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파파와 바다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7
토베 얀손 지음, 허서윤.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의 너울치는 바다만큼이나 혼란한 무민 가족의 이야기 <무민파파와 바다>를 만났습니다.

무민 시리즈를 읽어오면서 이만큼 위기감을 느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무민 골짜기로 돌아올 날을 고대하며 집 밖으로 모험을 떠나던 가족들이 이번엔 아예 이사를 가버리거든요.

겨울잠을 자는 가족들 속에서 무민이 홀로 깨어나 극야를 날 때보다

하지의 지진과 폭풍에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보다 이번 이동이 훨씬 힘들더라구요.

삶의 터전을 바꾸는 일은 사람에게나 무민에게나 정말 쉽지 않은 일인가봐요.

이야기의 시작은요.

무민파파의 한숨과 울화로부터 시작을 해요.

무민파파는요.

요즘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도 자꾸 짜증이 나고 뿔뚝뿔뚝 성질이 돋아요.

무민 골짜기의 평화로운 삶이 주는 권태로움에 자꾸만 어깨가 쳐지구요.

규칙적인 일상, 남편의 의견이나 아버지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족들에 무기력증을 느낍니다.

오죽하면 골짜기에 불이라도 나서 본인이 화재진압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 한다니까요.

무민 마마는 남편의 짜증을 견디다 견디다 결국 결단을 내립니다.

무민 파파가 꿈에 그리던 등대로 이사를 하기로요!

"희한한 일도 다 있지. 평온하게 잘 지낸다고 해서 우울하고 불만스러워질 수도 있다니 정말 희한해.

그래도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색다르게 다시 시작해도 괜찮겠지." (p35)

새로운 환경에 오기만 하면 뭐든 다 잘될 것만 같고 좋을 줄로만 알았지만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등대, 온순한 흙은 적고 커다란 돌들만 많은 검고 칙칙한 섬,

비만 오면 새는 천장,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곧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높다란 계단,

바다가 무서워 자꾸만 자리를 옮기는 키가 작은 나무들과 풀,

거센 파도, 누군가의 울음 같은 바다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곳이란..

온가족이 모여 하하호호 웃음꽃이 피던 무민 골짜기의 저녁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어요.

새로운 일을 바랬던 무민 파파조차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쏟아내거든요.

거대하고 튼튼한 무언가를 세우고 싶었지 매일매일 바닷말을 뜯으며 그물을 수리하거나

낡아빠진 등대를 고치거나 반기지도 않는 물고기를 잡으러 낚시만 하려했던 게 아니라규!!

가족들 모두가 마음이 어질어질, 갈팡질팡, 싱숭생숭 해지는 하루하루.

무민 가족들의 내일에 다시금 평화가 깃들 수 있을까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들지요.

내가 원하고 바랬던 일이라 할지라도 생각지도 못한 고난이 나타나면 지금 선택에 후회가 되기도 하구요.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거나 차라리 돌아가버릴까 낙심하기도 해요.

그러나 대게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이 될 문제들이 아닌가 싶어요.

공을 들여 터전을 가꾸고 낯을 익히고 이웃을 만들고 잠자리를 든든하게 다지다가

그도 아니면 그저 아무 이유없이 모든 게 다 근사해지는 하루가 어느 날 문득 찾아올지도요. 

무민의 말처럼 "어쩌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는 일" 세상엔 한두가지가 아닐테니까요.

"다들 알겠지만, 바다는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거대한 녀석이에요. 바다가 왜 그러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우리가 바다를 좋아하면 아무 문제 될 게 없죠. 뭔가 얻으려면 단점도 받아들여야 하니까." (p2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걱정 마, 잘될 거야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오연정 옮김 / 이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신, 결혼, 사춘기, 여행, 가족, 차, 일기. 여성의 생활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던 마스다 미리가 이번엔 직장 생활로 돌아왔습니다. 24살의 2년차 직장인 오카자키 마리코, 34살의 12년차 직장인 야베 마리코, 42살의 20년차 직장인 나가사와 마리코. 각기 다른 근속연수의 마리코들이 들려주는 회사와 일과 인간관계의 이야기입니다.

세 명의 마리코들은 각기 다른 나이, 각기 다른 세대, 각기 다른 근속연수만큼이나 다른 생각에 골몰하며 근무 중입니다. 2년차 마리코는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동기들과의 비교, 경쟁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이 맞물려 스트레스 받고 있어요. 능력있는 선배들의 연륜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들에게 없는 젊음을 불쌍하게 여기구요. 그 세대끼리만 통하는 문화를 경멸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얼른 정년이 되어줬으면.. 이런 바람을 가진 젊은이에겐 나이듦이 남의 나라 얘기만 같겠지요? 12년차 마리코는 어중간합니다. 아주 젊다고도 아주 많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처럼요. 젊음의 기운이 가득한 후배들에겐 삐쭉삐쭉 미운 마음이 솟구요. 나이 많은 상사의 안일한 삶을 지켜보자면 한심한 마음이 들고 그래요. 청춘으로 돌아갈 일은 없이 앞으로 저 상사의 모습대로 나이들어가겠구나라는 예감이 들 때면 더욱 우물쭈물,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20년차 마리코, 남들은 베테랑 직장인이라지만 본인은 압니다. 그럭저럭 간신히 해나가는 중이라는걸요. 회사 내 존재감은 없지만 젊은 시절엔 없던 근력을 20년 동안 꾸준히 쌓아오며 웬만해선 상처입지 않는 든든한 내공을 다졌습니다. 특이한 건 30대 마리코와는 달리 젊음을 그닥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예쁘다고 또 싱그럽다고도 생각하지만 20대 그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비슷하고 경직되고 차별적이기도 한 직장생활 속에서도 창문은 쬐끔 열려 있고 그곳으로부터 산들바람 정도는 불어온다고, 매일의 공기는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요. 어째 마음만은 34살 마리코보다 더욱 젊지요?

 

 

일본ㅡ한국 사이에 분명 바다가 가로지르고 있는데 어쩜 오늘 여기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인냥 익숙할까요? 내가 오늘 지금 여기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인냥 친숙하기도 하구요. 마스다 미리가 매 권의 책에서 추구하는 연대와 공감의 마음이 <걱정 마, 잘될 거야>에서 한층 두드러진 느낌이었습니다. 잘될 거라고 장담은 못해도 걱정한다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으니 기지개를 쫘악 펴고 내일도 편안한 하루를 목표로 해야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지스 할머니의 작품으로 표지를 삼아 정말이지 예쁜 책 <가을>을 만났습니다. 앨리 스미스의 사계절 4부작의 첫 작품인데 이 작품이 저한테는 조금.. 실은 많이 어려웠어요. 고백하려니 어째 머쓱하군요 ㅎㅎㅎ

"한 손에 세계를 몇 개나 담을 수 있을까?"(p17)의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처럼 엘리 스미스의 <가을> 속에도 도대체 몇 개나 되는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얘기 중 제가 몇 개나 이해했는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중심 이야기는 동네에 호모라고 소문난 여든의 작곡가 대니얼과 대니얼의 옆집에 이사 온 풍부한 상상력의 소녀 여덞살 엘리자베스의 우정이에요. 나이와 시간을 초월해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이야기요. 그치만 아무리봐도 그게 다가 아니거든요. 브렉시트, 노화, 상실, 혐오와 터부, 대립, 예술, 문학, 고전, 페미니즘, 사랑, 증오, 포격.. 포착한 것만 이 정도인데 문제는 제가 작가에 대해서도 영국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며 고전이나 기타 예술적인 지식도 많이 떨어져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의 반의 반도 이해를 못한 것 같다는 거에요. 벽을 가득 채운 낙서 "돌아가 네 나라로"나 평범한 마을을 가로 지르는 전기 울타리 등 활자화 된 내용이 단박에 피부에 와닿는 경우도 있었지만요. 올더스 헉슬리,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오비디우스 그 밖으로 등장한 다양한 작가들의 책이나 영국 가수, 영국 배우, 영국 문화의 어느 언저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과 기타 말장난에는 아주 깜깜이라 까만 것은 글자요 하얀 것은 종이구나 하는 식의 독서를 하고 말았습니다ㅠㅠ 엘리자베스가 내내 방문하는 우체국 또 우체국 안에서 여권을 신청하는 행위에도 어떤 의미가 부여된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아닌건지를요. 아차, 패미니즘적인 시각으로 해석 가능할, 대니얼이 사랑했고 엘리자베스가 연구 중인 화가 폴린 보티도 주요한 소재였는데 이 분을 잊을 뻔 했네요. 처음엔 작가가 가상으로 만든 인물인 줄 알았는데 감사의 말과 인터넷 검색으로 실존인물임을 확인했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에요. 가공과 사실의 구분이 도무지 되지 않는다는 것!

하여튼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가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발치를 덮는 것 같은 독서였어요. 단풍 구경 가서 이게 무슨 나무고 몇 월에 꽃을 피우고 열매는 무슨 모양이며 잎새는 또 어떻게 다시 싹을 피울지를 일일이 분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수는 마냥 예쁘다, 슬프다, 아름답다 감탄하고 사진 찍고 때로는 낙엽 위를 뒹굴뒹굴 하는 걸로 감상을 끝내잖아요. 앨리 스미스의 <가을>에 제가 딱 그렇게 단순 감탄사만 날리는 관광객이 되었다 돌아온 느낌이에요. 근데 싫지 않았거든요. 이게 포인트입니다! 싫지 않았어요!! 더 잘 읽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쉽다는거지 재미없다거나 지루하다거나 힘든 독서였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뭐라 설명이 안되는데 리뷰로는 이 느낌을 전달할 수 없어 정성을 들이는 의미로 글그램 필사를 했어요. 책 속 어느 문장에도 따옴표가 없어요. 어느 순간 문장들이 시처럼 흐르기도 하고요. 가을처럼 아름답고 가을처럼 쓸쓸하고 늦가을 계절도 모르고 핀 장미처럼 엉뚱한 책이에요. 제 리뷰는 전혀 미끼가 안될테니 아래 문장들을 보고 유혹당해 주세요!! 부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현대지성 클래식 13
에디스 해밀튼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스 로마 신화를 꽤 여러 번 읽었어요.

 같은 책을 재독하진 않았지만 출판사를 바꿔가며 장르도 다양하게 접했는데

 무슨 밑빠진 독의 물붓기처럼 읽어도 읽어도 왜 이렇게 새롭고 낯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는 1942년에 출간된 고전학자 에디스 해밀턴의 작품입니다.

 여태 읽은 책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이라면 해밀턴이 여러 희비극 작가들의 원전 속에서 신화들을 비교 인용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데요. 고전 신화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에 의존하고 있지만 "고대 시인들의 어마어마한 거짓말에 대해 난 얘기한다네" 라고 노래할 정도의 무신론자인데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쓸데없는 사족이 해밀턴의 취향이 아니어서 오비디우스가 남긴 신화는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했대요. 대신에 엄숙한 진실로써 신화를 신뢰한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 테오크리토스, 핀다로스 등의 그리스 작가들과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신의 인간적 본성을 생생하게 되살린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등을 여러번 언급합니다. 같은 신화라도 신을 믿는 그리스 시인과 신을 믿지 않는 로마 시인의 이야기가 다르고 시인의 성향과 개성에 따라 느낌이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여태 이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않고 신화를 읽어왔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옛 그리스 로마 시인들의 지문을 마주하며 신화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신화를 우리에게 전달해준 시인들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1. 안녕, 안녕, 안녕

저는 비극을 싫어하는데요. 비극이어도 싫지 않은 거의 유일한 장르가 신화 속 사랑 이야기에요. 신화에서만큼은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했다는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커플보다는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야기에 더 끌려요. 에디스 헤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안녕"하고 인사하는 세 남녀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워낙에 친숙한 이야기라 모두가 이름만 들어도 알아차릴 것 같습니다. "나르키소스, 오르페우스, 바우키스와 필레몬". 자신의 미모에 반한 나르키소스, 그런 나르키소스를 사랑하는 님프 에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나르키소스는 연못 위에 얼굴을 드리우고 그 얼굴에 빠져 점점 야위어 가는데요.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안녕하고 인사하면 에코도 나르키소스에게 작별 인사로 안녕 하고 인사를 해요. 동굴의 에코 얘기만 들어오다가 연못에서 안녕하는 이야기를 삽화와 함께 마주하니 아주 우습게 느껴졌던 나르키소스 신화가 급 아련해졌습니다. 수선화에 얽힌 신화는 호메로스풍 찬가 속 페르세포네의 것과 오비디우스의 나르키소스 두 가지 버전이 전해 내려오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감상적인 후자의 것이 훨씬 좋네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그리스의 작가 아폴로니우스와 로마 시인들인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가 한 작가의 것처럼 아주 비슷하대요. 죽은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지하로 내려간 오르페우스, 두 사람이 다 지상에 닿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면 안됐는데 오르페우스는 그리움과, 불안, 호기심이 너무 커 빛 속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곧장 뒤를 돌아보게 되요. 미처 에우리디케가 동굴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요. 에우리디케는 아무 원망도 없이 그저 "안녕" 희미한 인사만 놓고 사라지는데요. 그 '안녕' 때문에 후회로 황야를 맴도는 오르페우스의 마음이 더 절절하게 와닿았습니다. 안녕이란 인사를 드물게 희극으로 마무리하는 커플도 있어요.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나그네로 변신한 유피테르와 메르쿠리우스 신을 따뜻하게 환대해 홍수가 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가 됩니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한날 한시에 참나무와 보리수나무로 변신하며 사망하는데 간신히 한 마디 외칠 시간이 남았을 때 "내 소중한 사람이여, 안녕!" 하고 인사했다고 해요. 드물게 뿌듯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저라면 온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간 자리에서는 무서워서 못살았을 것 같아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라틴어 이름으로 등장하는 까닭은 오비디우스만이 유일하게 언급한 신화여서 그렇다네요.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했음에도 오비디우스만 남긴 신화가 꽤 여러편이라 어쩔 수 없다는 점! 재미있어요 ㅎㅎㅎ 

2.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속 저승

 

에이번리의 앤이 8월의 한가운데서 만나고 있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을 여기서 다시 만나는군요. 로마 시조가 된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은 황금양털, 헤라클레스, 트로이 전쟁, 오디세우스의 모험과는 달리 제게는 좀 낯선 이야기인데요. 앤이 읽었던 시집 <아이네이스>를 읽을 자신이 없으므로 대신에 이 작품 속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을 더 집중해 읽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흥미로웠던 장면은 크레타로부터 서쪽을 항해하는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자체가 아니라 저승에 대한 그리스와 로마 시인들의 인식 차이였습니다. 아이네이아스 이전에도 신화 속 많은 인물들이 하데스가 관장하는 저승세계를 방문하잖아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페르세포네를 구출하기 위해 하계를 방문했다가 꼼짝없이 망각의 의자에 붙들리구요. 헤라클레스는 열두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하계에 왔다가 그런 테세우스를 구출해 주기도 해요.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하계로 내려가 리라 연주로 신들을 꾀었구요. 영웅이랄 수도 없는 연약한 공주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심부름으로 하계를 방문해 페르세포네의 비약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고작해야 빵 한 조각으로 저승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를 달래면서요. 어쨌든 그때의 하계는 방문하기 어렵기는 해도 전혀 무섭거나 두려운 곳이 아니었는데 아이네이아스가 저승을 방문할 때부터는 저승이 굉장히 공포스러운 장소가 되요. "창백한 질병, 복수심에 불타는 걱정, 죄를 짓도록 충동질하는 굶주림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무리가 뚜렷한 형체없이 존재하는 곳, 전쟁과 불화와 저주가 모여있는 자리." (p393) 해밀턴이 짚어주는 그 차이가 굉장히 인상적이라 머리에 콕 박히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아이네이아스도 저승에서 예언을 잘 받고 돌아와 무사히 로마 민족을 태동시키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지만요. 전 베르길리우스식 저승보다는 그리스의 보다 온건한 하계가 훨씬 좋아요.

 

 

 

가나다 순으로 정리된 짤막한 신화, 신화 속 위대한 가문들처럼 독특한 구성이 곁들여져 신선하구요. 친숙해서 반가운 신들과 영웅들의 모험은 언제나와 같이 즐겁답니다. 같은 신화를 다르게 풀어가는 시인들의 비교도 흥미롭구요.

두껍지만 그래서 완독에 시간도 좀 걸리지만 어린이 독자를 제외하면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요.

올봄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책 에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SB] 빨강머리 앤 : 에이번리 이야기 (오디오북) 오디오북 빨강머리 앤 시리즈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엄진현 옮김, 이지혜 낭독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디오북 빨강머리 앤 시리즈는 정말 제 인생의 앤이에요. 최고는 단연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었는데요. 오디오북 빨강머리 앤이 비어있던 차석 자리를 냉큼 차지하더니 이제는 수석의 애니 앤과 대등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티비 속의 앤에는 여기 에이번리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솔직히 에이번리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날 줄은 정말 몰랐어요>_<

 

근래 하루 일과가 오디오북 에이번리 이야기를 듣는 거였어요. 눈 뜨면 휴대폰에 저장해 둔 오디오북을 켜구요. 잠자리에 누워서도 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습니다. 책과 함께 오는 USB 속 파일을 편하게 옮길 수 있어서 휴대폰이랑 컴퓨터, 태블릿에 담아놓고 내내 끼고 살았어요. 앤 때문에 잠 못들기도 하고 앤의 편안한 목소리에 잠겨 꿀잠 자기도 하구요. 빨래를 널 때나 설거지를 할 때 또 뚜벅이 출퇴근 길에도 함께 했네요. 지난 주엔 자주 비가 와서 오래 걷지 못했지만 지지난 주엔 앤과 함께 장미가 빨갛고 제비꽃이 파랗고 팬지가 알록달록 핀 길을 따라 여러번 산책도 했답니다. 아랫동네에 사는 저는 4월 17일 첫 장미를 목격했거든요. 시에서 심은 튤립과 팬지도 이미 만개해서 화단을 스쳐 걸으면 꽃향기가 뭉클한데 그 순간 에이번리에도 봄이 가득 피어서 앤이 저랑 똑같은 꽃들을 보고 있는 거에요!! 아니 물론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요. 앤이 봄을 찬양하고 봄을 감탄하는 순간에 저도 같은 봄을 느낀다는게 설레구요. 귀도 눈도 어찌나 황홀하던지요. 쓰고 보니 약간 오글오글, 제 맘 속 소녀 감성이 넘 생생해진게 이번 독서의 유일한 단점 같아요 ㅋㅋ

 

16살하고도 반의 나이에 에이번리 학교의 선생님으로 부임한 앤, 베르길리우스 시집을 길버트와 함께 공부하는 앤, 클리피 라이트에게 A가 A란 걸 가르치는 앤, 친구들과 함께 마을 개선 사업회를 시작한 앤, 학생 어느 한 명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은 앤, 옆집 해리슨씨의 소를 메슈 아저씨가 사준 돌리인 줄 알고 팔아버린 앤, 여섯살 쌍둥이 데이비와 도라와 함께 살게 된 앤, 폴 어빙의 바닷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앤, 메아리 집의 노처녀 라벤더와 친구인 앤, 다이애나의 사랑을 엿보는 앤, 길버트와 두 눈을 맞추는 앤, 드디어 대학의 문을 열게 된 앤.. 스테이시 선생님을 존경하던 학생이 어느 새 같은 자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 2년이라는 시간이 장장 14시간 507 페이지로 이어지는 내내 생각했어요. 소녀 시절의 앤만으로 어떻게 만족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구요. 10권이나 되는 전집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펼쳐보거나 들여다 볼 생각을 안했던 건 내심 어른이 된 앤에게 실망할까봐 그리고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는데요. 지금은 아니야! 부족해! 다음 권 얼른얼른!!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앤이 좋아서, 더 정확히는 <오디오북 빨강머리 앤>의 번역과 성우가 정말정말 좋아서요. 일전의 다른 판본의 앤을 읽고는 '나 너무 늙어버렸나봐, 감수성 다 식었어, 앤이 어쩜 이렇게 재미없지' 했는데 오디오북 앤은 한 챕터가 줄 때마다 아쉽고 서운했어요. 소녀 시절의 페이지를 마무리하고 책을 덮을 땐 괜히 코 끝이 찡하기까지. 앤은 이제 곧 레드먼드 대학에서 길버트와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겠지요? 앤의 청춘이 또 어떤 빛깔로 우리를 찾아올지 내내 기대하고 고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앤의 오랜 팬으로 출판사 커뮤니케이션북스, 엄진현 역자님, 이지혜 성우님의 노고에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