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현대지성 클래식 13
에디스 해밀튼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스 로마 신화를 꽤 여러 번 읽었어요.

 같은 책을 재독하진 않았지만 출판사를 바꿔가며 장르도 다양하게 접했는데

 무슨 밑빠진 독의 물붓기처럼 읽어도 읽어도 왜 이렇게 새롭고 낯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는 1942년에 출간된 고전학자 에디스 해밀턴의 작품입니다.

 여태 읽은 책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이라면 해밀턴이 여러 희비극 작가들의 원전 속에서 신화들을 비교 인용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데요. 고전 신화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에 의존하고 있지만 "고대 시인들의 어마어마한 거짓말에 대해 난 얘기한다네" 라고 노래할 정도의 무신론자인데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쓸데없는 사족이 해밀턴의 취향이 아니어서 오비디우스가 남긴 신화는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했대요. 대신에 엄숙한 진실로써 신화를 신뢰한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 테오크리토스, 핀다로스 등의 그리스 작가들과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신의 인간적 본성을 생생하게 되살린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등을 여러번 언급합니다. 같은 신화라도 신을 믿는 그리스 시인과 신을 믿지 않는 로마 시인의 이야기가 다르고 시인의 성향과 개성에 따라 느낌이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여태 이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않고 신화를 읽어왔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옛 그리스 로마 시인들의 지문을 마주하며 신화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신화를 우리에게 전달해준 시인들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1. 안녕, 안녕, 안녕

저는 비극을 싫어하는데요. 비극이어도 싫지 않은 거의 유일한 장르가 신화 속 사랑 이야기에요. 신화에서만큼은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했다는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커플보다는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야기에 더 끌려요. 에디스 헤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안녕"하고 인사하는 세 남녀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워낙에 친숙한 이야기라 모두가 이름만 들어도 알아차릴 것 같습니다. "나르키소스, 오르페우스, 바우키스와 필레몬". 자신의 미모에 반한 나르키소스, 그런 나르키소스를 사랑하는 님프 에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나르키소스는 연못 위에 얼굴을 드리우고 그 얼굴에 빠져 점점 야위어 가는데요.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안녕하고 인사하면 에코도 나르키소스에게 작별 인사로 안녕 하고 인사를 해요. 동굴의 에코 얘기만 들어오다가 연못에서 안녕하는 이야기를 삽화와 함께 마주하니 아주 우습게 느껴졌던 나르키소스 신화가 급 아련해졌습니다. 수선화에 얽힌 신화는 호메로스풍 찬가 속 페르세포네의 것과 오비디우스의 나르키소스 두 가지 버전이 전해 내려오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감상적인 후자의 것이 훨씬 좋네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그리스의 작가 아폴로니우스와 로마 시인들인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가 한 작가의 것처럼 아주 비슷하대요. 죽은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지하로 내려간 오르페우스, 두 사람이 다 지상에 닿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면 안됐는데 오르페우스는 그리움과, 불안, 호기심이 너무 커 빛 속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곧장 뒤를 돌아보게 되요. 미처 에우리디케가 동굴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요. 에우리디케는 아무 원망도 없이 그저 "안녕" 희미한 인사만 놓고 사라지는데요. 그 '안녕' 때문에 후회로 황야를 맴도는 오르페우스의 마음이 더 절절하게 와닿았습니다. 안녕이란 인사를 드물게 희극으로 마무리하는 커플도 있어요.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나그네로 변신한 유피테르와 메르쿠리우스 신을 따뜻하게 환대해 홍수가 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가 됩니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한날 한시에 참나무와 보리수나무로 변신하며 사망하는데 간신히 한 마디 외칠 시간이 남았을 때 "내 소중한 사람이여, 안녕!" 하고 인사했다고 해요. 드물게 뿌듯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저라면 온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간 자리에서는 무서워서 못살았을 것 같아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라틴어 이름으로 등장하는 까닭은 오비디우스만이 유일하게 언급한 신화여서 그렇다네요.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했음에도 오비디우스만 남긴 신화가 꽤 여러편이라 어쩔 수 없다는 점! 재미있어요 ㅎㅎㅎ 

2.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속 저승

 

에이번리의 앤이 8월의 한가운데서 만나고 있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을 여기서 다시 만나는군요. 로마 시조가 된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은 황금양털, 헤라클레스, 트로이 전쟁, 오디세우스의 모험과는 달리 제게는 좀 낯선 이야기인데요. 앤이 읽었던 시집 <아이네이스>를 읽을 자신이 없으므로 대신에 이 작품 속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을 더 집중해 읽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흥미로웠던 장면은 크레타로부터 서쪽을 항해하는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자체가 아니라 저승에 대한 그리스와 로마 시인들의 인식 차이였습니다. 아이네이아스 이전에도 신화 속 많은 인물들이 하데스가 관장하는 저승세계를 방문하잖아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페르세포네를 구출하기 위해 하계를 방문했다가 꼼짝없이 망각의 의자에 붙들리구요. 헤라클레스는 열두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하계에 왔다가 그런 테세우스를 구출해 주기도 해요.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하계로 내려가 리라 연주로 신들을 꾀었구요. 영웅이랄 수도 없는 연약한 공주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심부름으로 하계를 방문해 페르세포네의 비약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고작해야 빵 한 조각으로 저승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를 달래면서요. 어쨌든 그때의 하계는 방문하기 어렵기는 해도 전혀 무섭거나 두려운 곳이 아니었는데 아이네이아스가 저승을 방문할 때부터는 저승이 굉장히 공포스러운 장소가 되요. "창백한 질병, 복수심에 불타는 걱정, 죄를 짓도록 충동질하는 굶주림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무리가 뚜렷한 형체없이 존재하는 곳, 전쟁과 불화와 저주가 모여있는 자리." (p393) 해밀턴이 짚어주는 그 차이가 굉장히 인상적이라 머리에 콕 박히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아이네이아스도 저승에서 예언을 잘 받고 돌아와 무사히 로마 민족을 태동시키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지만요. 전 베르길리우스식 저승보다는 그리스의 보다 온건한 하계가 훨씬 좋아요.

 

 

 

가나다 순으로 정리된 짤막한 신화, 신화 속 위대한 가문들처럼 독특한 구성이 곁들여져 신선하구요. 친숙해서 반가운 신들과 영웅들의 모험은 언제나와 같이 즐겁답니다. 같은 신화를 다르게 풀어가는 시인들의 비교도 흥미롭구요.

두껍지만 그래서 완독에 시간도 좀 걸리지만 어린이 독자를 제외하면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요.

올봄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책 에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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