심만 짚은 대화들을 보면 필요없는 건 점 하나도 넣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느껴진다. 내 리뷰도 좀 그러면 좋으련만. 어쨌든 신문물검역소에 이은 한국 역사 소설과의 성공적인 만남, 아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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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5-0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모금씩 마시고 싶은 책‘. 아주 매력적인 표현이네요. 읽고싶어지네요.
 
여우가 잠든 숲 1 스토리콜렉터 5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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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 여우가 잠든 숲입니다. 독일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작가지만 제가 스릴러 입문한지 얼마 안되어 타우누스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에서야 만남이 성사되었습니다. 짝짝짝짝! 

타우누스라는 게 저는 주인공 이름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지명이더라구요. 작가의 고향이자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11세부터 성장한 곳) 전남편의 고향이며 30년 넘게 삶의 터전이었던 독일의 작은 지역을 배경으로 한 범죄 수사 시리즈였어요.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첫 느낌은 "너무 재미있다" 그리고 "너무 아쉽다" 였습니다. 작가의 책이 번역되기 시작한 11년도부터 읽기 시작했으면 시작점부터 작가의 성장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탐독의 기쁨을 누렸을 텐데요. 시리즈와 함께 그 필력이 나날이 상승한 작가라는데 그 처음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합니다. 이렇게나 매력적인 작가를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요! 살짝 땅을 치고 있어요. 어쨌든 아주아주 재미있고, 긴장감이 넘치고, 드라마틱한 여러 인물들과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웃들과 그들의 다양한 욕망, 절제되지 않은 쾌락에의 충동이 어떤 식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다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굉장한 수사물이었어요. 자꾸만 저를 속이는 떡밥들이 주어져서 얄밉기도 했지만요. 명불허전 기승전떡밥 구성은 이 놈인가 하면 다른 놈이 나타나고, 아 이 놈이구나 하면 또 다른 놈이 연쇄적으로 나타나 정말 엔딩까지 범인을 알아챌 수 없는, 그래서 제 맘 속 추리 화력을 펄펄 끓게 만드는 비아그라 같은 책이었습니다. 아침도 안먹고!! (그러나 점심은 먹었습니다) 해 떨어지기 직전까지!! 정말 이 책만 읽었거든요. 요즘의 제 집중력으로는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지요. 

여우가 잠든 숲은 이전 시리즈에서부터 쭉 파트너였던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강력계 형사 보덴슈타인과 피아의 관할 구역 캠핑장에서 화재가 발생하며 시작합니다. 처음엔 근방에 있었던 방화사건의 연속인가 했으나 다른 살인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요. 마치 타살이 아닌 듯이 위장까지 해서요. 캠핑장 차량에서 불타 죽은 클레멘스는 보덴슈타인의 어린 시절 친구 에드거의 형이었고, 말기암 환자로 죽을 날이 얼마 안남은 채 질식사 당한 로제마리는 에드거의 어머니, 그리고 목 매달린 채 발견된 신부님은 죽기 전 로제마리의 고해성사를 들은 분이셨지요. 로제마리에게는 비밀이 있었고 그 비밀을 공유한 아들과 신부가 함께 살해 당했다, 그럼 그 비밀은 뭘까? 이야기는 그 비밀을 추적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과거의 사건, 수사반장 보덴슈타인의 어린 시절 실종된 친구 아르투어와 여우 막시와 연결이 되면서요.

안타깝게도 친구 아르투어와 막시의 살종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는데요. 보덴슈타인에게 찝찝한 추억을 남긴 초등 동창들, 이들은 어린 시절 고양이 및 각종 짐승들을 죽이고 괴롭히며 소시오패스적인 면모를 보였죠. 특히 이들 괴롭힘의 대상에 아르투어와 막시가 있었으므로 용의자 1순위입니다. 그리고 성장한 그 동창들의 복잡한 가족사에 얽힌 부모, 형제, 자녀들 또한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용의선상에 올라가죠. 문제는 시골 마을 특유의 폐쇄성으로 수사가 쉽지 않은데다 목격자 엘리아스와 펠리치타스, 또다시 벌어진 살인미수 사건 등이 수사에 혼선을 더한다는 거에요.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서 의뭉스러운 기색이 느껴져 한 명 빠짐없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인구도 많지 않은 좁은 마을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는거냐 싶을 정도로 동네가 엉망이더군요. 그 때문인지 수사관인 보덴슈타인과 피아의 비중도 주인공들 치고는 참 적었는데요. 조연들 한 명 한 명에 각기 다 사연과 역할들을 부여해서  비슷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 때문에 주인공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 건덕지가 없더라구요. 주조연 구분없이 인물 면면으로 이렇게 두루 살피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어 좀 신기했습니다. 로맨스는 조연 비중이 쓸데없이 커지면 주연들 로맨스가 줄어서 짜증나는데 스릴러라는 장르 특성인지 작가의 힘인지 그런 느낌은 전혀 없더군요. 무엇보다 정말 막판까지 범인을 아예, 완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는 거.  범인이 이 사람이었다고?!! 하며 놀라게 되는 그 반전 하나와 프롤로그의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들이라는 두 번째 반전까지 더하여 저는 정말 엄청나게 놀라버렸습니다. 17년에 이보더 더한 반전 미스터리를 접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을 정도의 대충격!이었다고 정말 자신있게 말씀드려요. 

재미가 있어서 또 리뷰가 길어졌습니다. 알고 있는 독자라면 두 번 말하기 입 아프고 모르는 독자라면 입 아프더라도 마구 추천입니다, 정말 추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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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의 모험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26
마크 트웨인 지음, 이미정 옮김, 천은실 그림 / 인디고(글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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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톰 소여를 읽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요. 인디고에서 요정 같이 귀여운 아이들을 표지로 한 새 책이 나와서 얼떨결에 톰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톰 소여 이 녀석 아주 반갑다! 허크도!! 두 아이 중 누가 허크고 누가 톰일 것 같나요?? 참고로 톰은 밀짚모자를 쓰고 다닌답니다.


제가 처음 만난 톰과 허크는 애니메이션 세계명작을 통해서였어요. 30대분들 중에는 이 책 아시는 분이 꽤 될 것 같은데 맞나요?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 하이디, 엄지공주, 백조왕자, 장화요정(? 도무지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구두장이 할아버지를 대신해 구두를 만들어주는 요정들 이야기), 사랑의 학교, 십오 소년 표류기 같은 동화들을 알게 한 전집이었죠.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기 때문에 굉장히 얇고 단순하게 이야기가 풀어져 있어요. 차마 요약집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두께에 기억력도 꽝이라 이 녀석들을 그저 꾸러기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다시 만난 톰과 허크는 세상에나 단순히 장난꾸러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말썽꾸러기들이라니요. 폴리 이모의 회색머리가 며칠 새에 하얗게 세어버리는 일이 불가능은 아니겠다 싶을 정도의 스케일로 사건사고를 칩니다. 제가 엄마라도 저 애를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걸까 하고 가슴앓이 꽤 했겠더라구요. 깜냥도 안되면서 내가 무슨 생각으로 애를 낳았을까 하고 잠깐씩 후회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정도로 천방지축이거든요. 383 페이지의 그리 두껍지 않은 양에도 벌써 집 나가 죽을 뻔한 일이 두 번이나 있습니다. 아니, 자칫 목격자로 살해 당했을지도 모를 첫 번째 사건까지 하면 도합 세 번이군요. 혹 톰 소여를 한 번도 안읽어 본 분들을 위해 톰의 모험 세 가지를 간략하게 소개할게요.

사건 1. 인디언 조의 살인사건

허크의 사마귀를 떼어내기 위해서 밤의 공동묘지를 찾은 톰과 허크는 인디언 조의 살해사건을 목격하게 되요. (여기서 등장하는 19세기 각종 미신들이 웃기고 재미납니다. 요약집이나 그림책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다양한 주술에 깜짝 놀라실 거에요.) 인디언 조는 알콜 중독의 심신허약자 머프 포터의 손에 칼을 들려 마치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꾸며요. 아이들은 그 장면을 목격하고도 조의 손에 죽게 될까봐 이 비밀을 평생 안고 가자고 피의 맹세를 하지요. 머프 포터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서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톰과 허크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두가지가 톰이 겪는 모험의 가장 큰 줄기에요.

사건 2. 가출

톰과 허크, 조는 어른들의 꾸지람으로 집을 나가 해적이 되기로 결심해요. 조 이 친구는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혹 애니메이션 세계명작 보신 분들 조도 그림책에 등장했나요? 저는 톰과 허크 두 아이만 가출했는 줄 알았어서 잠깐 배신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찌됐든 이 세 아이는 내가 죽으면, 내가 집을 나가면 엄마가 또는 가족이 또는 동네 어른들이 후회를 하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뽑겠지? 하는 그 시절 우리도 한번씩은 했을 생각으로 집을 떠나요. 저도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나면 엄청 아팠으면 좋겠다, 내가 엄청 아프면 엄마가 나 혼낸 거 후회하겠지 하며 바라곤 했던 터라 그 또래 아이들 특유의 생각을 어쩜 이렇게 잘 꼬집어 표현해 놨나 싶어 마크 트웨인이 신기하더라구요. 그 신기함과 유유히 흐르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절인 햄 등으로 행랑을 꾸린 채 뗏목을 타고 떠나는 모험이 아주 낭만적이라 전 여기 가출 얘기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어요. 벼락 맞아 죽을 뻔한 일만 제외하면요.

사건 3. 톰과 베키의 동굴실종사건

마지막까지 사건을 일으키지 않으면 톰이 아니지요. 톰과 여자친구 베키는 놀라간 동굴에서 탐험에 나섰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아요. 하마터면 굶어죽을 뻔한 이 아이들이 어떻게 동굴을 탈출해서, 어떻게 조를 잡고 (의도치 않게), 어떻게 보물을 찾아 부자가 되는지 아주 상세하게 알려드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꾹 참겠습니다. 하여튼 이 녀석들 정말이지 대단했다니까요.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읽다 보면 톰과 허크를 꼭 끌어 안고 뽀뽀를 해주고 싶어집니다. 내가 이 놈을 왜 낳았을까 하다가 또 천사같이 예쁘고 자랑스런 아이의 행동에 자식 낳길 잘했지 라고 생각하는 우리네 엄마의 마음을 아주 쬐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빨간머리 앤과 비슷한 시대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어딘지 비슷한 느낌들이 있습니다. 학교 생활이라던지, 학예회, 시 낭독, 남자아이 여자아이를 함께 앉히는 벌, 선생님께 벌이는 장난, 아이들의 연극놀이 등에서 앤 생각이 많이 났어요. 19세기 미국 배경을 좋아하시는 분이나 어린 친구들의 유쾌한 모험활극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 고전 명작 톰 소여의 모험도 틀림없이 마음에 드실 거에요. 그림책에서 딱 줄거리만 알게 했던 사건들 이외에도 톰이 일으키는 각종 말썽들, 입만 열었다 하면 쏟아지는 허풍과 뻥, 거짓말, 친구들과의 우정, 첫사랑 베키와의 갈등 (물론 그 전에도 사랑을 고백했던 에이미가 있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노라며 이 어린 녀석이 부정하니 그런 걸로 합시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가출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펼치는 놀이와 자유 그 천진난만함에 휩쓸리면 마치 어릴 적 그 시절로 돌아간 듯이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해져요. 저는 이런 류의 말썽은 하나도 일으키지 않는 얌전한 책벌레 여자아이였지만 그 시절 제 마음 속에도 이런 모험을 하고 싶다는 두근두근한 욕망이 있었거든요. 어른이 된 지금도요. 실행에 옮기지 못할 낭만들에 대한 대리만족감으로 책을 읽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기분이 좋아져요. 무엇보다 이 녀석들은 그저 말썽꾸러기에 삐뚤어지기만 한 아이기 아니거든요. 그랬다면 톰도 허크도 이토록 오랜 시간 사랑받지는 못했을걸요. 공부는 안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영리하고, 다정하고, 때때로 드러나는 아이다운 순수함과 선한 본성을 가진 톰이기에 또 자유를 갈망하는 허크이기에 백년이 넘도록 내내 사랑받고 있는 거겠지요. 인디고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번역판도 나오면 좋겠다고 은근하게 압력을 행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아이들과의 만남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섭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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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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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부리나케 읽혀서 불티인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부리나케가 불이 나게의 변어잖아요. 그 정도로 술술, 순식간에 읽힙니다. 시어머니, 시누이, 며느리 간의 알력, 견제, 시비 같은 가정 불화가 제가 딱 싫어하는 소재이다 보니 뿔뚝뿔뚝 돋아나는 신경질을 눌러야했다는 것만 빼면 역자의 철야책,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는 당당한 소개가 부끄럽지 않은 소설이었어요.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는데 이해가 가더군요. 사랑과 전쟁 + 적과의 동침에 스릴러가 섞인 느낌인데 더럽게 재수없는 일에 자꾸만 휘말리고 휘둘리는 것이 조용한 가족도 생각나고요. 시작은 막장이 아니었으나 막장으로 흘러갈 삘이 보이고 끝에 가니 또 막장은 아니었던 훈훈한(?) 가족 스릴러라고 해야할까요. 하여튼 세상의 많고 많은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진짜 미친 또라이 하나랑 엮인 일가가 제대로 큰 코 다치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시작은, 그러니까, 재판장으로 가기 직전 마음의 준비를 하는 판사 이사오의 사형에 대한 가치관에 대한 소개로 포문을 열었어요. 한 범죄가 시작된 시점이 아니라 범죄는 마무리 됐고, 그 집행만 남은 시점. 그 판결에 초점이 가있는게 좀 신선했습니다. "범죄자를 엄하게 벌하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사람을 심판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재판관은 양형을 1년 더하고 뺄 때도 끊임없이 번민을 거듭한다"고 이사오는 생각합니다. 판사라도 누군가에게 형을 내리는 일은 불편한 일이겠지요. 하물며 그게 생명권을 박탈하는 사형일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을테구요. "살인자든 누구든 더 이상 사람을 심판하는 일 따윌 할 수 없다. 나도 사람을 죽인 거야."라고 말하며 은퇴를 한 선배 판사를 눈 앞에서 목격했던 탓인지 본래 성향 탓인지 여러 심정 부담과 검사측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이사오는 일가족 살인사건의 피고인 다케우치 신고에게 사형이 아닌 무죄를 선고합니다. 그 직후엔 선배와 마찬가지로 은퇴를 해버리구요. 그런데 그게 좀 비겁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사오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사형을 결해야 할만큼 유죄가 기정사실화 된 사건을 목전에 두고 나가버린 거라서요. 판결을 두려워하는 판사라는 건 충분히 공감가지만 이사오에게서는 책임을 회피한다는 느낌이 더 크게 들어서 좀 싫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사오의 이런 비겁함은 가정 내에서도 그대로 유지가 됩니다. 치매에 걸린 모친, 그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은퇴한 주제에 어머니 입에 죽 한 사발 떠먹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럼 그 고생을 누가 하고 있냐. 피 한 방울 안섞인 그의 아내 히로에와 며느리 유키에의 희생이 자의, 타의 속에서 마음껏 쥐어짜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오의 누나는 딸이랍시고 일주일에 한 번 드나들면서 히로에를 좀 먹고, 이사오의 아들은 무능력한 프리터에 마찬가지로 집안 일에는 아주 놈팡이가 따로 없어 할머니쪽은 쳐다도 안보구요. 아내가 힘든 걸 알면서도, 하물며 아내가 아파서 병원을 가는 상황인데도, 자기 엄마 배변을 못도와줘서 어쩌지 하다가 히로에를 쓰러지게 만드는 남편이라니 한심하잖아요. 히로에와 유키에가 참고 사니 막 치고 박고 싸우는 가족은 아니지만 잠재적 불안 요소가 여기저기에 널린 상황이지요. 그런 일가족 앞에 이사오로부터 무죄 판결을 끌어냈던 그 남자, 다케우치 신고가 등장합니다. 해외중개업을 한데다 본래 물려받은 돈도 많고, 돈도 잘 쓰고, 어딘지 고상하고 세련되서 옷도 잘 입고, 이사오와 다르게 다정다감한데다 감성지수도 높아 히로에의 마음에 절묘하게 공감하는 그런 남자가 서서히 이사오 가족을 침투해 옵니다. 그 때부터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 유키미의 딸 마토카는 어쩐 일인지 난폭해져 밤에 안싸던 오줌도 막 싸구요. 할머니는 죽 먹다 돌아가시고, 유키미의 과거가 흩뿌려지고, 오해를 사고, 누가 집을 나가고 어쩌고. 뭐가 원인이다 딱 꼬집을 순 없지만 자꾸만 찝찝하게 변모해 가는 일상과 가족간의 오해와 의심, 갈등의 상황들이 사실 굉장히 익숙하고 뻔했습니다. 근데 그 뻔한 상황들이, 앞으로 벌어질 일도 뭔가 뻔한 것 같은데 쫀쫀한 긴장감으로 제 마음에 불티를 던져요. 이사오와 오감발달 며느리 유키미의 마음에도 그 불티가 날아가구요. 이 불티가 그저 불티로 잔잔히 사그라들지 불티가 확 번져 일가를 송투리 채 불 태울지. 이사오가 좀 빨리빨리 움직여서 불티를 털어주면 좋겠는데 이 영감님 왜 이렇게 느긋한지 좀 화가 나긴 하더군요. 그렇지만 결말은 꽤 후련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형의 결말이라 불뚝성이 순식간에 가라 앉았어요. 아주 칭찬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재미있습니다. 처음부터 범인은 확정되어 있고 이놈이 어떤 식으로 불을 지르고 다니고 가족은 언제쯤 그 발화지점을 찾아낼 것인지가 관건인 책이다 보니 정답이 딱 정해져 있는 유형의 스릴러를 싫어하신다면 좀 심심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지간한 취향에는 별 네 개쯤은 다들 찍어줄 것 같아요. 두 남자 이사오와 아들 도시로가 약간 폭탄이긴 하지만요. 아들 도시로가 진짜 찌질 극치거든요. 유키미가 유산한 애가 자기 애가 맞냐며 추궁하고, 유키미 전남친 하고 다툰 채 유키미만 남겨놓고 신고의 차를 타고 멀어질 때는 책 속으로 뛰어들어가 뒷통수 한 대 때려주고 싶었어요. 으이구 찌질아 찌질아. 너는 임마 맞아도 싸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혼꾸녕 난 게 하나도 안불쌍하더라. 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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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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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 속편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게 된 마스다 미리의 작품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입니다.
손바닥만하게 작고 얇은 만화책이라 읽기 전에는 가볍기만 한 마음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휴~ 하고 한숨이 나옵니다. 책이 지루하거나 한심해서가 아니라 어쩜 이렇게 지금 제 상황, 제 마음을 탁 끄집어 펼쳐놨을까 싶어서요. 혼자 끙끙 앓거나 엄마의 잔소리를 못들은 척 하거나 친구와 이야기 하다 에라 모르겠다 술이나 푸자 하던 것과는 달리 책으로, 그림으로, 대화로 펼쳐져 있는 나와 똑같은 고민은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군요. 막연한 미래가 답답하기도 하고, 겁도 나고, 수짱 시리즈의 지속적인 인기가 이 공감대 때문이라면 다른 미혼들도 다들 비슷하게 고민 중인 걸까 어쩐지 위로도 되고. 속절없이 잠이 깨버리더군요. 특히나 도입부의 요가 학원 이야기요. 수짱이 요가 학원에 등록하려고 하는데 비용이 1만 엔. 노후대비로 한 달에 1만 엔씩 적금을 들면 이게 얼마야 하고 생각을 하는데 그 순간 수짱에게 깨달음이 오는 거죠.

멀리 있는 미래가, 현재, 여기 있는 나를 구차하게 만들고 있다. (p8)

수짱은 노후 따위, 돈이야 얼마가 됐든 요가를 시작하자! 하고 떡 하니 등록을 해버리는데 저는 그러지를 못하는 편이에요. 사실 작년부터 이 문제로 엄청 생각이 많았던지라 수짱의 말이 그냥 심장에 콱 와박히는 느낌이었습니다. 월급 받으면 곧장 적금 넣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비를 빠듯하게 수렴하다 보니 꼭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하나 싶었거든요. 친구가 여행을 가자는데 예상 비용이 제가 생각했던 금액을 훌쩍 뛰어넘어 포기. 저 때문에 이야기가 흐지부지 된 것 같아 미안한데 도저히 그 돈은 못쓰겠고 쓸 돈도 없고 그렇더라구요. 그냥 적금을 줄이고 더 쓸까도 싶다가, 아니아니 안되지 했다가, 미래가 걱정되긴 하지만 현재의 행복도 포기하지 않는 친구들이 부럽다가, 혼자 살 내 노후를 생각하면 다시 또 더 졸라매야지 하게 되는. 수짱이 말하는 것처럼 죽은 후가 두려운 게 아니라 할머니가 된 나의 구차스러울지도 모르는 삶이 두려워요. 책 한 권 내 맘대로 나 읽고 싶은데로 못사읽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거요. 사실 이 조차도 궁핍할지도 모를 현실에 비하면 너무 낭만적인 고민이잖아요. 아직도, 여전히, 현실 감각은 없는거죠.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그냥 답은 없다는 거에요. 결혼한 마이코도, 혼자 사는 수짱도, 엄마와 치매 걸린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사와코도 뭐가 어찌됐든 열심히 현재를 살아가는 것 말고는 별 뾰족한 수가 없어요. 그래도 수짱은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까 생각하다 곧장 다음에 매장에 팔 메뉴를 고민하는 그런 장면들이 그려지는 것 같아요. 사실 그것 말고는 정말 답이 없으니까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 그래도 먼 미래를 위해 지금 현재의 나를 너무 희생시키지는 말 것, 수짱이 제게 해주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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