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국민학교 때 처음 뜨개질을 했어요. 뜨개질이라기엔 뭣한 스킬자수가 시작이었습니다. 문방구에 가면 바늘이랑 도안이랑 실을 세트로 팔았거든요. 온반에 여자애들이 이걸 했어요. 저는 해바라기랑 둘리를 했었는데 전화기 밑에 받침으로 쓰려다가 발닦개로 쓰려다가 그냥 어딘가로 사라졌던 것 같아요. 아마도 나 몰래 쓰레기통행? 손재주가 바닥인데 도안 맞춰 바늘에 실 하나 걸어 돌려서 팍팍 빼면 되니까 완성까지 무지 쉽고 빨랐어요. 그 다음 해엔 유행이 바뀌어 대바늘을 썼습니다. 아이들 여럿이 수예점에서 실을 사서 목도리를 떴어요. 코가 얼마나 나갔는지는 설명하지 않을게요. 목도리에 구멍이 숭숭해서 둘렀을 때는 몰라도 그냥 보면 보기가 흉했어요. 손때는 왜 그리 탔는지 시커멓고 말예요. 누가 보면 손도 안씻고 사는 애가 뜨개질까지 하는구나 했을거에요ㅠㅠ 코바늘로 손바닥만한 쪼가리도 하나 뜬 적 있는데 그 때 썼던 바늘 두 개가 작년까지 저희 집에 있었지 뭐에요. 이사 때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죽을 때까지 안할텐데 코바늘 따위,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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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가 루프마이제 공화국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런지 상상만 해도 아찔해요. 루프마이제 공화국의 사람들은 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엄지장갑과 함께 하거든요. 아주 추운 나라이기에 아이가 태어나면 꼭 엄지장갑으로 손싸개를 해줘요. 사랑을 고백할 때도 상대에게 엄지장갑을 주고요. 결혼을 하거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아주 특별한 무늬를 넣은 엄지장갑을 착용해요. 엄지장갑이 가득 든 궤짝이 예물인 나라라니 상상이 가세요? 하물며 엄지장갑 뜨기 시험을 치는 나라는요?

12살이 되면 공화국의 아이들은 남여 가리지 않고 수공예 시험을 치루는데요. 여자 아이들은 엄지장갑을 떠요. 에이, 국영수 보다 나은 거 아냐? 수공예 시험이라니 재미나겠는데? 그런 생각들 하고 계시다면 손가락 절레절레. 국영수 못한다고 대한민국 국적이 박탈되진 않잖아요. 루프마이제 친구들은 나라에서 쫓겨나요. 이 시험에 떨어지면 국민으로 인정이 안되요. 세 오빠들과 호수에서 헤엄치고 숲을 뛰어다니기만 좋아하던 마리카는 아주 큰일이 난거죠. 루프마이제 제일 가는 수예 실력을 가진 할머니를 뒀지만 마리카는 수예를 아주아주 싫어하거든요. 손재주가 꽝이기도 했구요. 후들후들 떨면서 치른 닷새 동안의 시험 결과는 다행히도 보결! 어쩌면 이때부터 아무 것도 몰랐던 어린아이 마리카가 성실과 노력, 인내, 책임과 의무의 의미를 알고 성장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어요.

크리스마스 즈음에 태어난 건강한 아기는 아름다운 소녀가 되고 첫사랑을 만나고 소년과 춤을 추고 밤을 지새우고 감탄이 나오는 결혼생활을 하고 남편을 전쟁터로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며 많은 행복과 더 많은 불행을 마주했어요. 그치만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12살의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포기하지 않아요. 그 상황에서 달아나거나 돌아서지도 않구요. 묵묵히 바늘을 쥐고 실을 풀어 엄지장갑을 뜹니다. 엄지장갑 뜨기에 실패해 국외로 추방될까 겁먹었던, 소년의 손에 맞지 않는 장갑을 뜰까봐 조마조마했던 소녀는 이제 없어요. 자작나무 같이 늘씬했던 마리카의 삶에 켜켜히 나무테가 쌓이는 동안 엄지장갑쯤 눈 감고도 뜰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거든요. 보리수처럼 듬직하고 근사한 어른이 된거에요. 루프마이제 사람들은 보리수 나무가 여성을 보호한다고 믿는대요. 그 믿음까지 품은 걸까요? 마리카도 어느 새 고아가 된 소녀들을 지켜주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불을 폭 덮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제목이 마리카의 장갑이니까 엄지장갑에 쌓여있는 기분이래야 더 정확할까요? 그만큼 포근하고 따끈따끈한 책이랍니다. 흑빵과 꽃차, 자작나무 주스, 도토리 커피, 오이 피피. 마리카의 삶을 관통한 음식들처럼 건강하고 담백하고 담담한 이야기 속 좋은 일만 가져다준다는 칠엽수 씨앗 하나가제 가슴에도 떨어진 것 같아요. 마리카의 손에서 움뜬 싹이 제 삶에도 행운처럼 피어나길 바라며. 팔디에스(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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