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는 잠옷을 입고 우리 집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까지 올 분별력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깨질듯이 지끈거렸다. - P174

나를 본 가즈미의 얼굴에 안도와 탄식이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취했는데 용케 택시를 잡았네."
"몇시쯤에 돌아왔어?"
"새벽 네시 다 돼서 서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니까. 그렇게 취하다니 당신답지 않아. 대체 누구랑 그렇게 마신 거야?" - P174

"회사에 결근한다고 전화해줬어. 당신 요새 너무 무리했잖아.
아직 사건의 상처에서 회복되지도 않았고, 당신도 피해자라는거 몰라? 그젯밤에도 당신 잠 못잤지? 알고 있었어. 당신 계속이러다가는 몸이 견디지 못할 거야." - P175

"미우라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면서?"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제 아버지가 전화로 알려주셨어. 미우라가 아니면 대체 누가 범인이란 거지? 경찰이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까?"
"경찰은 못 믿어." 나는 말했다.
"왜?"
"범인은 미우라야 확실해." - P176

 "그러고보니 어제 도미사와 씨한테도 전화가 왔었어."
미치코가 전화를 했다! 방심한 탓에 충격이 컸다. 하마터면주스 잔을 넘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아내는 내 동요를 눈치챈 것 같지 않았다. - P176

"당신하고 둘이서 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네." 가즈미가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중략)
그림만 보면 평화로웠다. 예전과 다름없이 신뢰와 행복으로 충만한 우리 집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풍경이 믿기지 않았다. 지독한 위화감마저 들었다. - P177

나는 자문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무얼 해야 하는가라고.
답은 하나밖에 없다.
시게루를 죽인 범인을 직접 밝혀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미치코의 마음속에 쌓인 나를 향한 증오의 에너지를 모두 살인범에게 돌려야 한다. - P178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는 나카노 뉴하임305호다. 금요일에 시게루를 감금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거기밖에 없다. 그제 방문했을 때 어지러웠던 집 안 상태를 생각하면 시게루가 감금돼 있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삼십 분은 미우라를 집에서 내보내야만 한다.
"다 마셨어?" - P179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에 당신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도와줘."
"대체 뭘 하려는 건데?"
"미우라를 만나줘."
가즈미는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 P180

5장 칩임 / 앉아 있는 시체

"하지만 내가 미우라를 잘 붙잡아둘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그냥 평범한 얘기를 하면 돼. 동생에 관련된 추억이든 뭐든. 미우라도 당신까지 의심하지는 않겠지."
가즈미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차에서 내려 기모노의 소매 주름을 폈다. 나는 아내에게 기모노를 입고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 P183

계획은 단순하다. 가즈미가 미우라의 집으로 찾아가서 밖으로 불러낸다. 그녀의 뜬금없는 방문에는 그저께 나의 폭행에 대해나 대신 사과한다는 번듯한 구실이 있다. (증략)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다카시를 두고 갈등이 있었지만 미우라가 가즈미를 매몰차게 내칠 리는 없다. 그에게 가즈미는 내 아내이기 전에 죽은 쓰구미의 단 하나뿐인 언니니까. - P184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305호 미우라 야스시‘라고 적힌 우편함을 열었다. 나는 미우라의 버릇을 알고 있었다.
걸핏하면 열쇠를 잃어버려 여벌 열쇠를 우편함 뚜껑 뒷면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는다고 예전에 아내의 동생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P185

너무 어질러져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처음에는 붙박이장을 열어서 먼지 쌓인 옷가지들에 머리를 쑤셔넣었다. 아이가 감금됐던 흔적은 없었다. 작년에 일어난 여아유괴 사건이 떠올라서 비디오테이프 선반을 다 뒤집어보고 잡히는 대로 두세 편 재생해봤지만, 시간 낭비였다.  - P186

실망감과 초조감이 밀려왔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전화기를 조사했다. 사건 당일 열시 이후의 연락은 이 방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 집 전화번호 메모를 남길 만큼 바보는 아닐 것이다. 메모리가 부착된 다기능 전화기라 마지막에 건 전화번호가 저장돼있을 거라 생각하고 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 P187

아니, 가즈미와 귀가했는데 현관 앞에 미치코가 기다리고 있는 그림이 눈에 그려져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 방 어딘가에 내가 놓친 증거가 분명 남아있을 것이다.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깔끔한 활자가 인쇄된 종이 몇 장이눈에 띄었다. 이게 노리즈키가 말한 추리소설 초고인가?  - P187

(전략)
"뭐가 보여, 미우라? 뭐가 보이는지 얘기해줘. 이 작자들 모두가여기 살게 되는 거야? 그런 뜻이야. 미우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사는게 보여?"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사정이 멈췄다.
"나쁜 놈, 자기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주제에."
사정, 사정.


이게 전부였다. 나는 종이를 작게 접어서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해 고개를 돌렸다. 뒤에 미우라가있었다. 여전히 얼굴이 부어 있었다. 미우라의 입가에 흉포하게 경련이 일었고, 한껏 팔을 쳐들더니 나를 향해 내리쳤다. - P190

2

이번에는 내가 기절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였다. 전과는 달리 기억의 혼란도 없었다. 미우라에게 딱딱한 뭔가로 얻어맞고 쓰러진 일이 뚜렷이 기억났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뜰 때보다 훨씬 정신이 온전했다. 안주머니를 더듬어보고 미우라의 원고가 아직 있는 걸 확인했다 - P191

이 상태로 문을 박차고 나가 맨손으로 미우라와 맞서는 건 무모하다. 무기가 될 만한 게 있는지 욕실 안을 둘러봤다. 방망이같은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스프레이식 욕실 세제에 눈길이 멈췄다. ‘취급 주의. 원액이 눈에 들어갔을 경우 바로 물로 세척‘이라고 적혀 있다. - P192

엉거주춤한 자세로 집 안을 재빨리 둘러봤다. 실내에 인기이 없었다. 이 공간의 주인은 나를 내버려둔 채 모습을 감춘 듯했다. 일단 신변의 위협은 사라졌다.
순간 내 모습이 서부의 총잡이같이 우스꽝스럽다는 걸 깨닫고 스프레이 세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P193

내가 잘못 생각했다. 미우라는 현관에 있었다. 현관문에 기댄채 내 구두를 깔고 앉아 있었다.
거기에 있으면서 아까 내가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은이유를 알았다. 붉고 커다란 반점이 미우라의 스웨터를 뒤덮고있었다. 늑골 아래 부분이 찢어지고, 검은 칼자루가 꽂혀 있었다.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 P193

일목요연했다. 내가 욕실에서 정신을 잃은 사이 누가 찔러 죽인 것이다. - P193

현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미우라와 대면했다. 양다리를 팔자 모양으로 쭉 뻗었고 무릎에 양손을 얹은 자세였다. 문에 기댄 상반신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고 얼굴도 옆으로 살짝 돌아가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겼고 입은 맥없이 벌어졌다. - P194

미우라를 찔러 죽인 자는 어디로 나갔지? 어쩌면 아직 이 안에 숨어서 내 빈틈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급히 집 안을 뒤졌지만 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화장실, 옷장, 침대 밑, 어디에도없었다.
어제 노리즈키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중략)
이 방의 상황은 그야말로 노리즈키가 정의한 바로 그 밀실 상태가 아닌가. 현관문은 잠겼고 열쇠는 죽은 미우라에게 있다. - P195

나는 스프레이 세제를 욕실에 돌려놓았다. 그냥 내팽개치고가도 상관없지만, 무의미하게 수사에 혼란을 야기할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장갑을 끼고 와서 한 번도 벗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 P196

베란다에 로프나 사다리 같은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뒤질 시간은 없었다. 의지할 것은 내 몸뚱이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려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P197

아드레날린이 내 등을 쉼 없이 떠밀었다. 심호흡하고 다음 동작을 취했다. 한 번 성공하자 요령이 붙었다. 높이도 더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사야마 공원에서 겪은쓰라린 경험이 있다. 내려가는 도중에 1층 집에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 P198

베란다에서 내려오는 동안 아무도 도둑이라고 외치지 않은걸 보니 나를 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행운이 지속될지 알 수 없다. - P198

3

(전략)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가즈미가 내 양복이 젖은 걸 알아차렸다.
"여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미우라가 뭘 어쩐 거야?"
"미우라는 죽었어."
(중략)
"설마...... 당신이 죽인 거야?"
"아냐." - P199

"당신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가즈미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욕실에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겠지."
"누구 짓일까?"
"모르겠어. 하지만 유괴랑 관계있는 자인 건 틀림없어. 그럴거야." - P200

"큰일났어! 좀전까지 미우라와 내가 커피숍에 있었잖아. 가게직원이 날 기억하면 어떡하지? 아니, 틀림없이 기억할 거야. 그 사실이 경찰에 알려지면 내가 죽였다고 믿을지도 몰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즈미의 말이 맞다. 내 문제에만 신 - P200

 "경찰은 날 금방 찾아낼 거야. 여보, 어떡하지? 나 사실 미우라의 집 근처까지 갔었단 말이야.‘
"뭐라고?"
"약속을 어겨서 미안해. 걱정돼서 그랬어. 하지만 건물 앞만 서성였지 아무 짓도 안 했어. 결국 약속 장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알리바이도 없어." - P201

가즈미는 내게서 몸을 떼고 양손을 입 앞에 모으고 대시보드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아. 경찰이 아무리 물어도 난 아무 대답 안 할 거야.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안심해."
"아니야."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면 안 돼. 내 결백은 내가 직접 증명하고 싶어. 솔직히 말하면 이 일에 당신까지 끌어들인 게 잘못이었어. 반성하고 있어." - P202

"그뿐만이 아냐." 틈을 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을 숨겨봐야 미우라를 죽인 범인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미우라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그 범인에게 용건이 있어."
"뭔데?" 가즈미가 물었다.
"유괴에는 공범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어." 갑작스레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미우라를 죽인 건 그 공범일지도 몰라." - P203

둘만 있게 되자 극단적으로 말이 줄어들었다. 마음은 통했지만, 위안의 말을 나눈다고 전망이 밝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운전에 집중했다. 도로가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슬슬 퇴근길 정체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경시청으로 가서 수사 1과 구노 경부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 P206

4

경찰의 반응이 생각보다 빠르다. 구노가 나카노 서에 있다는건 미우라의 죽음과 유괴 살인과의 관련성을 급히 재조사하고있다는 방증이었다.
경찰에서 가즈미에게 묻고 싶은 게 뭔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 P207

구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던 남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정수리 쪽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뚱뚱한 남자였다. 첫눈에도 형사로 보이는 그는 나카노서 히라타 경부라고 했다.
히라타의 안내로 수사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사면이 벽인 취조실은 아니었다. 장의자를 마주 놓은 자리에 네 사람이 앉았다. - P208

"오늘 오후 JR 히가시나카노 역 근처 커피숍 ‘쓰구미‘에서 피해자와 만나셨죠?"
가즈미는 순간 내 얼굴을 쳐다봤지만 주저 없이 수긍했다. 그러고는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상당히 빨리 알아내셨네요." - P209

"종업원이 우연찮게 두 분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진술에 따르면 피해자가 함께 온 여성에게 ‘처형‘이라고 여러 번 불렀다고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바로 스기나미 서로 연락해 가즈미 씨의 특징을 체크했습니다. 그 결과 ‘쓰구미‘에서 목격된 기모노 차림의 여성과 가즈미 씨의 외모가 유사하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본청에서 연락이 왔을 때 마침 구가야마의 댁으로 찾아뵐까하던 참이었습니다." - P209

"별실이라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노가 곧바로 되물었다.
"왜 격리하는 겁니까?"
"격리? 천만에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분 말씀을 따로따로 들으면 두 분을 붙들고 있는 시간도 반으로 줄어드니까요."
궤변이다. 하지만 이러는 것이 경찰의 상투적인 수법일 것이다. 괜히 반발하면 오히려 안 좋은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 P210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구노가 말했다. "사모님은 담화실로 모셨습니다. 취조실처럼 막혀 있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담화실이 어떤 공간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하고 철제의자에 앉았다. - P211

"진술서를 작성해야 하니까 아까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해주시죠." 히라타가 말했다.
구노에게 한 말을 처음부터 되풀이했다. 히라타는 중간 중간이야기를 자르면서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다. "욕실에 있었던스프레이 세제 이름이 뭐죠?" 같은 너무나 하잘것없는 질문들뿐이었다. - P212

 "이번에는 사소한 부분도 생략하지 말고요."
사소한 부분을 생략한 기억은 없었지만 일일이 불평을 늘어놔봐야 쓸데없을 것 같았다. 요컨대 여기는 경찰서 취조실이고 상대는 경찰이었다. 거스르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 P213

"부인의 진술과 야마쿠라 씨의 진술을 대조해야 하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시간을 벌려는 구실이라 생각했다. 그런 수고를 들일 거면 처음부터 두 사람의 진술을 함께 받았으면 됐을 텐데. 내 말을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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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패러독스 이야기

보통 우리말로 ‘역설‘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그냥 패러독스라는 용어를 쓰겠다. 왜냐하면 역설이라는 말은 원래 명사보다는 ‘역적‘ 또는 ‘역설적으로‘라는 관형사 또는 부사어로 주로 쓰던 말이기도 하고, 국립국어원의 해석에 따르면 ‘역설적‘은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이 있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이라는 의미로 패러독스보다 조금 좁은 뜻이기 때문이다. - P137

패러독스에는 대체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거짓말 같은데 정말인 경우, 둘째, 정말인 것 같은데 거짓말인 경우, 셋째, 정말이라고도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경우다.  - P138

러셀의 패러독스

두 번째로 소개할 것은 20세기 초에 현대논리학의 형성 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논리학과 집합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패러독스이다. - P142

1902년에 러셀이 프레게에게 이 패러독스를적은 편지를 보내자 프레게는 큰 충격을 받는다. (중략). 논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패러독스지만 그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러셀의 패러독스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 P142

우선 "어떤 집합이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라는 이상한 성질에대해 생각해보자. 이 성질을 기호로는 집합 A에 대하여 AEA로나타낼 수 있다. 물론 대부분 집합은 이런 이상한 성질은 갖지 않는다.  - P142

이 문제에 대해 러셀은 프레게에게 편지에서 "자기 자신은 술어로 옳을 수 없는 술어를 정의할 때 모순이 발생한다고 서술했다. - P144

 러셀의 패러독스를 설명하고자 드는 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예는 다음의 ‘이발사의 패러독스‘이다.

어느 마을에 이발사가 있다. 그 이발사가 "나는 스스로 수염을깎지 않는 모든 마을 사람의 수염을 깎는다"라고 말했다. 그럼그 이발사 자신의 수염은 누가 깎을까?

(1) 스스로 깎는다면,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만을 깎는다는사실에 모순이 되고,
(2) 스스로 깍지 않는다면, 스스로 깎지 않는 모든 사람을깎아준다는 말에 모순이 된다. - P144

내가 고등학생 때 『성문종합영어』라는 영어 참고서에 ‘but‘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뜻의) 관계대명사로 쓰이는 예로 "There isno rule but has exceptions"라는 문장이 있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이 말은 맞는 말일 수가 없다.  - P145

베리의 패러독스

세 번째로 소개할 패러독스는 러셀이 자기 논문에서 소개한 것으로, 그가 언젠가 옥스퍼드대학교의 사서인 베리G.G. Berry, 1867-1928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이 패러독스의 서술 형태는 다양하지만 우리말 버전으로 만들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30개 이하의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자연수 중 가장 큰수보다 더 큰 수‘
이 수가 존재한다면 모순이다. 왜냐하면 이 수도 30개 이하의 글자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 P146

이 패러독스에 대해 설명해보자면 우선 우리말의 ‘글자‘ 수는 유한하다는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참고로 완성형 한글의 글자 수는2350개다. 하여간 글자 수가 1만 개는 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무리는 없다. - P117

(전략). 물론 그래서 이것을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의의 모호함‘ 때문에 발생한다. 이 패러독스에 등장하는 수에 관한 서술인
‘표현할 수 있는‘이라는 말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 P148

이 패러독스는 현대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예로 다룬다. 어떤 표현이나 기호로 나타낸 수 가운데 최소와 최대를 결정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또한 정의할 수 없음과 있음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 P148

이 패러독스는 형식적 수학 언어로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형태로 서술할 수도 있다(그레고리 찰틴Cergey Chatin 등 다수가 해냈다). 또한 조지 불로스George Boolos는1989년에 이 패러독스의 정형화한 형태를 이용하여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를 좀 더 쉽게 증명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 P148

상트페테르부르크 패러독스

네 번째로 소개할 패러독스는 보통의 경우처럼 논리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산술적인 계산 결과로부터 발생하며 확률론, 경제학, 재무 이론 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 P149

 이 패러독스의 내용은 다음과같다.

어떤 사람이 동전을 계속 던지다가 앞면이 나오면 돈을받고 이 시행을 멈추는 게임을 한다. 동전을 첫 번째 던졌을때 앞면이 나오면 2달러를 받고, 두 번째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오면 4달러를 받고, 세 번째에 앞면이 나오면 8달러, 네번째에 나오면 16달러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던지는 횟수가 늘어나면 매번 받는 금액은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럼 이 사람이 받게 되는 금액의 기댓값은 얼마나 될까?

그 기댓값을 계산해보면 무한대이다(왜 그런지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은 얼마를 내고 참가하 - P149

기댓값이 더해지며 계속 커지게 되는 이유를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이 좋게도 처음에는 계속 뒷면만 나오다가 서른 번째에서야 앞면이 처음 나온다면 그때 받는 상금이 2³⁰=1073741824달러, 즉 10억 달러가 넘는 엄청난 금액이 되기 때문이다. 앞면이 쉰 번째쯤에 나온다면 지구상 모든 사람이가진 돈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 P150

이 패러독스의 합리적 해법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가 제시되었는데, 다니엘 베르누이는 로그함수를 이용한 ‘효용 utility 함수‘로 설명한다. - P151

 다니엘 베르누이의 해법 이전에 이미 제네바의 가브리엘 크라머 Gabriel Cramer, 1704~1752도 해법을 제시했는데, 크라머는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의 부에 따른 효용을 계산한 다니엘과는 달리 상금의 액수만을 고려했다. - P151

하지만 이 패러독스는 20세기에 여러 경제학자와 수학자의 관심을 끌며 효용이론, 확률론, 결정이론, 에르고딕성ergodicity 경제학, 게임이론 등 다양한 분야의 형성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 P152

바나흐-타르스키 패러독스

마지막으로 소개할 패러독스는 폴란드의 두 위대한 수학자 바나흐sician Banach, 1892~1945와 타르스키 1901~1983가 1924년에 발표한것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의 공을 몇 개 (실제로는 5개가 가능하다)의 조각으로 자른 후, 그 조각들을 평향이동과 회전만으로 이동하기 한 다음 다시 붙이면 원래의 공과 같은 부피와 모양의 공 2개를 만들 수 있다. - P157

물론 현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수학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이 정리는 상식과 배치되므로 패러독스라고 불린다. - P157

. 하지만 그들의 증명을 살펴보니공을 자를 때 그냥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게 ‘칼로 사과를 자르듯이‘ 자르는 것이 아니라 공을 다소 복잡하게 정의된 무한히 많은점의 집합 몇 개로 쪼개는 것이었다. 이 집합들은 어떤 ‘기하도형‘을 이루지는 않고, 그것을 이루는 점들은 흩어져 있어서 부피*를 정의할 수 없다.  - P158

바나흐타르스키 패러독스는 ‘무한대 더하기 무한대는 무한대(00+00=00)‘가 되는 성질과 유사하다. 무한의 세계에서는 유한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그래서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현대논리학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무한의 개념과 성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 P158

이 놀라운 정리를 발견한 바나흐와 타르스키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이다. 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해석학 과목을 들을 때 누구나 ‘바나흐공간Banach space‘이라는 개념을 배운다. 이 공간은 해석학에서 매우 중요하고 기본적인 개념이다. - P159

타르스키는 괴델에 비해 대중에게는 덜 알려진 수학자다. 바나흐타르스키 패러독스 정도로만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져있지만, 실은 그는 20세기의 현대논리학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꼽힌다. - P161

08. 여섯 가지 유형의 오류

1.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2. 이분법적 논리(흑백논리)의 오류
3. 필요조건, 충분조건의 혼동에 의한 오류
4. 잘못된 가정(정보)에 의한 오류
5. 확증편향(믿고 싶은 것만 믿기)의 오류
6. 과학적 소양(지식) 부족에 의한 오류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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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kop‘s chosen area of study involves a fair amount of physics: hisdaydreams have been filled with colliding gas molecules. While it maybe impossible to predict how single molecules will collide, it is possible topredict how great masses of colliding molecules will behave and hence thebehaviour of the gas as a whole. He has learned how the same mathematicaltechniques used in gas mechanics are also used in a multitude of explana-tions ranging from the stability of the orbits of planets to the spread of diseaseand the speed of losses at roulette tables. - P2

1.2 Von Mises‘s Relative FrequencyInterpretation

(중략) This is unfortunate, given howphilosophically loaded these terms are, and it would be best to avoid them.
That, however, is simply not possible, and so we must labour under them.
The standard theory of objective probability, as in the theory most likelyto be vaguely invoked in introductory texts to probability or statistics, isthe relative frequency interpretation. - P2

1.2.1 Probability and mass phenomena

Relative frequency theories are designed to deal with what von Mises calledmass phenomena. These are phenomena (or, better, types of outcomes ofobservations) that occur in very great quantities. This may be either becausewe can produce as many as we want by, for example, undertaking an experiment, or because there are a great many instances of them to be found. - P2

One of von Mises‘s examples was the probability of the declaration of war between Germany and Liberia. Liberia has declaredwar on Germany in both World Wars (reported in the New York Times on8 August 1917 and 28 January 1944. I don‘t know if Germany reciprocated). - P3

There is, however, no sharp boundary between mass and non-massphenomena. A borderline case, according to von Mises, is the question of the reliability of witnesses, presumably in jury trials: ‘We classified there liability and trust worthiness of witnesses and judges as a borderline case since we may feel reasonable doubt whether similar situations occur sufficiently frequently and uniformly for them to be considered as repetitivephenomena‘ (von Mises 1957: 10).  - P3

Von Mises‘s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 is meant to ground a scientifictheory of certain types of phenomena, namely, mass phenomena, and isto stand or fall with the confirmation of its applicability in practice.  - P3

1.2.2 Convergence of relative frequency

Consider the humble coin toss. For any given number of flips of the coin,
a certain percentage will be heads. We can use the percentage of the occur-rence of heads in the total number of tosses as a measure of likeliness.
If heads are very likely, then the percentage of heads will be near 100 percent (nearly 100 out of 100, i.e. 1), that is, heads will turn up at nearly everytoss; if they are very unlikely, then the percentage will be nearer 0 (nearer 0 out of 100, i.e. none). If it is just as likely that the coin lands heads as tails(i.e. the coin is fair), then the ratio should be one-half. The name for theratio of heads to total tosses is the relative frequency of heads. - P4

 Results of an experiment that we are looking for are called successes, otherwise failures. So, if we are flipping a coin and are looking forheads, we call the occurrence of a head a success. We could, of course, taketails to be success: nothing hinges on the name. These elementary events canbe combined into compound events, such as two tails occurring in a row, orthe tossing of two coins together, or the roll of a die and the toss of a coin. - P5

For coin tosses, the infinite series might look like HTHHTTH...
The sample space is then the set of all these infinite sequences. A collective(in German Kollektiv) is a member of the sample space (that is, an infinitesequence of outcomes) that obeys certain restrictions to be introduced shortly. - P6

The first axiom of von Mises‘s theory is the axiom of convergence: for a givencollective, the limiting relative frequency actually exists. This means thatthe value of the relative frequency does not oscillate, but settles down to some value.  - P6

1.2.3 Randomness-the impossibility of a gambling system

The notion of limiting relative frequency was not original to von Mises.
What was original to his treatment was his notion of randomness. As noted earlier, another key feature of mass phenomena is that it is not possibleto predict individual outcomes-true mass phenomena are unpredictable.
The clearest examples can be found in the gambling hells. A quick searchwill reveal that there are many betting systems for various casino games andfor roulette in particular. A simple example of such a system is: bet on blackafter the ball has landed on red three times in a row. Following a systemlike this is a sure road to ruin, or at least to losing at the roulette table, as youcan confirm at your local casino.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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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kop then goes to buy his health insurance, this also being of vitalimportance in America. He has been known to indulge in various tobaccoproducts, and tells the agent so. Once again, he discovers that he has to paymore for his health insurance: a quick trip around various agents (you cantry this online) makes it clear that he will have to pay around 300 per centmore than a non-smoker.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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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카시를 친자식처럼 길렀다. 가즈미에게 육아는 절대적이었다. 정신의 불균형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우리는 옷음을 되찾았다. 모두 다카시 덕분이었다.
물론 미우라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돌연한죽음에 충격을 받아 인간 자체가 바뀌고 말았다. - P130

미우라의 인격은 그 무렵 완전히 파탄이 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쓰구미의 죽음은 그의 성격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을 일격에 분쇄하고 말았다. 그 결과 한 인격의 완전한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 P130

"아이 입양에 동의한 건 절대 내 진심이 아니었어. 당신들이내 약점을 들먹이며 강제로 다카시를 뺏은 거야. 이제 나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 내 아이니까 내 손으로 키우겠어."
우리 앞에서 미우라는 그렇게 선언했다. - P131

미우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당신들이 다카시를 세뇌한 거야. 진짜 아버지는 나야. 부자가 함께 지내면 금세 익숙해질 거야."
"불가능해 지금의 자넨 다카시를 키울 수 없어. 아버지 자격이 없어!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
그날은 돌아갔지만 그렇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 P131

나는 미우라가 위험한 수단을 동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다카시의 신변이 걱정돼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다카시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가즈미에게 다시 불안증이 도질것 같았다. - P131

우리는 미우라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미우라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이름에 무거운 추를 달았다. 그와 관련된 기억은 망각의 바다 밑으로 깊이 가라앉았고, 일상의 수면으로 다시 떠오르지않았다. - P132

이야기를 마치자 구노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미우라가 일했던 프로덕션, 쓰구미가 세상을 떠난 병원, 입양취소와 관련한 법적 진행을 맡았던 변호사의 이름 등을 말하자 구노는 꼼꼼히수첩에 받아 적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주시죠." 구노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P132

나도 모르게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미우라를 쉬지 않고 가격한 오른손이다.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이 들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폭력 그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다. 오히려 폭발의 방아쇠가 된, 내면에 존재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화감이었다. - P133

어쩌면 나는 스스로를 질책한 게 아닐까? 내 안에 존재하는아버지로서의 내가 저지른 죄를 미우라라는 속죄양에게 뒤집어씌운 데 불과하지 않을까? - P134

 "미우라는 자백했습니까?"
구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완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금요일에는 하루종일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는군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다행히 목소리가 갈라지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날조한 거짓말입니다." - P134

4장 증인

회사에 돌아왔을 때는 다섯시를 지나고 있었다.
"국장님." 부하직원이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전무님 호출입니다. 돌아오면 바로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알았어."ㅂ
- P139

 장인은 코를 집었다가 그 손가락들을 비벼댔다. "그래. 자네가 받은 인상은 어땠나. 미우라 짓인 것 같던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장인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 P140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구노 경부가 사실관계를 확인한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이란 사실이 금세 밝혀질 겁니다. 그런 뒤에 본격적으로 추궁하겠죠.. - P141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섰다.
"잊으셨습니까? 도미사와 미치코 씨는 가즈미가 임신했을 때 신세졌던 간호사입니다."
"아아, 그래서 낯이 익었나보군. 그랬군. 그 병원에서......
칠년 전의 쓰라린 기억이 장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제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 P141

집에 들어가자 가즈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일찍 돌아왔네. 무슨 일 있어, 여보?"
"아니, 오늘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나중에 천천히 말할게."양복을 벗고 거실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댔다. 다카시가 다가와 응석을 부렸다.
"아빠 왔어?"
"응, 아빠 왔다." - P142

"당신이 일부러 돌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돈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고 하더라니까."
"내가 일부러?"
"응. 너무 심한 말 아냐? 당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겠어? 만약 돈을 주기 싫었다면 처음부터 범인 지시를 따르지 않았을 텐데. 안 그래?" - P143

미우라라는 이름은 가즈미의 주의를 강하게 끌었지만 사건과의 관련성까지는 미처 떠오르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다카시를 2층 아이 방으로 보내는 분별력은 있었다. 그러고는 내게 물었다.
"그 사람을? 아니 왜?"
"낮에 회사로 형사가 왔었어. 금요일 밤 사야마 공원 근처에서 수상한 차량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다고 그 차가 파란색 골프라는데, 미우라의 차가 골프야." - P144

"그런 이야기도 경찰에게 했어?"
"물론이지. 미우라와 함께 경시청으로 가서 따로따로 사정취를 받았어. 나는 금방 돌아왔지만 미우라는 아마 오늘밤 유치장 신세를 지겠지. 범행을 자백하는 건 시간문제야." - P145

시게루에게는 아무 죄도 책임도 없다. 시게루는 자신이 바라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와 미치코의 도리에 어긋난 관계가 시게루라는 존재를 탄생시켰을 뿐이다. - P146

가즈미는 다카시를 보면서 나와 닮은 특징을 찾아내려고 안달한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걸 바라는 것이 양부모의 마음이다. 어떤 의미에서 가즈미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입양을 찬성했다. 핏줄 같은 건 아무 의미 없다. 그건 나 이상으로 아내가 붙잡고 매달리는 끈이었다. - P147

다카시는 출발선에서부터 시게루에게 밀리는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전자라고 하는 인간 존재의 기반 단계에서부터 유전적인 면에서 다카시는 절대 시게루를 이길 수 없다. 다카시에게서 아빠와 닮은 점을 찾아내려고 안달하는 가즈미가 어느날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 P147

그런 생각을 하면 시게루의 죽음으로 유일하게 득을 본 자는 바로 나. 야마쿠라 시로밖에 없다. 이 시점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에 나는 죄의식으로 물든 전율을 느꼈다.
금요일 밤 사야마 공원 돌계단에서 발을 헛디뎠을 때, 이런 무의식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했던 건 아닐까. - P148

2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했지만 책상 앞에 앉아도 일이 손에잡히지 않았다. 어젯밤의 번민이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악몽이라면 눈을 뜨자마자 사라지며 평화로운 일상이 되돌아오리라. 하지만 내 비열한 행위를 잊으려면 경우에 따라서는다른 인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 P149

"미우라의 알리바이는 깨졌습니까?"
"그 일 때문입니다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겠군요. 어제야 마쿠라 씨가 돌아간 뒤에 미우라 야스시가 진술한 알리바이의 사실관계를 확인했습니다. 결론은 무혐의입니다. 범행 당일 오전 여덟시부터 오후 아홉시까지 세타가야의 지인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 P150

"그렇다면 미우라는 체포되지 않는 건가요?"
"당연하죠. 구류할 이유가 없어서 어젯밤 늦게 돌려보냈습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짜증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세타가야의 지인? 혹시 미우라의 집에 있었던 그 이상한 여자 말인가요?" - P150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증인은 신뢰할 만한 인물입니다." 매몰찬 어조였다.
"대체 어디 사는 누굽니까?"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만 특별히 말씀드리죠.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작가입니다." - P151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알리바이가 분명한 인물을 용의자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 건은 불행히도 우연의 일치겠죠. 수사본부에서도 무혐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실망한 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 P151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구노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영 석연치 않았다.
나름대로 성실하고 유능한 경찰일지 모르지만 구노도 눈앞에 드러난 사실에 시야가 흐려진 것 같다. 결국 그게 경찰의 한계인 것이다. - P152

오분 더 걸려서 전화를 건지 이십 분 만에 마케팅과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구로다라는 조사부원이었다. 마케팅과의 인간들은 기질적으로 보아 학자형과 속물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로디는 명백히 후자였다.
"알아냈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 이름이 특이하지만 본명입니다. 직업은 추리작가. - P153

"대단한 작가는 아닌 모양이군. 아직 젊은가?"
"예, 서른이 안 됐습니다. 아직 미혼이고, 홀아비인 아버지와함께 사는 이른바 부자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다름 아닌 경시청 수사 1과 경시네요."
"그렇군." 구노가 언뜻 비친 말의 의미를 그제야 알았다. 직속상사거나 윗선의 자식인 것이다. - P154

구로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명탐정이라니 아무래도 정상적인 인간은 아닌 듯하다. 소설 속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에서까지 명탐정이라 자칭한다니 과대망상증 환자거나 성격파탄자일지도 모른다. 지금 같은 시대에 그런 인종이 서식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 - P155

"여보세요, 노리즈키입니다." 잠에서 막 깼는지 갈라진 목소리였다. 미우라와 똑같이 야행성 인간인 것이다.
"야마쿠라 시로라고 합니다. 갑작스레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추리작가 노리즈키 린타로 씨인가요?" - P156

"사모님입니다."
"그래? 내 자리로 돌려줘."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내 자리로 돌아가서 별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귓가에 미치코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할 얘기가있어. 지금 만날 수 있어?" - P158

"확대 복사를 해놔서 그렇겠죠. 너무 진하게 복사돼서 그림자진 곳이 까맣게 뭉쳤어요. 말은 복사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군요."
노리즈키가 내게 사진을 돌려줬다. - P160

"하쿠쓰를 말합니다. 쓰키지에 본사가 있는데 정부와 관청에 깊은 유착을 맺고 있어서 부러워서 그렇게들 부르죠. 혹시 노리즈키 씨에 대해 조사한 게 언짢았다면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자기소개 하는 수고를 생략할 수 있어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마추어 범죄연구자라고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거든요.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도 야마쿠라씨와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 P160

아니 잠깐. 나는 스스로를 제지했다. 속단은 금물이다. 이 만남의 목적은 미우라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솔직한 척하는 말투에 혹하지 마라. 상대의 페이스에 휩쓸리지 않도록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한다. - P161

"그 일이 끝난 뒤에도 미우라와 자주 만났나요?"
"아뇨. 미우라 씨는 오사카에 살고 저는 도쿄에 사니 전화나편지를 주고받는 정도였지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죠. 그런데 올6월에 이 프로그램이 폐지돼버렸습니다. 오 년 동안 한 프로그램이고 시청률도 나쁘지 않았는데 더 나올 게 없다고 판단한 거겠죠. 미우라 씨는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해서 애착이 컸던 모양입니다. (중략)" - P162

 노리즈키가 확인하듯 말했다. "미우라 씨는 S지 신인상을 받은 사람이니까요. 실은 전 그 사실을 미우라 씨가 도쿄에 돌아와서 두번째 만났을 때 본인에게 듣고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술자리에서 하소연하더군요. 텔레비전일을 하도 오래 해서 소설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어떡하면 되느나. 가르쳐달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미우라 씨가 저보다 선배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미우라 씨의 예전 작품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 같은 건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재능이 끓어넘치는 소설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미우라 씨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죠." - P163

"지난 화요일에 미우라 씨가 연락해왔습니다. 금요일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아침부터 방문해도 되느냐고 묻더군요. 상관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제게 하루종일 밀실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밀실 강의? 그게 뭐죠?"
"야마쿠라 씨는 추리소설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
시인했다. 노리즈키는 정색한 말투로 말했다. - P164

"실과 바늘을 이용해서 문밖에서 자물쇠를 거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건가요?"
"뭐, 그런 셈이죠."
"그런 일을 하느라 열두 시간 이상 걸렸단 말인가요?" 나는 조금 기가 막혔다.
"구노 형사 말로는 아침 여덟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계속 그 집에 머물렀다고 하던데요." - P165

"집 근처입니다. 한시쯤 소바를 먹으러 나갔어요. 그 뒤에 가까운 커피숍에서 세시경까지 커피를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소바한‘과 ‘패커드 구스‘, 둘 다 메구로 길에 있는 가게입니다." 같은 질문을 전에도 받았기 때문에 곧바로 가게 이름을 댈 수 있을것이다. - P166

"볼일이 뭔지 물어보셨나요?"
"아뇨."
"미우라는 어떻게 돌아갔죠? 아침에는 차로 왔나요?" - P166

"그런데 미우라는 왜 밀실 같은 걸 궁금해했을까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예전 같은 소설은 더이상 쓸 수 없게됐다고 느끼고 새로이 추리소설에 도전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아요. 새로운 밀실 트럭이 떠올랐다며 그걸 써서 추리소설 신인상에 투고하겠다고 했습니다." - P167

"저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추리소설은 형식적인 장르라 소설 쓰는 법을 잊은 작가의 재활치료로는 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기왕 엔터테인먼트로 나서기로 작정했다면 프로그램 제작 경험도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 테고요.
요새 같은 세상에 새로운 밀실 트릭 하나 생각났다고 그것만으로 좋은 작품이 될 리 없습니다만, 미우라 씨처럼 잠재력을 지닌사람이 작심하고 작품에 매달리면 전문 추리작가가 쓸 수 없는걸작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P168

"노리즈키 씨, 전 당신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미우라와 입을 맞추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전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 P169

"야마쿠라 씨의 생각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금요일 미우라 씨의 알리바이를 완전히 뒤집기는 힘들어요. 그건 분명하지만, 저도 걸리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점을 확인할 때까지 이건에 관한 제 입장은 보류로 해둘 수 없을까요." - P170

4

예전에는, 그렇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과거의 잔영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나에 대한 증오로 응어리진 귀신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라고 말문을 열었다가 퇴근 직전에 받은전화가 생각났다. 회사 근처에서 전화를 걸었다가 나를 보고 여기까지 따라왔을 것이다. 미행을 눈치채지 못한 내가 어리석다. - P171

그런 생각이 들자 미치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피한다고 해도 미치코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파멸의 냄새는 내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야마쿠라 씨." 귓가에 미치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 말이있다고 했잖아."
내 반응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 P172

그 뒤의 일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곧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은 건 확실하다. 내 죄가 파헤쳐진 직후에 가즈미의 얼굴을 보는 일을 양심상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갈 집마저 잃고 어디에도 안식할 곳이 없는 고독한 남자가 바로 나였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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