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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다리가 달린 집
소피 앤더슨 지음, 김래경 옮김 / B612 / 2018년 12월
평점 :
"우리 집에는 닭다리가 달렸다.
집은 해마다 두세 번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멀쩡히 잘 살던 곳을 떠난다." (p7)
닭발에 매달린 집이라니 좀 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페이지 첫머리에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한밤중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리는 마링카의 집이라니요. 밤에는 허허벌판의 야트막한 구릉으로 창을 열고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햇빛이 말랑말랑한 평화로운 호숫가에요. 남들은 비행기에 기차에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지만 마링카와 할머니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집의 닭다리가 알아서 움직이니까요. 교통체증도 화장실도 잠자리도 걱정할 필요없는 올인원 서비스! 게다가 집은 자유의지가 있어 누군가의 노동없이 자유자재로 인테리어를 바꿔요. 더운 곳에선 바람통로를 만들고 추운 곳에선 마른 장작으로 쓰라고 서까래 토막 하나도 떼어주고요. 물론 청소도 혼자 가능합니다. 사람이 해주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요. 틀림없이 서재랑 책장도 크게 크게 만들 수 있을 거에요. 말만 못하지 애랑 숨바꼭질도 해줘 술래잡기도 해줘 집주인이 나이가 많아 걷기 힘들다 싶으면 계단도 낮춰줘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판타지를 꿈꾸든 꿈꾸지 않든 모든 사람들이 손꼽을만한 집이라고 환호했는데 단 한 명 그렇지 않은 소녀가 있어요. 닭다리가 달린 집의 손녀 마링카 말예요.
마링카는 움직이는 집이 싫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멋대로 이동하는 집에 화가 나요.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할머니 바바 야가의 운명도 대를 이어 야가가 되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도 싫어요. 야가의 삶은 이승과 지나치게 떨어져있어 외로워요. 죽을 때까지 이런 운명으로 살라니 이건 저주이지 않은가요? 마링카는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산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어요. 살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온기를 나누고 우정을 쌓고 싶어요. 그걸 위해서라면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은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폭언을 퍼붓고 몰래 집을 나갈 수도 있어요. 설마하니 그 결과가 사막에서 친구가 되어준 영혼을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결과가 될 줄은 몰랐지만요. 집을 상처 입히고 새로 사귄 친구들로 인해 집에 불이 날 줄도 몰랐지만요. 무엇보다 마링카로 인해 지쳐버린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할머니가 저승문 너머로 가게 될 줄은, 다시는 할머니를 보지 못할 위기에 처할 줄은 정말정말 몰랐지만요.
제목도 표지도 명랑한 동화일 것만 같았는데 닭다리가 달린 집은 마링카가 운명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계속될까 의아해지기까지 하는 실패와 좌절은 마링카뿐만 아니라 마링카의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상처 입힙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포기하지 못해요. 포기할 수 없어요.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정해진 길로 가는 일을 그녀의 영혼이 거부하거든요. 기어이 저승문 너머까지 몸을 날리는 마링카. 처음엔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철이 없구나, 미쳤어, 어쩜 이렇게 못됐지 라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 거에요. 포기하는 게 주저앉는 게 대세에 순응하는게 훨씬 쉽고 훨씬 편하고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걸 아는, 마음이 노쇄한 독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열두 살의 마링카를 상상했어요. 일천가지 단어를 알아듣는 까마귀와 사랑하는 할머니와 닭다리가 달린 마법 같은 집이 있지만 사시사철 겨울인냥 마음이 외로운 소녀를요. 울타리를 넘어 운명을 개척하는 마링카를 응원합니다. 저승과 이승에 한발씩 걸친 삶으로 틀림없이 상처 입고 상처 주는 일들이 연속되겠지만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훨씬 많을테고 뼈 울타리를 치고 단절된 삶을 사는 것보단 생이 반짝반짝 할 거라 믿어요. 소피 작가의 소망처럼 별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자신의 운명과 함께 춤추기를. 세상 모든 아이들이 이 책을 만나는 독자들의 삶도 그러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