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톰 행크스 지음, 부희령 옮김 / 책세상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어? 톰 행크스? 하고 한번 더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맞았다. 터미널과 포레스트 검프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따뜻하고 감동적이고 마법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잘 생기진 않았지만 사랑스럽던 그 남자가 소설을 썼다. 17개의 단편 묶음집이고 단편 속에는 아주 짧게 또는 아주아주 짧게 타자기가 등장한다. 100여 대의 타자기를 소유한 타자기 애호가이며 타자기 어플까지 출시한 그의 뇌 회로에서 타자기가 없는 누군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듯이. 타자기가 인생의 중심은 아닐지라도 모든 주인공들의 안과 밖에서 타자기가 웃는다. 또닥또닥 삶을 노래한다.

1. 처음과 중간과 끝

단편집의 시작은 <석 주 만에 나가떨어지다>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유산을 빽으로 놀고 먹는 반 백수 닉네임 문워커는 친구 애나와 연애를 시작한다. 애나의 남자친구로 사는 일은, 그의 말을 따르자면, "토네이도가 부는 계절에 아마존 고객주문 처리 센터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해군 특전사 훈련을 받는 것과 같다(p28)". 더럽게 피곤하다는 거다. 게으른 남자와 새벽 다섯시부터 자정을 넘어서까지 일하는 열정이 넘치는 여자가 만났으니 이 연애 볼장 다본 듯. 애나의 육체적 매력에 굴복하여 조깅도 하고 스쿠버도 배우고 사무실 출근도 하고 집기 조립에 청소까지 시작한 문워커의 뒷걸음질 및 애나의 실망을 기대하며 읽게 되는 단편이다. 커플은 깨지는 맛이지! 예상된 이별 뜻밖의 만남이 첫 단편으로 끝나지 않고 중간 <앨린 빈 외 네 사람>으로 연장돼 막판 <스티브 웡의 퍼펙트게임>까지 이어진다. 내 친구의 친구까지 등장하는 연작 단편 속 유머와 즐거움을 맛보시기를.

2. 사랑과 용기, 희망의 이름으로 

톰 행크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의 작품들이 다수였다. 포근하고 낡고 친근한 담요 같은 매력의 단편들. 남자들은 우직하고 여자들은 사랑스럽고 아이들은 그냥 딱 애들스럽다. 2차 세계대전으로 왼쪽 다리와 손가락을 잃은 가장의 이야기 <1953년, 크리스마스이브>, 미래를 보는 여자와 우주를 보는 옆집 남자의 밀당 <그린스트리트에서 보낸 한 달>, 배우를 꿈꾸며 뉴욕으로 상경한 시골 아가씨의 성장기 <뉴욕에서 빈둥거리기>, 이혼한 엄마 남자친구와의 비행 <특별한 주말>, 언젠가 태어날 아이들과 조금은 서먹한 엄마를 위해 타자기로 쓰는 <내 마음의 명상록>, 극본으로 쓰인 어느 재벌의 행복한 돈잔치 <어서 오세요>,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한 불가리아 이민자의 이야기 <코스타스를 찾아서>. 그린스트리트와 코스타스가 게중 특히 좋았다. 앞편은 처음부터 뒷편은 막판에 실실 웃지 않을 수 없는 포인트가 콕콕!

3.  SF도?

딱히 과학적 지식이 동원된 것은 아니지만 우주여행과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담은 SF 작품까지 두 편 실려있다. 위에 처음과 중간과 끝에서 소개한 그 남자와 그 여자 그 친구들 문워커와 애나와 스티브 웡과 스티브, 엠데시의 달나라 여행! 뭐가 이렇게 엉터리야 하면서도 키득키득 웃게되는 유쾌함으로 가득한 우주일지다. <앨린 빈 외 네 사람>과 <스티브 웡의 퍼펙트게임> 중 어느 작품이 SF인지 알아맞춰 보시길. <과거는 중요하다>의 주인공 버트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는 웃음이 예쁜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버트는 2019년을 살고 그녀는 1939년을 산다. 회당 6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인 22시간의 시간 여행에서 만난 그녀를 찾아 1939년 세계박람회로 세 번이나 시간여행을 떠나는 남자 버트. 그러나 더이상의 시간여행을 육체가 허용하지 않는다. 마지막 시간여행이라는 선고를 끌어안고 돌아간 39년의 미국에서 버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4. 막장도 빠질 수 없지
    
드물게 존재한 두 편의 막장 스토리. <파라에서의 마지막 홍보 여행> 그리고 <마르스 해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남부러울 것 없는 배우의 남편은 누구와 바람이 날까. 그리고 아들의 생일 아침 아들과 함께 한 해변 한켠에 숨어 아내가 아닌 여자와 키스하는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는 몰랐겠지만 그날 아침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했던 마르스 해변을 영원히 떠났고 그의 순수했던 소년기에도 작별을 고한다.


책상 하나를 꽉 채우게 육중하고 '클럭 클럭 클럭 클럭 클럭' 딱따구리 나무 쪼는 울음을 우는 타자기가 책을 덮은 지금까지도 눈 앞에 아른아른 한다. 타자기를 직접 본 적도 종이를 넣고 타자를 누르고 글자를 찍어본 적도 없지만 한껏 느리게 읽혔던 책 탓일까. 마치 그의 소설을 내 눈이라는 타자기로 깜빡깜빡 찍어 읽은 느낌으로 '클럭 클럭 클럭 클럭 클럭', 완독의 축하 종도 "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켄슈타인 클래식 호러 4
메리 셸리 원작, 세이비어 피로타 지음, 프랑코 리볼리 그림, 김선희 옮김 / 조선북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두꺼운 빙하 한쪽 구석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 로버트 월턴 선장의 배. 북극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선장과 선원들은 의문의 거인을 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 밝힌 한 젊은 남자를 구조하게 됩니다. 남자는 초췌했고 연신 몸을 떨었으며 잠자리가 주어진 이후에도 편히 잠들지 못한 채 계속해 악몽을 꾸는 듯 했죠. 그러다 마침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선장과 선원들을 모아 자신이 벌인 과거의 죄를 고백합니다.

과학자로 야망이 컸던 프랑켄슈타인. 그는 독일 대학에서 홀로 공부하며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기적을 이루려고 했습니다.생명의 탄생! 신의 영역에의 도전! 과학자로서의 야심에 사로잡힌 그는 도굴꾼들과의 거래, 시체보관소와 병원에서의 도둑질로 시체를 모았고 시체의 부분부분을 실로 기워 2미터 50센티의 신장에 체구가 크고 피부가 녹빛이며 입술이 뒤틀린 괴물을 만듭니다. 창조주로서의 그의 꿈을 완성시킨 것은 바로 전기. 전기의 거대한 힘이 시체를 휘도는 순간 괴물은 격렬하게 몸을 뒤틀더니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성공의 기쁨도 잠시 첫 번째 숨이 괴물의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 바로 그 때 프랑켄슈타인은 공포에 함몰됩니다. 괴물은 너무나 무시무시했고 위험해 보였으니까요. 그는 괴물이 벌일지 모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어떤 대비책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프랑켄슈타인은 갓 눈을 떠 갓난아이와 다름없는 괴물을 홀로 남겨둔 채 집 밖으로 도망갑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괴물은 그의 붉은 가운을 훔쳐 달아난 상태였고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어요. 문제가 눈 앞에서 사라졌으니 더는 내 문제가 아니라고 머릿속에서 털어버린거죠. 설마하니 남동생의 부고가 들려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괴물이 남동생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약혼녀까지 살해할 거라는 상상조차 못한 채 말입니다.

복수를 위해, 세상을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과오를 지우기 위해 괴물을 쫓는 프랑켄슈타인. 창조주로부터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존재 자체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세상 밖으로 밀려난 괴물. 원작을 축약한 그림책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몰입해 읽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던 그간의 세월에 혼자 웃으면서요. 1818년 익명의 첫출간 이후로 올해가 딱 200주년이 되는 시기라 그런지 초판본 프랑켄슈타인, 특별판 프랑켄슈타인, 그림책 프랑켄슈타인이 두루두루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림책도 충분히 재미났지만 더 상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완역본으로 읽으리라 결심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잡지 -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
진경환 지음 / 소소의책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최초의 세시풍속지 <경도잡지>를 뼈대로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의식주 및 놀이와 유흥 등 기타 여러 생활의 취향을 알려주는 책이다. 사실 잡지라는 제목에 깜빡 속아 현대의 잡지처럼 감각적이고 간략한 내용과 편집으로 중무장해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전문적(?)인 느낌이라 시작할 때는 조금 놀랐다.  특히 경도잡지가 매 글의 시작에 번역되어 있다는데서 정신이 혼미. 처음엔 외계어인 줄. 1장인 의복 그중에서도 1차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초반부가 특히 재미가 없음을 다음 독자를 위해 미리 밝힌다. 사극을 보면서 의복만으로도 시대구분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시청자이자 독자라면 관심도 가고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내 경우 의복의 외양도 낯선데 의복 각각의 단어도 너무 많고 한자어고 그래서 서른 페이지 정도는 읽느라 고생을 했다. 그러나 의복 부분은 짧고! 2차 "견마 잡혀 말을 타고" 부터 점점 재미있어지다가 제2장으로 넘어가 먹고 노는 이야기로 흘러가면 완전 흥미진진 해지니까 초반 의복에 지지 마시라 당부드린다. 의복을 건너뛴 채 읽다가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도 좋을 것 같고. 나는 워낙 순서대로 읽는 걸 좋아해서 다 읽고 넘어가리라 고집을 피웠는데 덕분에 초반 흥미를 많이 깎아먹었다. 전공자도 아니고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니까 요령껏 읽도록 하자. 

각 장마다 재미있던 이야기만 추려서!

제1장. 의관 갖추어 행차할 제

장옷 :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쓰개 등을 이르는 말. 유교에 대한 편견으로 이 옷이 조선 여성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피부를 가리기 위해 강제로 착용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 시대 여성들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양성지 같은 관료가 장옷 금지 상소도 올리고 그랬는데 가체와 함께 장옷 유행은 막을 수가 없었다니 매우 놀람. 하물며 가체는 매우 여러번 금지됨;;

견마잡이 거덜났네 : 사람을 태운 말 앞이나 옆에서 말을 잡아끄는 사람, 조선후기에는 지위가 낮은 이들도 견마잡이를 둘쯤은 달고 다녔다고 한다. 박제가의 글을 보니 하도 견마잡이를 붙여다니니 전쟁터에서도 견마잡이가 말을 안끌면 위급한 상황에서도 말이 뛰질 않았다고 한다. 과장이 아닐까 의심이 들긴 하지만 어찌됐든 황당.

혼인과 결혼 : 혼인에는 신랑이 장가 들고 신부는 시집간다는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결혼에는 신랑이 장가간다는 뜻만 포함되어 있단다. 혼인은 좀체 쓰지 않는 단어인데 뜻이 의외다.

신고식 : 왕따는 없었는지 모르지만 신고식은 장난이 아니었다. 사헌부 신고식 기록에 두들겨 패는 건 기본이고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한 후 그 손을 씻은 물을 마시게 했는데 토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율곡 이이가 제발 좀 없애자고 역시나 상소를 올렸으나 후에 정약용의 말에 따르자면 "당하는 자는 영광으로 여기고, 보는 자는 부러워해서" 없어지지가 않았단다. 대단해;;;  





제2장. 폼에 살고 폼에 죽고


왕의 의장대를 설명하는 사진인데 의장대는 별무관심 기록화에 왕이 없는 것에 더 깜놀해버렸다. 저 빈말 위에 정조가 앉아계신다고 상상하면 되는건가? 이정명 작가 <바람의 화원>에서 어진 얘기 하며 관련한 얘기나 있었나 없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대충 읽진 않았는데 왜 이렇게 기억을 못할까.   




종이값이 비싸지면 장수가 줄고 종이값이 안정되면 장수가 늘었던 조선소설들. 홍길동전과 춘향전이 완판본과 경판본이 따로 돌았다는게 재미나다. 현대의 독자들처럼 그 시절의 독자들도 완판본 보고 싶어 애가 탔겠지? '잡채판서' 라고 손가락질 당한 이충은 다양하게 심은 채소로 광해군에게 맛있는 반찬을 바쳐서 품계를 올렸다는데 궁금해 찾아보니 그 시절 더덕정승(실록에는 김치정승)도 있었다고 한다. 더덕 넣은 떡이 맛나서 정승자리까지 올랐다는데 기가 막히다. 정조시대에는 목만중이라는 시인이 "온 나라가 꽃에 미쳐 날뛴다"고 지적질을 했다는데 꽃가게는 없는데 꽃에 종사하는 사람은 많았다니 이거 뭐지?? 지금은 닭둘기로 공포의 대상이 되는 비둘기를 키우는 것도 잠깐 유행했단다. 상상이 안가지만;; 너무 싫지만;; 토종 비둘기는 좀 예쁜가?? 음란한 새라는 이유로 유행에서 밀린 모양인데 음란의 이유가 비둘기 부부가 혀를 빨아서라고(책 표현 그대로). 이거 뭐야 넘 웃겨 ㅋㅋㅋ 황당하지만 비둘기의 음란성을 고발한 글도 많았다. 제2장 폼에 살고 폼에 죽고는 깨알웃음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술술 읽힌다.


제3장. 먹는 낙이 으뜸일세


먹는 낙 중엔 담배얘기가 제일 재미나다. 1610년을 전후하여 들어온 담배가 거의 20년 상간으로 해서 남녀노소 지위에 관계없이 전국민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수광의 글에 따르면 입있는 사람이라면 즐기지 않는 자가 없았다 하고 너댓살 먹은 아이들까지도 우유같이 달다며 여러 대를 연달아 피웠다는 기록이 있다. 너무 대단한 인기라 무서울 정도. 소설 바람의 화원에도 나왔던 쌍검대무가 이 책에도 등장하는데 담뱃대의 사회적 의미를 설명하는 자료로 쓰인다. 오른편에 서있는 아이와 기생, 대돗자리 위에 앉아있는 양반에게 담뱃대가 보이는데 신분에 따라 담뱃대의 길이가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담배의 인기에 힘입어 담뱃가게가 많이 생겨났는데 사장님들이 홍보와 호객의 일환으로 이야기꾼을 들였다고 한다. 담배 피고 몽롱한 중에 이야기를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하는 대목에서 상심한 손님이 담배써는 칼로 이야기꾼을 찔러 죽인 사건까지 있었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호러라 여름밤이 오싹해졌다. 뒤로 넘어가면 놋그릇 살인사건도 등장하고 (놋그릇 훔쳤다고 쳐죽이는 사건이 비일비재) 조선 후기 무서운 일이 많았더라.


제4장. 멋들어지게 한판 놀아야지


도박과 멋이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타자까지 등장했던 18세기 도박판. 노름꾼들이 나름 순진하여 노름수를 받으려고 신령님께 백일기도도 드리고 까치집의 굵은 나뭇가지가 운을 준다고 해서 까치집도 많이 해체하고 다녔단다. 까치집이 아예 없는 마을은 도박촌으로 의심받기도 했다는데 암행어사가 출두해서 까치집이 있나 없나 둘러보고 다녔을까 책 읽으며 별 상상을 다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작가 공지영이 5년만에 신작소설을 발표했다. 모 정치인과 배우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작가의 일신이 한창 소란스러운 시기에 책이 나오다 보니 관련한 비난들도 많고 책을 읽지도 않은 것 같은 독자들의 별 하나가 찍힌 테러도 우수수. "좌파인 척, 정의인 척 하면 돈, 명예 얻을 수 있는 시대"라는 별 것 없는 인터뷰에도 한껏 조롱받는 작가를 보며 책을 읽기도 전에 조금 스트레스가 생겼나보다. 책을 받고도 펼치기까지 한참이 걸렸으니 말이다. 펼치고 나서는 물론 눈 깜짝할 새 읽히기는 했다. 소재가 워낙 자극적인데다 전주 봉침 여목사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또 그 실화를 언론으로 접한 게 고작 몇 개월 전이니 말이다.


작가 후기 중

가끔 생각한다. 내가 고발하고 싶었던 그들을 위해 기도할 자신이 없었다면 불의를 고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마저 분노와 증오에 휩쓸려 간다면 차라리 어떤 것이라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 이 날씨, 이 풍경과 더불어 단순하게 행복해지는 걸 선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왜냐하면 오늘 나는 여기 있고 이게 전부니까. 어쩌면 인간이 쌓는 언어들, 이념들 혹은 평가들은 그저 허구에 불과했다. 오히려 내게는 저 티 없는 하늘, 한없이 투명한 블루의 바람, 물 위로 힘차게 깃을 치며 먹이를 물고 날아오르는 새들, 누가 뭐래도 꿋꿋이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평생 다이어트를 해본 일 없는 순박한 여자들, 순하게 그늘진 골목길들, 한 손에 읽던 책을 쥐고 개와 함께 강변을 걷는 할머니…… 내게는 이런 것들이 더 구체적이었고 더 삶에 가까웠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을, 그것이 내 맘에 들든 그렇지 않든 감사하고 감사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인터넷 신문 기자 한이나는 엄마의 암으로 실로 오랜만에 고향 무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술을 앞두고 그러나 간수치가 지나치게 올라가 수술이 미뤄지는 상황에서 병원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뜻하지 않게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성당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그 여자 별라와 눈이 마주치면서. 별라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이 한때 자신에게 상처준 그이며 자신이 외면했던 그녀임을 알게 되면서.

별라의 딸은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경영학과를 다녔고 민주주의를 위해 시위했으며 장애인 단체에서 봉사했다. 착한 아이였다. 열렬하게 신부를 숭배하고 집안의 큰돈을 빼돌려 신부의 계좌로 입금하고 아버지 모를 애를 배고 그러다 자살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 별라는 진실을 찾았다. 딸의 뱃속에 자라나던 태아가 신부의 아이임을 알게 되었고 그 부도덕한 신부의 계좌로 딸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여자들 또는 남자들로부터 수상한 돈이 무수히 입금되는 것을 알았으며 그 돈들이 한 여성에게로 집중되어 출금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별라의 이야기를 들은 이나 또한 알게 되었다. 고등부 성당 나들이에서 이나를 성희롱했던 신부 백진우의 죄가 그녀 하나로 끝나지 않았음을.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 오빠의 성추행으로 고통 받았던 어린 시절의 친구 해리, 해리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부담스러워 피하고만 싶었던 그 시절의 죄책감이 더욱 깊은 더께로 되돌아왔음을.

잊으려했고 또 잊기도 했던 그 때의 일들 그 때의 사람들 사이로 한발짝씩 가까워지며 밝혀지는 정의롭다고 세상에 알려진 인물들의 더럽고 불결하고 난잡하고 해괴망측한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하나님을 모시는 신부의 상습 성추행 성폭행.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숨겨주는 교구, 장애인 복지를 내걸고 실은 장애인 학대를 일삼으며 사재 축적 중인 인권운동가, 성욕에 무너진 정치인들의 민낯, 힘이 없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노동하고 목숨까지 빼앗긴 장애인들, 진실을 알면서도 기사화 하지 않는 언론, 정의라는 이름 하에 속속 모여드는 무지한 대중의 눈먼 돈들, 이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그 여자 해리, 모든 악몽을 가리고 삼키는 무진의 안개.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속이 시원할만큼 통쾌한 결말이 없다는 것. 벌 받는 이가 그 안에서 약하디 약한 그 이 하나라는 것. 아직 벌 받아야 할 이가 현실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서도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는 것. 현실의 그들을 대신해 소설 속 그들을 먼저 벌 주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독자의 갑갑함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다 읽고 나면 조금은 허무한 그녀 해리 그러나 소설이 가진 흡인력만으로도 별 세 개는 거뜬한 소설이다. 별 하나는 정말 아니다.

 

**리뷰어스 클럽 서평단으로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힘들지? 우리 좀 웃고 가요'

에세이가 웃겨 봤자 라고 생각했다. 에세이라는 장르 안에서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라.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르이지만 각색, 미화에 대한 의심과 남다른 힘듦 내지는 너무 잘난 인생의 너무 잘난 고민으로 인한 무공감으로 지루했던 적이 많아서. 그런데 이 책 <잘돼가? 무엇이든>은 좀 다르다. 그야 작가인 이경미 감독은 충분히 잘나고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가 고민하는 사랑이나 (노처녀였던 그녀가 13세 연하남과 결혼한 판타지는 별개로 하고) 그가 고민하는 나이듦, 일, 인생, 그밖의 사소한 분노와 발견이 대단히 특별한 무엇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거다. 칼퇴라곤 없는 빡빡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어쩌구 저쩌구 여기까지는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성공신화의 시작은 대체로 이런 부당한 고난에서 시작하지 않던가. 그러나 부단한 노력(물론 있었을테고), 인내(말해 입만 아프지), 고난(을 거쳤으니 성공했겠지)에 대한 상투적 나열없이 일하기 싫을 때 어쩌다 주위에 관련 업계 종사자 친구들이 있었고 일 안하는 변명으로 영화학교에 입학. 그렇게 시작한 일이 어쩌다 성공도 하고 실패도 했을 뿐 "애써 긍정적인 해석은 하지 말자. 아무리 봐도 인생 그냥 복불복이다." 라고 말하는 작가는 밉지가 않은 것이다. 프롤로그에서부터 무한 너그러움이 생겨 그런가 책의 끝까지 나는 깔깔깔 웃고 또 웃다 쓰러질 뻔! 하지는 않았지만:) 여태 읽었던 에세이 중에서는 탑으로 재미났다.

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진짜 쓰레기가 써지더라는 일화에선 풋 하는 깨알웃음이. "아저씨!! 땅에 떨어진 빵을 그냥 거기 두시면 다른 사람이 그 빵을 먹을 수도 있잖아요! 아저씨이이!" 소리 지르며 분노한 일화에서는 깔깔깔. 작가는 반성을 하는데 나는 속이 시원해졌다. "엄마 늙으면 좋은 점이 뭐가 있어?" 하고 여쭈니 엄마가 "없어" 했다는 일화에서는 어쩐지 서글퍼서 속이 상했고 끝이 안보이는 시라니오 작업과 막막한 인생에 "나는 무조건 건강해야만 한다"는 결심 속에 요가를 하고 각종 영양제를 과다섭취했다는 일화에서 아.. 그래서 내가 요즘ㅜㅜ 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언젠가부터 영양제를 한주먹씩 먹고 있었는데 누구 아픈 소식을 들은 이후로 먹는 양이 늘고 있었던 거다. 건강해야지 안아파야지 아프면 민폐다 싶어서. 책 읽고 정량으로 돌아가 다 한알씩으로 줄였다. 양만 줄이고 종류는 못줄였지만ㅠㅠㅠㅠ 아랫층 담배피는 남자에게 부탁부탁을 드렸더니 그 후엔 금연일지를 문자로 보내고 밥 먹자고 연락이 와 두려웠다는 일화에서는 내가 다 끔찍하기도 했다. 쓰고 보니 정말 별 거 없는 신변잡기의 나열 같지만 책으로 보면 정말 다르다. 정말 재미있다. 계획되로 풀리지 않는 인생, 농담으로 넘기고팠던 숨 막히고 짜증나고 우울하고 슬펐던 15년 간의 메모 속에서 고르고 골라 나온 이야기들이니 오죽하겠는가 하고 에세이를 안좋아하는 독자가 이 에세이는 꼭 읽어보시라고 강력 추천드린다. 대단한 교훈을 얻으려는 독자라면 노노, 이선희씨의 노랫말처럼 한바탕 웃음으로 세상 시름 잠깐 잊고픈 분들에게만 추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