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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작가 공지영이 5년만에 신작소설을 발표했다. 모 정치인과 배우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작가의 일신이 한창 소란스러운 시기에 책이 나오다 보니 관련한 비난들도 많고 책을 읽지도 않은 것 같은 독자들의 별 하나가 찍힌 테러도 우수수. "좌파인 척, 정의인 척 하면 돈, 명예 얻을 수 있는 시대"라는 별 것 없는 인터뷰에도 한껏 조롱받는 작가를 보며 책을 읽기도 전에 조금 스트레스가 생겼나보다. 책을 받고도 펼치기까지 한참이 걸렸으니 말이다. 펼치고 나서는 물론 눈 깜짝할 새 읽히기는 했다. 소재가 워낙 자극적인데다 전주 봉침 여목사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또 그 실화를 언론으로 접한 게 고작 몇 개월 전이니 말이다.
작가 후기 중
가끔 생각한다. 내가 고발하고 싶었던 그들을 위해 기도할 자신이 없었다면 불의를 고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마저 분노와 증오에 휩쓸려 간다면 차라리 어떤 것이라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 이 날씨, 이 풍경과 더불어 단순하게 행복해지는 걸 선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왜냐하면 오늘 나는 여기 있고 이게 전부니까. 어쩌면 인간이 쌓는 언어들, 이념들 혹은 평가들은 그저 허구에 불과했다. 오히려 내게는 저 티 없는 하늘, 한없이 투명한 블루의 바람, 물 위로 힘차게 깃을 치며 먹이를 물고 날아오르는 새들, 누가 뭐래도 꿋꿋이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평생 다이어트를 해본 일 없는 순박한 여자들, 순하게 그늘진 골목길들, 한 손에 읽던 책을 쥐고 개와 함께 강변을 걷는 할머니…… 내게는 이런 것들이 더 구체적이었고 더 삶에 가까웠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을, 그것이 내 맘에 들든 그렇지 않든 감사하고 감사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인터넷 신문 기자 한이나는 엄마의 암으로 실로 오랜만에 고향 무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술을 앞두고 그러나 간수치가 지나치게 올라가 수술이 미뤄지는 상황에서 병원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뜻하지 않게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성당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그 여자 별라와 눈이 마주치면서. 별라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이 한때 자신에게 상처준 그이며 자신이 외면했던 그녀임을 알게 되면서.
별라의 딸은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경영학과를 다녔고 민주주의를 위해 시위했으며 장애인 단체에서 봉사했다. 착한 아이였다. 열렬하게 신부를 숭배하고 집안의 큰돈을 빼돌려 신부의 계좌로 입금하고 아버지 모를 애를 배고 그러다 자살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 별라는 진실을 찾았다. 딸의 뱃속에 자라나던 태아가 신부의 아이임을 알게 되었고 그 부도덕한 신부의 계좌로 딸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여자들 또는 남자들로부터 수상한 돈이 무수히 입금되는 것을 알았으며 그 돈들이 한 여성에게로 집중되어 출금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별라의 이야기를 들은 이나 또한 알게 되었다. 고등부 성당 나들이에서 이나를 성희롱했던 신부 백진우의 죄가 그녀 하나로 끝나지 않았음을.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 오빠의 성추행으로 고통 받았던 어린 시절의 친구 해리, 해리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부담스러워 피하고만 싶었던 그 시절의 죄책감이 더욱 깊은 더께로 되돌아왔음을.
잊으려했고 또 잊기도 했던 그 때의 일들 그 때의 사람들 사이로 한발짝씩 가까워지며 밝혀지는 정의롭다고 세상에 알려진 인물들의 더럽고 불결하고 난잡하고 해괴망측한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하나님을 모시는 신부의 상습 성추행 성폭행.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숨겨주는 교구, 장애인 복지를 내걸고 실은 장애인 학대를 일삼으며 사재 축적 중인 인권운동가, 성욕에 무너진 정치인들의 민낯, 힘이 없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노동하고 목숨까지 빼앗긴 장애인들, 진실을 알면서도 기사화 하지 않는 언론, 정의라는 이름 하에 속속 모여드는 무지한 대중의 눈먼 돈들, 이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그 여자 해리, 모든 악몽을 가리고 삼키는 무진의 안개.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속이 시원할만큼 통쾌한 결말이 없다는 것. 벌 받는 이가 그 안에서 약하디 약한 그 이 하나라는 것. 아직 벌 받아야 할 이가 현실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서도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는 것. 현실의 그들을 대신해 소설 속 그들을 먼저 벌 주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독자의 갑갑함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다 읽고 나면 조금은 허무한 그녀 해리 그러나 소설이 가진 흡인력만으로도 별 세 개는 거뜬한 소설이다. 별 하나는 정말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