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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부락의 역사 - 차별과 싸워온 천민들의 이야기
일본부락해방연구소 지음, 최종길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3월
평점 :
재일교포문학을 공부하다가 재일교포의 사회적 위치와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가지를 뻗쳐 재일교포 외에도 아이누인, 오키나와인, 그리고 부락민 등 일본 내에서 차별당하는 집단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책 <일본 부락의 역사>를 발견했을 때 이거다 싶어서 읽게 되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에서도 다룬 부락민 문제를 이 책은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고대 일본에는 오색의 천(五色の賎)이라 하는 다섯 가지 천민 신분이 있었다. 사노비와 관노비, 관호(官戶), 가인(家人), 능호(陵戶) 등의 신분인데, 이들은 조세를 부담하지 않았고 성씨를 가질 수 없었다. 일본 내에서 성씨를 갖지 않는 신분은 천황과 천민뿐이라고 한다. 또한 케가레(ケガレ)라 하는 관념이 있는데 이는 일체의 악이며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종의 '부정不淨'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죽은 사람이나 동물을 처리하거나 무덤 등과 관련된 일들은 모두 케가레로써 정화되어야 하고, 그러한 역할을 맡은 것이 천민들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중세 시대까지 이어져, 중세에는 꺼려하는 일을 하는 특정한 집단이 출현하게 된다. 이때는 피차별민을 총칭하여 히닝(非人)이라 했다. 이 히닝에는 나병 등의 환자들도 포함되었다. 신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죽은 사슴을 처리하는 것 역시 히닝이 했으며 오물 처리, 신사 경내 청소 등의 일도 하였다. 중세 말기에는 에타, 카와라모노 등의 피차별민 집단 역시 등장한다.
근세시대로 들어와서 일본은 격동의 시기에 휩싸이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천하통일 사업이 시작하였고 신분통제령이 발포됨에 따라 피차별부락민에게는 고유한 직업과 부역의 부담이 강제되었고 거주지에도 규제가 있었다.(부락민이라는 호칭은 이 때부터 사용된게 아닌가 싶다. 평민과 사는 곳을 달리하게 했기 때문에 일정한 곳에 모여 살았고, 그 마을을 부락이라 칭했다.) 근세의 피차별민에는 죽은 동물 처리와 피혁업, 신발 제조업에 종사하는 에타, 축사나 조사 등을 하고 금품을 받는 것과 넝마주이를 업으로 하는 히닝이 있다. 이들은 평민과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 상투를 잘라서 머리를 묶지 못하게 하고, 모자를 착용해서는 안 되며 히닝이 사는 집은 가건물로 지어야 하는 등의 차별이 있었다. 그러한 에타와 히닝들과는 밥조차 함께 먹지 않았고 목욕을 하고 자는 장소도 따로 했다. 물건을 주고받을 때도 그릇 등을 사용하여 손이 닿지 않게 하였으며 돈 같은 것을 받으면 그 돈을 물로 씻었다. 또한 참 씁쓸했던 부분은, 종교적인 것으로도 계명이나 법명을 차별해서 지어줬다는 점이었다. 에타 신분 사람의 계명과 법명에는 축남(畜男)-짐승 남자, 예비녀(隸婢女)-천한 계집종 여자, 선축(禪畜), 예남, 찬드라남(인도 카스트제도의 천민), 찬드라니 등 평민에게 사용하지 않는, 그리고 뜻이 좋지 못한 단어들을 사용한 것이다. 현세뿐만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까지도 철저히 차별하는 것이다.
참 가슴아픈 일화도 있다. '쵸슈번의 부락민인 슈스케는 신분을 속이고 의사가 되어 부젠의 어느 마을 의사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그런데 장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오래 거주하면 신분이 발각될 우려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부인과 함께 도망갔다. 칸몬 해협을 건너는 지접에서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부인에게 이혼을 청했다. 그러나 부인은 납득하지 못하고 둘이서 슈스케의 고향 부락으로 돌아갔다. 그 후 부젠의 백부가 부인을 데리러 왔지만 부인은 슈스케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슈스케는 메아카시(目明し, 에도시대에 죄인을 체포하러 다닌 하급관리)에게 체포되었으며 부인은 고향으로 송환되었다.(p.161 중 발췌)' 의사까지 될 정도면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었을텐데, 백정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강제로 부인과 헤어지게 되다니 가슴아픈 일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사회에서는 해방령이 발표된다. 그리하여 에타와 히닝 신분의 사람들도 모두 평민 신분으로 편입되었으나 차별은 여전히 만연했다. 해방령 반대 봉기도 잦았고 예전에 에타였던 사람은 '신평민'이라는 또 다른 차별적인 호칭을 갖게되었다. 부락민 출신의 교사의 고뇌를 그린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도 이때 쓰여졌다. 그 당시 자신이 부락민 출신이라고 밝히는 것은 지금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하는 것보다 더욱 임팩트가 큰 일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융화운동 등의 반파시즘 투쟁도 빈번히 일어났다. 전쟁 후에는 부락해방전국위원회가 결성되고, 사야마 사건 등의 부락민 차별 사건을 수많은 사람들이 규탄했다. 법적으로는 부락 출신을 차별할 수 없었지만, 은연중에는 모두 차별적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이나 회사 입사 시에 뒷조사를 하는 등의 일이 많았다. 심지어는 예전에 부락에 속했던 행정구역들을 적은 '부락지명총람'이라는 차별적인 책을 펴내는 사건도 1975년에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 부락 출신에 대한 차별이 일본 내에서 만연하고 있지는 않을까. 재일교포나 아이누인, 오키나와인에 대한 차별이 지금까지도 횡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락 출신의 사람들도 어쩌면 지금도 숨죽여 살지 모른다. 사실 그동안에 재일교포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읽고 알아봤어도 부락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를 못했는데,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와 이 책 <일본 부락의 역사>를 읽고 일본 내의 또 다른 피차별 집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차별을 받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러한 부조리들에 대해 하나 하나 알아 나가는 것이야말로, 그러한 차별들을 철폐해 나가는 수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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