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낯선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응? 러시아 커피? 조선시대? 김소연...... 아닌가? 주진모에 박휘순 나오는 그 영화잖아 하고 검색해 보니 영화의 원작 소설이 맞았다. 가비라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고 티비에서 방영하는 걸 얼핏 스쳐 본 기억이 있다. 광고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 제목도 깜깜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별 관심이 없는 작품이었는데 이걸 읽어야 하다니, 그것도 책으로!! 하며 잠깐 좌절했다. 조선시대 로맨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같은 건 좋아도 심각한 역사 소설은 다 별로라고 생각하는지라 고종도 나오고, 아관파천에, 이완용, 일본-러시아 사이에서 정쟁 얽히고 이러면 이야기가 복잡하겠는 걸, 아이코 머리야 하며 책에 대한 기대나 설렘도 조금 식어버렸다.  페이지 수도 적고 양장인데도 가볍다는 이유로 노서아 가비를 들고 나온게 살짝 후회가 됐다.

영화에서 얼핏 본 김소연은, 그러니까 영화 속의 따냐는 서양식 복식까지 모두 다 하여 어딘지 청승 맞은 사연으로 똘똘 뭉쳐진 여성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노서아 가비의 따냐는 내가 예상했던 그런 류의 여성이 아니었다. 쾌걸 조로가 여성화 된 느낌이라고 하면 적합한 비유려나. 딱 떨어지게 대입할만한 인물이 생각나지 않는데 여하간에 당혹스러울만큼 독특한 여성이었다. 켜켜히 쌓인 사연으로만 보면 청승은 늘어지고 팔자는 오그라져야 마땅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일테면 배경인 개화기 조선 말, 아비는 나라 패물을 빼돌리다 사망한 역관이고, 그 자신은 열 아홉에 노비 신세를 피해 아버지 친구 손을 잡고 압록강을 건넌다. 그 밤 자신의 방에 숨어 든 아버지 친구 둘을 제 손으로 헤치우기까지 하며 평범한 중인 출신의 여성이였던 그녀는 길거리의 막나가는 인생살이로 편입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감성 꽤나 자극하는 소설이겠구나 싶지만 결코 아니올시다였다. 사실 아버지 친구들이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오는 장면까지만 해도 나는 살짝 불안했다. 가장 싫어하는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겠구나 짐작해 버린 탓이다. 불운한 조선 여인에게 그럴 듯한 사연 하나를 안겨서 깊은 한을 끌어낼 것이라고. 아주 쉽게, 자극적으로, 여주인공의 불운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를 갖다붙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불행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사건, 열 아홉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 아비처럼 대하라는 친구 둘, 야심한 밤, 불법 침입. 상상할 수 있는 건덕지라야 그 친구들에게 겁간을 당하거나 중국인에게 팔려가 첩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무지렁뱅이 사내의 매 맞는 아내가 되었다가 도망하거나 이지 않겠느냐고 추잡스런 이야기로 쉽게 단정해버렸다. 그러나 여기, 이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시작된 내 빈약한 상상력에 대한 반전으로 노서아 가비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재미없겠다에서 얼른 다음 장을 읽고 싶다로.

아버지 흉내내는 놈들 모두 사기꾼이야. 그런 놈들한텐 이걸 선물해라. (p24)

살아 생전 부친이 딸에게 경고하며 선물했던 폭탄, 따냐는 그 폭탄을 터트린다. 아비처럼 대하라는 그들의 말에 흰눈을 뜨고 살금살금 뒷문으로 나와 제 방을 살피는 조심성 많은 소녀, 그 의심에 다름없이 침입하는 남자들에게 한 치 망설임 없이 날아간 폭탄, 장정 스물도 날려버릴 어마어마한 위력을 뒤로 하고 살아남기 위해 쿨하게 사기꾼이 되고 시원하게 남을 등쳐먹고 유쾌하게 뒷통수를 치며 따냐는 살아간다. 러시아어도 잘하고 중국어도 잘하고 낙관 파는 기술도 뛰어난데다 그녀 자신의 타고난 매력까지 더하여 대동강 물을 팔았던 김선달처럼 러시아 숲까지 팔아넘기며 대사기꾼으로 레벨업!  말발도 어찌나 좋은지 (나는 잘 못느꼈지만 서술에 따르면) 청나라 황제 애첩도 됐다가 러시아 황제에게 알현하는 지위도 됐다가 아프리카도 가고 유럽도 가고 별 짓 다했노라 뻥을 치지만 의심하는 사람도 하나 없다. 외려 이 나라 저 나라 귀족들이 껌뻑 죽다 못해 사기 치려고 만난 놈이 청혼까지 하는 지경이다. 그런 사기꾼으로서의 삶에 그녀 자신이 회의감을 느끼거나 후회를 하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과거에 미련없이 현재에 충실하게. 사기꾼으로서의 깨달음과 경험들을 잊지 않은 채, 옳고 그름과는 좀 무관하더라도, 아주아주 성실한 범죄인의 삶을 산다. 곁다리로 남자 하나가 나오지만 ㅡ 이반이라고 조선 사람인데 역시 사기꾼이다ㅡ 여느 소설과 달리 이 남자와의 사랑에 안주하지도 그의 배신에 가슴 아파하지도 않는다. 쓸모없어진 것은 언제든지 버릴 준비를 하고, 어디로든 떠날 준비를 하며, 먼저 배신하는 것도 주저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모험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여자 따냐. 한국 소설에서는, 적어도 내가 본 소설에서는, 이런 여주인공은 없었다. 남자 주인공을 뒷발차기로 친히 날려버리는 여주인공이라니!! 사랑 앞에 흔들리지 않은 이가, 살아남기를 선택한 이가, 먼저 손을 써서 움직인 이가  그가 아니라 그녀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고종이 등장하고, 고종의 바리스타가 되어 러시아 커피를 타고, 고종과 우정을 쌓고, 그 밖의 남다른 커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좋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암울한 시대적 배경에도 가볍고 산뜻하고 경쾌한 삶을 살아가는 따냐라는 사람이 그 자체로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가져나간 책이 이 책 한 권 뿐이라 어쩔 수 없이 읽는다는 느낌이었는데 읽다 보니 어느 새 버스 정류장에서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쩐지 창피해 잘 읽지 않는다.) 버스 기다리는 5분, 10분이라도 이 책을 안 읽고 그저 서있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정도의 재미였다. 한, 청승, 눈물 절절, 여성의 인격을 말살하는 류의 사건, 구구절절한 회한, 이런 것들이 없어서 더욱 좋았고 말이다. 아참 책이 따냐의 성격처럼 아주 간결하다. 큰 따옴표, 작은 따옴표조차 모조리 생략돼 있는 핵심만 짚은 대화들을 보면 필요없는 건 점 하나도 넣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느껴진다. 내 리뷰도 좀 그러면 좋으련만. 어쨌든 신문물검역소에 이은 한국 역사 소설과의 성공적인 만남, 아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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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5-0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모금씩 마시고 싶은 책‘. 아주 매력적인 표현이네요. 읽고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