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너는 게르마니아 방의 희곡 동아리에 가입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분풀이로 성경 읽기모임에 지원했지만 거기서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일너는 막무가내로 그 모임에 들어가서는 점잖은 작은 형제회의 경건한 대화에 특유의 주제 넘는 독설과 신성모독적인 풍자로 불화와 시비를 일으켰다. - P130

 하일너는 그런 장난에 곧 흥미를 잃었지만 비꼬며 성경적으로 말하는 방식은 꽤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P130

어느 날 아침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나오면서 세면장 문에붙어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스파르타에서 보낸 여섯 편의 에피그램(기지와 풍자가 넘치는 짧은 시, 경구-옮긴이)‘
이라는 제목 아래 몇몇 유별난 동급생들의 어리석은 행동이며우정에 관한 내용이 풍자적인 이행시로 적혀 있었다. 물론 기벤라트와 하일너 커플도 공격을 받았다.  - P130

다음 날 아침에는 학생들의 방문마다 반박하거나 동의를 나타내거나 새롭게 공격하는 풍자시와 경구가 잔뜩 붙었다. 정작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은 영리하게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헛간에 불씨를 던지겠다는 그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었다. - P131

신문제목은 <산미치광이 (꼬리 쪽 몸이 가시털로 뒤덮인 쥐처럼 생긴 야행성 동물-옮긴이)>로 주로 익살맞은 기사가 실렸다. 창간호 기사 중 역작은 여호수아서(구약성경 중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책 - 옮긴이)의 저자가 마울브론의 신학생과 나눈 재미있는 대담이었다.
신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둔스탄은 매우 바쁜 편집자이자 발행인으로 명성을 누렸다. - P131

헤르만 하일너도 열정적으로 신문 편집에 참여했다. 뛰어난 재치와 능력을 발휘해 둔스탄과 함께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하자 학교 전체가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 작은 신문은 거의 4주간이나 수도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 P132

교수가 한스를 지목하며 번역을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한스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왜 일어서지 않습니까?" 교수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한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똑바로 앉은 채 고개를약간 숙이고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꿈에서 약간 깨어나긴 했지만 교수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아득했다. - P132

"기벤라트 군!"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지금 자고 있었던 겁니까?"
한스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놀란 얼굴로 교수를 바라보고는머리를 저었다.
"자고 있었군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어느 부분을 공부하고 있는지 말할수 있겠지요? 자, 어느 부분입니까?"
한스는 손가락으로 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는 어디를배우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교수가 비꼬듯이 말했다. - P133

"그만 자리에 앉으세요. 수업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도록 하세요." - P133

한스는 또 동시에 교사의 목소리와 학생들이 번역하는 소리,
그리고 강의실의 모든 사소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느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소리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실제적인 소리로 들리는 것이었다. - P134

"어디 말해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정말자고있던 게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기벤라트 군을 불렀을 때 일어나지 않았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P133

식사하기 전에 한스는 다시 호명되어 기숙사로 불려갔다. 그곳에는 교장이 마을 의사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그냥 지나가는 신경쇠약이에요. 일종의 가벼운 멀미지요. 이 젊은이는 매일 바깥바람을 쐬어야 합니다.
두통에는 제가 몇 가지 물약을 처방해줄 수 있습니다." - P135

다만 곤란했던 건 산책을 나갈 때 하일너가 동행하는 것을 교장이 분명하게 금지한것이었다. 하일너는 분개하여 욕설을 내뱉었지만 어쩔 도리가없었다.  - P135

라틴어 학교 시절 한스는 지금과 달리 더 열정적이고 호기심 깃든 눈으로 세심하게 봄을 들여다보았다. 철새가 돌아오면새의 종류마다 눈여겨보았고, 어떤 꽃이 먼저 피어나는지도 관찰했다. 5월이 되면 드디어 낚시를 시작했다. 지금은 새 종류를 확인하거나 새싹을 보고 풀 이름 맞히기 따위는 하지 않는다. - P136

한스는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집중하려고 애써야 했다. 흥미가 떨어지는 내용은 그림자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히브리어 단어들은 수업 시간 30분 전부터 외우고 있어야만 수업시간에도 간신히 기억할 수 있었다. (중략). 한스는 자신의 기억력이 더 이상 아무것도 흡수하려 하지 않고 갈수록 더욱 희미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했다. 그러면 - P137

. 한스는 하일너와 함께 기숙사 건물 안을 어슬렁거리며 고향과 아버지와 낚시와 학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일너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
한스가 떠들거나 말거나 고개를 까딱이며 하루 종일 갖고 놀던작은 자를 허공에서 몇 번 심란하게 휘두르곤 했다. 한스도 점 - P137

"그냥 생각이 났는데,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야."
"대체 뭔데 그래?"
"있잖아, 한스 너 여자애를 쫓아다녀 본 적 있어?"
침묵이 흘렀다. 이런 이야기는 그들끼리 해본 적이 없었다.
한스는 주저했지만 이 수수께끼 같은 주제가 마치 동화처럼 그를 잡아당겼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고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느꼈다.
"딱 한 번." 한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P138

"그 후에는! 뭐, 아무 일도 없었지."
하일너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한스는 마치 금지된 정원에서 나온 영웅이라도 보는 듯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때 취침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등이 꺼지고 모두 조용해진 후에도 한스는 침대에서 오랫동안 깨어 있는 채로 하일너가 애인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 P139

교사들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교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꾸중을 했으며, 동급생들도 이미 한스가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일등이 되려는 노력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일너만이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 P139

한스는 날마다 하일너의 연애사 뒷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물어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학생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전처럼 미움을 받았다. 하일너가 <산미치광이>에 악의에 찬 농담을 써댄 바람에 아무도 두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 P140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진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주인공이자 장본인은 이번에도 수도원의 문제아 헤르만 하일너였다.
교장은 하일너가 자신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거의 매일 한스의 산책에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이번에 한스는 혼내지 않고 주범이자 자신의 오랜 적인 하일너만 집무실로 불렀다.  - P140

다음 날 한스는 공식적인 산책을 하기 위해 전처럼 혼자 나서야 했다. 2시에 산책에서 돌아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에 앉았다. 수업을 시작할 때쯤 하일너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힌딩거가 사라졌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그가 수업에 늦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141

 밤이 깊도록 모든 침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하일너가 물에 뛰어들었을 거라는 가정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실종된 하일너는 수중에돈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 P141

그 시간, 하일너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수풀 속에 누워 있었다. 그는 추위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며 좁아터진 새장을 빠져나온 것처럼 팔다리를 활짝 뻗었다. 점심때부터 뛰쳐나온 그는 지금은 크니틀링엔 마을에서 산빵을 뜯어 먹으며 아직 봄기운이 남아 있는 연한 나뭇가지 사이로 밤의 어둠과 별,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 P142

 하일너는 온갖 농담을동원한 아부로 시장의 환심을 얻더니 급기야 시장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시장의 집에서 햄과 달걀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하룻밤 잠자리도 제공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하일너는 밤새 그리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넘겨졌다. 마침내 도망자가 붙잡혀오자 수도원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 P142

교장은 이 심각하고 반항적인 비행 사건에 대해 화려하고 열정적이며 장황한 연설을 했다. 슈투트가르트의 상부 관청에 보내는 교장의 편지는 그보다는 더 온건하고 덜 감정적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썼다. 퇴학당한 괴물 같은 아이와의 편지 왕래는 금지되었는데, 한스는 이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몇 주 동안 학생들의 주요 화제는 하일너와 그의 도주였다. - P143

 최근에 비워진 자리의 주인공은 이전 주인공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교장만이 두 번째 사건 역시 조용히 처리되길 바라고 있었다. 하일너가 수도원의 평화를 깨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한스는기다리고 기다렸지만 하일너에게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 P143

한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한스가 여러 가지 질문에 전혀 답을못하자 이런 말까지 했다.
"어째서 기벤트 군은 그 잘난 친구 하일너와 함께 가버리지 않았지요?"
교장은 한스를 내버려 두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성경에서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 격인 바리새인들은 세금을 걷으며 횡령을일삼는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고, 부정이라도 탈까 봐 그들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옮긴이)를 쳐다보듯 경멸에 찬 동정심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P144

5장

한스는 결국 헛되이 괴로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모세5경과 호메로스, 크세노폰과 대수학을 차례로 던져버렸다. 교사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가가 ‘좋음‘에서 ‘괜찮음‘으로, ‘괜찮음‘에서
‘중간‘으로, 그러다 마침내 ‘나쁨‘으로 점점 떨어지는 것을 별생각 없이 지켜보았다. - P145

가끔은 잠들어 버린 그의 야망을 비꼬는 말로 자극하여 깨워보려고도 했다.
"우리 기벤라트 군께서 주무시는 게 아니라면 이 문장 좀 읽어주십사하고 감히 부탁드려도 될까요?"
교장은 아주 고상하게 불쾌감을 표현했다.  - P146

그런데 한스가 자신의 위엄과 권위적인 눈빛에 매번 힘없이 겸손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점점 불안을 느끼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그렇게 멍청하게 웃고나 있을 때입니까? 나 같으면 엉엉 울어댔을겁니다."
그 무엇보다 한스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그에게 제발 성실히지내달라고 간청하는 아버지의 편지였다. - P146

고집스럽고게으른 그 성향을 반드시 몰아내고 폭력을 써서라도 한스를 바르게 돌려놓아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한스를 가련히 여기는 지도교사 외에는 누구도 비쩍 마른 소년의 얼굴에 깃든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P146

게다가 아버지와 몇 명의 교사들, 그리고 학교의 잔인한 야망이 이 부서지기 쉬운 존재를이 지경이 되도록 끌고 왔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한스는 가장 예민하고 위태로운 소년기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 P147

여름이 시작될 무렵 마을 의사는 다시 한스의 증상이 성장기에 주로 나타나는 신경쇠약이라고 설명했다. 한스가 방학 동안간호를 잘 받으며 잘 먹고 숲에서 산책을 충분히 한다면 곧 나아질 거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방학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했다.  - P147

마을 의사는 자신의 환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매우 언짢아했다. 그는 환자에게 즉시 요양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며 정신과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권유했다.
"저 아이는 조만간 무도병 증세도 보일 겁니다."
의사가 교장의 귀에 대고 말했다. 교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P148

 얼마 전 하일너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교육청이 이번의 새로운 사고를 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교장은심지어 이 사고에 걸맞은 연설을 포기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한스가 떠나기 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친절을 보였다. 이 소년이 요양을 위해 휴학한 후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 P148

 하지만 교장은 한스를 격려하려고 "금방 다시 봅시다"라고 진심인 것처럼 인사했다. 이후 교장은 헬라스 방에 들어가 비어 있는 세 개의 책상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재능 있는 두 학생의 퇴학에 자신도 얼마간 기여한 바가 있다는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 P148

풍경이 계속해서 변하면서 고향의 모습과 점점 더 닮아가자 소년은 설렘을 느꼈다. 하지만 고향마을이 가까워지자 마침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마중 나올 아버지를 생각하니 민망하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자그마한 여행의 홍이 전부 깨져버렸다. - P149

마침내 한스는 우산과 여행 가방을 들고 서서,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마주했다. 잘못된 길로 빠진 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교장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당혹감과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사실 한스가 몹시 아프고 쇠약한 모습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약간 야위고 쇠약해 보이긴 했지만 아직 건강하고 제 발로 걷는 것을 보니 얼마간 안심이 되었다. - P150

첫날, 소년은 마중 나온 아버지가 혼을 내지 않아 기뻤다. 하지만 곧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조심스럽고 근심스럽게 대하는지, 또 그러기 위해 얼마나 눈에 띄게 애쓰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가끔 한스를 묘하게 관찰하는 눈빛으로, 때로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 P150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 죽어서 들것에 실려 있는 헤르만 하일너를 보고는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데 교장과 교사들이 그를 밀쳐내고 다시 다가가려 할 때마다 아프게 때리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신학교의 교수들과 지도교사들 외에도 라틴어 학교 교장과 슈투트가르트의 시험관들도 있었는데 모두 화난 표정이었다. - P151

 그러다 드디어 하일너가 발을 멈추었는데 가까이 다가온 한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야, 난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그러고는 대단히 큰 소리로 웃으며 덤불 속으로 사라져갔다.
한스는 마른 체구의 잘생긴 남자가 배에서 내려오는 모습을보았다. 그의 눈은 고요하고 거룩해 보였고 손은 아름답고 평화가 가득했다. - P151

 "egisVOTES AUTO TEQLEDQalov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아보고 그리로 달려오니)." 한스는 neQuégalov(달려오니)가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 동사인지, 현재형, 명령형, 완료형, 미래형은 어떻게 쓰이는지, 주어가 하나 혹은 둘 이상일 때 어떻게 변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기억나지 않아 두려움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 P152

몇 주가 지나자 한스는 라틴어 학교 시절의 마지막 이 년간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의 동창들 중일부는 멀리 떠났고, 일부는 수습공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는데 한스는 이들 중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 P152

마을목사가 한스에게 조금 신경 써주었다면 좋았을 테지만그가 무얼 해줄 수 있었겠는가? 목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지식, 적어도 지식을 향한 열정을 전해주는 것 정도였을것이다. - P153

 한스는 외롭고 버림받은 기분으로 작은 정원에 앉아 볕을 쬐거나 숲에 누워 몽상에 빠지거나 괴로운 생각에 잠겼다. 책을 읽는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금방 머리와 눈이 아팠고, 어느 책이든 펼치기만 하면 수도원 시절의 유령과 그곳의 두려움이 되살아나 그를 끔찍하고 숨 막히는 꿈속으로 끌고 들어가 꼼짝 못 할 만큼 무섭게 노려보는것이었다. - P183

그리고 마침내 아름답게 죽을 수 있을 만한 데를 발견해 죽음의 장소로 결정했다. 한스는 그 장소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자리에 앉아 며칠 뒤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상상을 하며 묘한 기쁨을 맛보았다. - P154

왜 진작 나무에 목매달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한스는 의아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끝냈고 그의 죽음은 결정된 일이었다. 그 사실은 한동안 한스를 편안하게 했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는 마지막 날들 동안 아름다운 햇살과 고독한 몽상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 P154

헤어날 수 없게 한스를 짓누르던 상념들은 줄어들었다. 그대신 맥없이 체념하게 만드는 편안하고 게으른 감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한스는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 혹은 며칠을 그냥 흘려보내며 무심하게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 P155

 그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 노래를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아, 난 너무 피곤해.
아, 난 너무 지쳤어.
지갑에는 돈이 하나도 없고
주머니에도 아무것도 없네.

한스는 기억에 남아 있는 멜로디를 따라 스무 번쯤 노래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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