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유기견을 입양하다 에프 그래픽 컬렉션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말라 프레이지 그림, 신형건 옮김 / F(에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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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베리 상 수상작가와 칼데콧 상 수상작가의 만남으로 탄생했다. <하느님, 유기견을 입양하다> 장르는 당연히 동화일거라 생각해 책소개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실은 첫 소제목 "하느님, 잠에서 깨다"를 읽을 때까지도 동화 맞구나 했다. 그런데 어쩐지 껄적지근하다. 딱 잘라 동화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느낌? 에세이도 아니고 이게 뭐지? 혹시나 싶어 주제분류를 확인하니 외국시, 시모음집이다. 19년 새해 처음으로 읽는 시들이 하느님의 소소한 일상탐구라니 어쩐지 뿌듯한 걸. 참고할 것은 신시아 라일런트가 그리는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는 거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어느 날 무언가를 떠올렸는데 그것이 오로지 당신만의 것이라면, 아직껏 아무도, 어느 누구도 해 본 적이 없이 오직 당신만이 해 낸 생각이었다면 당신은 하느님일지도 몰라요. 하느님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오늘도 당신은 세상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미 하느님일지도 몰라요."

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여기 계신 하느님은 아침에 휘청이며 일어나 커피 한잔을 마신다. 늘어져있는 하루에 행복하다고도 생각한다. 또 어떤 하느님은 파마를 잘 하려고 미용학교에 갔다가 네일케어에 포옥 빠져버렸다. 누군가의 손을 자신의 손 안에 넣고 관리해주는 기쁨으로 하루를 꿀같이 보내던 짐이라는 하느님은 결국 네일샵까지 개장한다. 본인의 작품에 아름답다고 매번 감탄하는 저 하느님의 가게에는 한번쯤 가보고 싶다. 내가 잘 아는 하느님도 있다. 회사원이 된 하느님 말이다. 하느님은 본래도 세상의 모든 무게 때문에 등이 휠 지경이었는데 취업 후부터는 더욱 등이 쑤시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는 하루하루가 고문같다. 전화 한 통만 더 받으면 아마겟돈도 열 수 있을 것 같을 때 퇴근을 한다. 그리고 어떤 하느님은 케이블 티브이를 신청한다. 넷플릭스 신청하고 일주일 내내 티비만 봤던 나는 특히나 공감하며 이 시를 읽었는데 말미에 말씀하신다. 내게는 휴식이 필요했던 거라고. 그냥 재밌어서 그랬던 거 아니고?? ㅎㅎ

시 속의 다양한 하느님을 보며 웃음 짓게 된다. 남 같지 않은 하느님들 모셔놓고 한바탕 수다 떨고 싶은 마음도 들고. 시의 시적인 문장과 단어에 감탄하는게 아니라 그 정경에 공감하게 되는 글들. 이런 시라면 매일이라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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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의 의학세계사 - 주술사부타 AI 의사까지, 세계사의 지형을 바꾼 의학의 결정적 장면들!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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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외치. 부싯돌로 된 단검과 금속 도끼를 지닌 나는 이 시대의 잘 나가는 남자다. 족장급 또는 그 이상. 아무도 나를 하대할 수 없지. 자랑은 아니지만 내 도끼면 30분 정도 나무를 찍어도 날이 무뎌지지 않는다. 30분이면 나무 하나 똑딱 벨 수 있는거냐고 묻지는 마라. 5000년도 더 전의 일이라 거기까진 기억나지 않으니까. 30분은 그럼 어떻게 기억하냐고? 저건 내가 시험해 본 게 아니라서 그렇다. 1991년에 알프스 산맥 외치 계곡에서 나를 발견한 과학자들이 테스트를 해봤던게지. 이래뵈도 현존 최고로 정확한 육체를 보존 중인 신석기인이다 이 말씀이렸다. 살아생전 나는 아팠다. 허리도 쑤시고 무릎도 욱식욱신 발목은 저릿저릿 거기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내 무기만 봐도 알겠지만 한 때는 우리 부족 최고가는 사냥꾼이었는데 세월도 야속하지.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해봤다. 문신도 새겨보고 마귀 쫓는 주문도 받고 개구리 고은 물인지 썩힌 물인지 정체도 알 수 없는 즙도 먹고. 아니 그게 치료야? 병을 도로 키우겠는데? 싶을 거다. 근데 그 땐 저런 게 치료였다. 주술사로부터 마법적인 기운을 받는거지. 물론 하나도 낫지 않았지만. 마흔 다섯, 신석기 시대에 태어나 이만큼 누리고 살았으면 천수를 다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해 곱게 죽으려고 했는데 어떤 놈이 내 뒷통수를 쳐서 화살 맞고 죽는다. 두고 보자! 피를 줄줄 흘리며 눈을 감을 적만 해도 이걸로 생은 끝일 줄 알았는데 쭈꾸미도 아니고 문어 외계인이 내 앞에 등장했다. 타임머신을 제공할테니 의학이 발달했던 시간들을 찾아가 내 병을 치료하란다. 생전 처음 보는 외계인이 호구 잡혀 주시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나는 다양한 시대 다양한 의사 다양한 의료법을 만났다. 이집트와 그리스, 중국, 영국과 스위스, 페루, 이라크와 미국, 독일 등등. 의학으로 좀 유명하다 싶은 나라들은 다 가본다. 마법사 타이틀을 가진 이집트 의사를 만나 당뇨병까지 기록된 의학 파피루스를 함께 읽었다. 그리스에서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를 만나 진단도 받았는데 내 심장이 아픈 게 체액 불균형 때문이니 푹 쉬면 저절로 회복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문제는 가슴 통증 환자도 나랑 똑같은 진단을 받았다는 거. 사이비 아냐? 그래도 히포크라테스는 내가 어디가 아픈지 그리스 사람들에게 절대 소문내지 않을테니 그 정도면 좋은 의사라고 할 수 있겠지. 히포크라테스의 이백년 후배 갈레노스도 만났는데 하필이면 치료법이 사혈이었다. 피를 빼서 체액불균형을 맞추는건데 나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 피 뽑다 또한번 죽을 뻔 한다. 문어 외계인 아니었음 어쩔 뻔 했는지. 참고로 이 사혈법은 1300년 동안이나 유럽 의사들을 완벽하게 지배해서 나를 더욱 황당하게 만든다. 시대가 바뀌어도 가는 곳마다 피를 뽑자네? 세계 최초의 병원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가 어딘 줄 아시는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놉! 1248년 카이로에 지어진 만수르 병원이다. 병상이 자그마치 8000개였다고. 만수르는 요즘에도 그때에도 참 대단하다. 인종, 종교, 시민권과 상관없이 일단 병원에 온 사람은 자의가 아닌 이상 돌려보내지 않았거든. 루이 9세의 7차 십자군 원정대가 출발하던 때라고 생각하면 이거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요즘 사람들은 이슬람 하면 편견부터 가지는데 당시만 해도 굉장히 깨어있는 종교였다. 잘 상상이 안되지만.

흑사병이 한창 유행이던 영국에서 유럽인구의 3분의 1을 죽였던 그 대단한 병도 체험했다. 의사처방이 후추, 계피, 마늘을 태우는 거였는데 어떻게 신석기 시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은 치료법을 쓸 수가 있나? 정말 황당하더군. 내 병은 여기서도 고치긴 불가능이었다. 콤롬버스들 때문에 말라리아와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발진티푸스, 흑사병에 걸려 때죽음을 당한 원주민들도 보았고 그들에게 매독을 넘겨받은 유럽인들도 보았다. 콜레라의 전파를 막은 스노와 천연두 백신을 만든 제너, 엑스선을 발견한 뢴트켄도 만났지. 특히 뢴트켄 이 사람 진짜 대단하다. 의사가 아니라 물리학자라 내 병과는 무관하지만 특허 내자는 기업 제안도 거절하고. 엑스선은 자신이 발명 한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거니까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한다는 훌륭한 말까지 하는데 한때 족장급이었던 나는 그의 마음가짐에 많은 감동을 느꼈다. 아참 나 정신병원에 감금도 된다. 거기서 아주 충격적인 근황을 전해 들었는데 놀라지 마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말이다. 신석기인인데 이 책을 어떻게 아냐고 묻지는 말고. 하여튼 주인공 빨강머리 맥머피가 전기충격요법으로 거의 식물인간이 됐던 거 기억하시는지? 나는 기억한다;; 소설에서 본 충격적인 모습도 그렇고 너무 비인간적인 묘사들로 나는 전기충격이 더는 시행이 안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보기보다 굉장히 효과가 좋아서 미국에서도 매년 10만명, 한국에서도 2014년에만 250명이 치료를 받았다. 어떻게 아냐고? 나 지금 한국이거든!! 타임머신을 타고 타고 타고 또 타고 하다가 건강보험이 시행된 대한민국까지 와버린 거다. 그래서 내 병이 뭐냐고? 완치는 되었냐고? 다시 신석기로 돌아갈 거냐고? 궁금하면 책을 봐라. 아무것도 모르는 신석기인에게 배우는 의학세계사가 재미나도 놀라지 말고. 리뷰가 병맛인 건 이해해 주시길. 이 책이 의학세계사고 내가 신석기인이라 그런 거니까.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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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형사 부스지마 스토리콜렉터 6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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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택시를 탔습니다. 집에서 회사까지 빨리 걸으면 10분 남짓, 이 거리에선 결코 택시 탈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늦잠 잤냐구요? 아니요. 6시쯤 아직 컴컴할 때 일어났습니다. 다시 잤냐구요? 그것도 아니요. 아주 말짱한 정신으로 깨어있었어요. 대신 눈 뜨자마자 어제 읽다만 <작가 형사 부스지마>를 펼쳐들었죠. 다 읽고 자려고 했으나 수면을 이기지 못했던 페이지 뒤로 더욱 재미난 이야기들이 줄줄줄. 마지막 장까지 몇 쪽 안남은 상태였는데 출근 시간이 다가오니 미치겠더라구요. 이렇게 재미난데 또 궁금한데 완독도 못하고 출근이라닛!! 퇴근하고 마저 읽을 것이냐 다 읽고 씻고 나갈 것이냐를 놓고 한 3초 고민한 것 같아요. 물칠만 하고 나갔음에도 택시비까지 들었지만 후회없어요. 마지막 편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가 제일로 재미났거든요. 물론 고마운 기사님 덕분에 지각도 면했습니다.

우리가 왜 나쁜 사람은 아닌데 넌씨눈이야 라고 평하는 류가 있잖아요. 착하긴 하지만 눈치도 없고 분위기도 못맞추고 인간관계의 지혜가 부족한 것 같은 사람이요. 작가 형사 부스지마는 사람도 나쁜데 매우 넌씨눈이기까지 합니다. 전자도 불편한데 후자는 정말;; 인간이 어쩜 이러냐 싶었어요. 밉상밉상대밉상, 너 밤길 조심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니까요. 가까이 두면 완전 재수없을 타입!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유형 1번의 사람인데 아스카 형사는 오늘도 작가 형사 부스지마를 찾아갑니다. 일반인들 사이의 살인사건이면 다른 선배와의 협업으로 충분히 범인검거가 가능하지만 어쩐 일인지 요즘 특수업종 출판계에서 살인사건이 우후죽순 터지고 있거든요. 무서워서 어디 작가하고 편집자하고 독자하겠나 싶을 정도로 그쪽 업계가 피칠갑입니다. 한국 독자라 참 다행이지요?

신인문학상 1차 심사위원이었던 도메키, 군유사 문학팀 편집자 마다라메, 중견작가 기리하라, 젊고 잘생긴 인기 작가 교헤이, 방송국 놈 소네. 찔려 죽고 문서세단기에 목이 졸려 죽고 자빠져 죽고 맞아 죽고. 죽는 모습은 가지가지인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용의자가 전부 출판계 종사자라는 거에요. 작가지망생도 있고 편집자도 있고 유명 신인상 수상자도 있고. 종사자는 아니지만 독자도 있고 크흠흠, 저 같은 도서 리뷰어도 한 명 끼어있더군요. 마지막 사건에서는 어허이~ 작가 형사 부스지마!! 그도 용의 선상에 올랐어요.

설마하니 모든 작가 모든 지망생들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작가 형사 부스지마>에 나오는 "쓰는 사람"들은 모조리 나르시즘 환자거나 거장병 환자거나 음모론 환자들입니다. 그야 책을 쓴다는 게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특별한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만큼 자부심은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거기다 저희 독자들의 존경과 사랑과 애정을 받다보면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라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겠어요?물론 갓 등단한 신인이나 아직 책 한 권 못낸 지망생까지 내가 낸데 하는 건 꼴불견이지만요. 어떻게 나를 못알아볼 수 있어? 내 책이 재미없는게 아니라 그걸 이해 못하는 너희 편집자나 독자가 멍청한 거야! 출판사가 손실을 보더라도 후세에 길이 남을 내 책을 반드시 출간해줘야해! 거장이 될 나를 질투해서 심사위원이 나를 떨어트리는 거야! 같은 마인드가 너무 어처구니 없어 키득키득 합니다. 성격 파탄자 부스지마가 예술병 환자들에게 가하는 사정없는 채찍질이 속시원해서 또 푸하하하 하구요. 장르가 미스터리임에도 어쩜 이렇게 즐겁죠? 이 작가 진짜 잼나다 진짜 대단하단 말을 18년 내내 들었는데 부스지마를 읽고서야 드디어 실감해요. 과장된 부분도 많겠지만 일본 출판계와 작가와 리뷰어를 신랄하게 꼬집는 부스지마와 함께라면 하루 정도는 못자고 못씻고 택시비를 써도 하나 아깝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씀드려요. 강력 추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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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다리가 달린 집
소피 앤더슨 지음, 김래경 옮김 / B612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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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닭다리가 달렸다.

집은 해마다 두세 번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멀쩡히 잘 살던 곳을 떠난다." (p7)

닭발에 매달린 집이라니 좀 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페이지 첫머리에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한밤중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리는 마링카의 집이라니요. 밤에는 허허벌판의 야트막한 구릉으로 창을 열고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햇빛이 말랑말랑한 평화로운 호숫가에요. 남들은 비행기에 기차에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지만 마링카와 할머니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집의 닭다리가 알아서 움직이니까요. 교통체증도 화장실도 잠자리도 걱정할 필요없는 올인원 서비스! 게다가 집은 자유의지가 있어 누군가의 노동없이 자유자재로 인테리어를 바꿔요. 더운 곳에선 바람통로를 만들고 추운 곳에선 마른 장작으로 쓰라고 서까래 토막 하나도 떼어주고요. 물론 청소도 혼자 가능합니다. 사람이 해주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요. 틀림없이 서재랑 책장도 크게 크게 만들 수 있을 거에요. 말만 못하지 애랑 숨바꼭질도 해줘 술래잡기도 해줘 집주인이 나이가 많아 걷기 힘들다 싶으면 계단도 낮춰줘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판타지를 꿈꾸든 꿈꾸지 않든 모든 사람들이 손꼽을만한 집이라고 환호했는데 단 한 명 그렇지 않은 소녀가 있어요. 닭다리가 달린 집의 손녀 마링카 말예요.

마링카는 움직이는 집이 싫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멋대로 이동하는 집에 화가 나요.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할머니 바바 야가의 운명도 대를 이어 야가가 되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도 싫어요. 야가의 삶은 이승과 지나치게 떨어져있어 외로워요. 죽을 때까지 이런 운명으로 살라니 이건 저주이지 않은가요? 마링카는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산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어요. 살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온기를 나누고 우정을 쌓고 싶어요. 그걸 위해서라면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은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폭언을 퍼붓고 몰래 집을 나갈 수도 있어요. 설마하니 그 결과가 사막에서 친구가 되어준 영혼을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결과가 될 줄은 몰랐지만요. 집을 상처 입히고 새로 사귄 친구들로 인해 집에 불이 날 줄도 몰랐지만요. 무엇보다 마링카로 인해 지쳐버린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할머니가 저승문 너머로 가게 될 줄은, 다시는 할머니를 보지 못할 위기에 처할 줄은 정말정말 몰랐지만요.

제목도 표지도 명랑한 동화일 것만 같았는데 닭다리가 달린 집은 마링카가 운명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계속될까 의아해지기까지 하는 실패와 좌절은 마링카뿐만 아니라 마링카의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상처 입힙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포기하지 못해요. 포기할 수 없어요.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정해진 길로 가는 일을 그녀의 영혼이 거부하거든요. 기어이 저승문 너머까지 몸을 날리는 마링카. 처음엔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철이 없구나, 미쳤어, 어쩜 이렇게 못됐지 라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 거에요. 포기하는 게 주저앉는 게 대세에 순응하는게 훨씬 쉽고 훨씬 편하고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걸 아는, 마음이 노쇄한 독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열두 살의 마링카를 상상했어요. 일천가지 단어를 알아듣는 까마귀와 사랑하는 할머니와 닭다리가 달린 마법 같은 집이 있지만 사시사철 겨울인냥 마음이 외로운 소녀를요. 울타리를 넘어 운명을 개척하는 마링카를 응원합니다. 저승과 이승에 한발씩 걸친 삶으로 틀림없이 상처 입고 상처 주는 일들이 연속되겠지만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훨씬 많을테고 뼈 울타리를 치고 단절된 삶을 사는 것보단 생이 반짝반짝 할 거라 믿어요. 소피 작가의 소망처럼 별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자신의 운명과 함께 춤추기를. 세상 모든 아이들이 이 책을 만나는 독자들의 삶도 그러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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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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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때 처음 뜨개질을 했어요. 뜨개질이라기엔 뭣한 스킬자수가 시작이었습니다. 문방구에 가면 바늘이랑 도안이랑 실을 세트로 팔았거든요. 온반에 여자애들이 이걸 했어요. 저는 해바라기랑 둘리를 했었는데 전화기 밑에 받침으로 쓰려다가 발닦개로 쓰려다가 그냥 어딘가로 사라졌던 것 같아요. 아마도 나 몰래 쓰레기통행? 손재주가 바닥인데 도안 맞춰 바늘에 실 하나 걸어 돌려서 팍팍 빼면 되니까 완성까지 무지 쉽고 빨랐어요. 그 다음 해엔 유행이 바뀌어 대바늘을 썼습니다. 아이들 여럿이 수예점에서 실을 사서 목도리를 떴어요. 코가 얼마나 나갔는지는 설명하지 않을게요. 목도리에 구멍이 숭숭해서 둘렀을 때는 몰라도 그냥 보면 보기가 흉했어요. 손때는 왜 그리 탔는지 시커멓고 말예요. 누가 보면 손도 안씻고 사는 애가 뜨개질까지 하는구나 했을거에요ㅠㅠ 코바늘로 손바닥만한 쪼가리도 하나 뜬 적 있는데 그 때 썼던 바늘 두 개가 작년까지 저희 집에 있었지 뭐에요. 이사 때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죽을 때까지 안할텐데 코바늘 따위, 흥.

​                     

이런 제가 루프마이제 공화국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런지 상상만 해도 아찔해요. 루프마이제 공화국의 사람들은 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엄지장갑과 함께 하거든요. 아주 추운 나라이기에 아이가 태어나면 꼭 엄지장갑으로 손싸개를 해줘요. 사랑을 고백할 때도 상대에게 엄지장갑을 주고요. 결혼을 하거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아주 특별한 무늬를 넣은 엄지장갑을 착용해요. 엄지장갑이 가득 든 궤짝이 예물인 나라라니 상상이 가세요? 하물며 엄지장갑 뜨기 시험을 치는 나라는요?

12살이 되면 공화국의 아이들은 남여 가리지 않고 수공예 시험을 치루는데요. 여자 아이들은 엄지장갑을 떠요. 에이, 국영수 보다 나은 거 아냐? 수공예 시험이라니 재미나겠는데? 그런 생각들 하고 계시다면 손가락 절레절레. 국영수 못한다고 대한민국 국적이 박탈되진 않잖아요. 루프마이제 친구들은 나라에서 쫓겨나요. 이 시험에 떨어지면 국민으로 인정이 안되요. 세 오빠들과 호수에서 헤엄치고 숲을 뛰어다니기만 좋아하던 마리카는 아주 큰일이 난거죠. 루프마이제 제일 가는 수예 실력을 가진 할머니를 뒀지만 마리카는 수예를 아주아주 싫어하거든요. 손재주가 꽝이기도 했구요. 후들후들 떨면서 치른 닷새 동안의 시험 결과는 다행히도 보결! 어쩌면 이때부터 아무 것도 몰랐던 어린아이 마리카가 성실과 노력, 인내, 책임과 의무의 의미를 알고 성장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어요.

크리스마스 즈음에 태어난 건강한 아기는 아름다운 소녀가 되고 첫사랑을 만나고 소년과 춤을 추고 밤을 지새우고 감탄이 나오는 결혼생활을 하고 남편을 전쟁터로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며 많은 행복과 더 많은 불행을 마주했어요. 그치만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12살의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포기하지 않아요. 그 상황에서 달아나거나 돌아서지도 않구요. 묵묵히 바늘을 쥐고 실을 풀어 엄지장갑을 뜹니다. 엄지장갑 뜨기에 실패해 국외로 추방될까 겁먹었던, 소년의 손에 맞지 않는 장갑을 뜰까봐 조마조마했던 소녀는 이제 없어요. 자작나무 같이 늘씬했던 마리카의 삶에 켜켜히 나무테가 쌓이는 동안 엄지장갑쯤 눈 감고도 뜰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거든요. 보리수처럼 듬직하고 근사한 어른이 된거에요. 루프마이제 사람들은 보리수 나무가 여성을 보호한다고 믿는대요. 그 믿음까지 품은 걸까요? 마리카도 어느 새 고아가 된 소녀들을 지켜주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불을 폭 덮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제목이 마리카의 장갑이니까 엄지장갑에 쌓여있는 기분이래야 더 정확할까요? 그만큼 포근하고 따끈따끈한 책이랍니다. 흑빵과 꽃차, 자작나무 주스, 도토리 커피, 오이 피피. 마리카의 삶을 관통한 음식들처럼 건강하고 담백하고 담담한 이야기 속 좋은 일만 가져다준다는 칠엽수 씨앗 하나가제 가슴에도 떨어진 것 같아요. 마리카의 손에서 움뜬 싹이 제 삶에도 행운처럼 피어나길 바라며. 팔디에스(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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