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누군가 誰か

전화가 끊긴 뒤에도 그는 일 분 가까이 수화기를 움켜쥐고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몇 장의 사진은 어느 틈엔가 발치에떨어졌다. 겨우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는 사진들을 주워 모았다.
어제 신인 디자이너 이나키 요헤이가 소개해준 열아홉 살모델의 사진이다. 소개라기보다 영업이었다. - P158

그렇다, 아마도 이나키가 지시했을 것이다.
"기타가와 준은 여자에 약해. 딱 한 번만 자면 돼. 그러면잡지든 텔레비전이든 광고든 줄줄이 일이 들어올 테니까."
여자애는 이케지마 리사와 미오리 레이코를 꿈꾸며 지시에 따른 것이다. 열아홉 살의 아직 단단한 젖무덤은 바람에 희롱이라도 당하듯이 잘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전하며 떨고 있었다. - P158

오 년 전에 그가 길거리에서 스카우트한 여자도 꿈의 의상을 입기 위해 자진해서 제물이 되었다. 그녀는 유명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거라고 말했다. 배우보다는 모델이 더 낫다, 모델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한다, 라는 그의 말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수께끼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으로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 P159

올 3월 초부터 그녀는 돌연 그에게 분노를 들이댔다.
"내 몸뚱이는 모조리 뜯어먹혔어요. 이제 뼈만 남아 쓰레기와 함께 버려지기를 기다리는 신세예요."
그건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그는 반발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스타 모델을 만들어줬을 뿐이야." - P159

분명 그는 한 번도 레이코를 범한 적은 없었다. 레이코의아름다움은 렌즈 너머에 있을 뿐, 적어도 그가 육체적 욕망을 느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직업적 소재로는 완벽했다. 카메라렌즈로 바라보면 미오리 레이코는 이미 여자도 인간도 아닌 하나의 아름다움이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엄청난 아름다움을초점에 사로잡았다는 감촉이 있었다. - P160

 올 3월, 레이코가 갑작스럽게 표현해서 그를 위협하기 시작한 뒤에도 그는 소재로서의 레이코를 사랑했다.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살갗이 한 겹 한 겹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어요.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태워버릴 차례예요 살갗만이 아니죠, 기타가와 준이라는 이름도 장래도 모두 불태워버릴 거예요."
3월의 어느 날 밤, 레이코는 그런 말과 함께 핸드백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이 작업실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사진에는 지중해 바다와 모터보트, 그리고 운전석 핸들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거센 바람 소리를 자장가처럼 듣고 있는 레이코의 옆얼굴, 그리고 또 하나, 보트 뱃머리 앞쪽 바다에서 고개를 쑥 내민 얼굴 하나가 찍혀 있었다. - P160

어느 인적 드문 해안가에서 바위에 묶여 있는 모터보트를발견했을 때, 차 따위는 버려두고 질주하는 보트 위에서 머리를 휘날리는 레이코의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보트 주인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 십 분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레이코를 보트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 P161

다. 순간, 바다에서 뭔가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렌즈 너머로 그렇게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가벼운 충격이 덮쳤다. 반사적으로 운전석의 레이코를 밀쳐내고 모터를 껐다. - P161

그날 밤 두 사람은 마르세유의 호텔에서 묵었다. 다음 날아침, 부족한 프랑스어 지식으로 호텔 신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한 귀퉁이에 주앙 레 팡에 별장을 가진 파리의 사업가 자크뒤랑이 바다에서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자세한 원인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 P162

일본에 돌아와 공항에서 헤어질 때, 레이코는 마치 재미난화제인 것처럼 말했다.
"그 순간에 사진이 찍혔을지도 모른다고 했죠? 만일 진짜로 찍혔으면 나한테도 보여줘요."
레이코는 원래부터 그런 잔혹한 면이 있었다.  - P162

(전략) 그녀가 어떤 성격이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끊임없이 나쁜 소문이 들려왔지만 제대로 귀담아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레이코는 기타가와 준이라는 이름의 이용가치를 잘 알고 있어서 그와의 작업을 펑크내거나 도를 넘어 함부로 말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지중해에서의 사고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래서그는 별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상한 사진에는 분명 그 순간이 찍혀 있었다.  - P163

"그런 사진은 얼른 태워버려. 필름은 이미 처분했어."
"왜요? 이 사진, 내가 최고로 아름답게 찍혔는데? 괜찮아요, 프랑스인의 얼굴 부분은 잘라서 없앨 거니까."
그리고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우린 공범이잖아요."
아니, 입은 미소를 띠었지만 눈 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번뜩임이 바늘처럼 그를 쿡 찔렀다. - P164

또 어느 날 밤에는 카메라를 들고 문제의 사진 속 프랑스인과 똑같은 얼굴을 하라고 요구했을 때도.
레이코가 하라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녀는 만족하지 않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런 표정이 아니잖아요. 죽음이 코앞에 닥쳤어요, 좀 더입을 길게 찢어야죠." - P165

"인간의 얼굴이나 몸은 망가지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레이코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때로는잔뜩 뒤틀린 얼굴 쪽이 실제 내 얼굴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면서도 그는 여전히 이건 레이코의 별쭝맞은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 P165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고 깨달은 것은 팔 개월째 시달리던지난달의 어느 날 밤, 그녀의 맨션에서 문제의 사진과 사진 속 프랑스인과 똑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의 사진을 한 장씩 봉투에 넣었을 때였다.
"이거 주간지 기자에게 보내려구요."
"너도 공범이잖아! 이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면 너도 똑같이 파멸하는 거라고!" - P166

이나키가 소개해준 여자애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는 이여자애와는 세 번을 자고 끝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미오리 레이코나 이케지마 리사가 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싹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사진을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나키에게서2백만 엔을 받았지만 백만 엔을 돌려주면 해결될 것이다. 하긴 계산속 빠삭한 그자가 그 정도로 포기할 리는 없다. - P167

했다. 레이코를 살해한 뒤로 그는 이유도 없이 암실에 틀어박히곤 했다. 마치 빨간 암색만이 자신의 범죄를 감춰준다는 듯이.
하지만 그가 잊고 싶은 것은 범죄가 아니라 두 개의 얼굴이었다. 지중해의 새파란 바다에서 쑥 튀어나왔던 프랑스 남자의얼굴, 그리고 지난 달의 어느 날 밤, 침대에 쓰러져 누워 있던 레이코의 얼굴이다. - P167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두 남녀에ㅜ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게 어쩐지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렌즈에서 눈을떼고 살인 현장을 나왔다. 그 맨션에 다녀간 흔적을 모조리 지워없애고 복도로 나와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남프랑스에서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목격자는 아무도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다. 조금 전 전화에서 남자 목소리는 그날 밤 그가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역시 남의 눈에는 다급하게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안색이 홱 변한 채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이라고 그자는 말했다. 그는 수화기에 대고대꾸했다. - P169

그날 밤에는 지난여름에 레이코에게 걷어차인 중년 의사가 먼저 그녀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그의 살의를슬쩍 빌려 단지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의 술잔을 바꿔치기한 것뿐이었다.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 싱거운 행위를 범죄라고,
살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69

그렇건만 엌재서 항상 이 암실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마지막 얼굴이 뇌리를 찌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처음 한동안은 단지 그 프랑스인과 레이코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코를 죽이고 나흘째 되던 날 밤, 그게 두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170

몸을 더욱더 작게 웅크리고 손끝만 벽의 스위치에 내밀어붉은 등을 껐다. 암실은 완전한 암흑에 감싸였다. 그는 작은 개미가 되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차례 끊기는가 싶더니 다시 울렸다. 협박자가 또 전화한 것일까. 아니면 그자가 정말로 경찰에 가서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을 신고한 것일까. - P170

9장 누군가 誰か

"전화를 안 받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벌써 옷을벗은 채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기타가와가 어딘가 외출한다고 했어?"
여자애는 백치처럼 입을 헤벌린 채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분명 요시다 가즈코라고 했다. - P174

그가 화를 낸 것은 우선 이 여자애 때문이었다. 애교 있는 달달한 목소리에 보통 남자라면 욕망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단지 짜증을 부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어딘지 미오리 레이코와 비슷했다. - P174

남자만 사랑하고 여자라면 모조리 미워하는 프랑스인이레이코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코는 어떤 일도 당한 적이 없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 질투 나지 않아? 그 늙은이와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난 그런 남자, 사랑하지 않아." - P175

이다.
그렇게 레이코는 오히려 큰 성공이라는 듯이 말했던 것
"몸에 상처는 나지 않았어?"
"전혀 걱정할 거 없어. 나는 성공하고 싶거든. 유럽에서도유명해질 거야. 마르탱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아픔이라도 견뎌야지. 게다가 나는 상처 따위 무섭지 않아. 인간의 몸이란 상처 입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하긴 중요한 상품이니까 조심해야겠네."
항상 아래로 숙여서 쓸쓸해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코는 장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 P175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은 항상 피사체가 아닐 때의 레이코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투로 말하곤 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벗어나면 레이코가 어떤 여자인지 전혀 몰라." - P176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오리 레이코는 단지 자신의 꿈에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 P177

레이코는 올해 초부터 느닷없이 그를 미워하며 무서운 말을 퍼부었다.
"다들 피라냐였어. 내 살을 뜯어먹고 이득을 노리는 자들이야. 당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어."
하지만 파티에서 그가 소개해준 유명 인사들을 수수께끼같은 미소로 차례차례 포로로 만들어가는 레이코는 다른 누구보다 힘센 피라냐로 세계 전부를 뜯어먹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 P177

"패션계 같은 좁은 세계에서 톱에 올라봤자 별거 없어. 더유명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야지."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때도 몹시차가운 무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서는 그전보다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 P178

"뉴욕의 내 친구가 <라이프>지 편집에 발언권을 가진 사람을 잘 안다는데 좀 도와줄래요?"
바로 작년 봄에만 해도 그런 말을 했었다.
<라이프>지 표지에 실리는 거, 예전부터 내 꿈이었어. 하지만 그 사람, 마르탱처럼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다네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잖아. 그 대신 <보그> 편집인은 내 손안에 있으니까 당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실어달라고부탁해볼게."
매사에 결단이 빠른 그는 일 분도 안 되어 <보그>지 여섯페이지를 교환 조건으로 레이코의 부탁에 응했다. - P178

"난 더, 더 유명해지고 싶어."
술에 취한 눈을 허공에 고정한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소리를 들으면 등이 오싹해질 때가 있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그렇게 보였다.
"당신, 사 년 전에 ‘위‘라고 했었지?"
그렇기 때문에 올 3월에 레이코가 갑작스럽게 한 장의 사진을 내밀며 르네 마르탱과 두 사람의 관계를 빌미로 협박했을 때, 전혀 다른 여자가 나타난 것처럼 생경했다. - P178

"내가 정말로 성공 따위를 꿈꾼 줄 알아요? 나는 단지 이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신들과 똑같은 수위까지 타락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마르탱의 더러운 손도, 당신의 창피한 줄 모르는 눈빛도, 진짜 나를 잊게 해주지는 못했어. 문득 돌아보니 엉망으로 망가진 잔해뿐이었어. 당신과 똑같은 쓰레기였다면 아마 이런 잔해 같은 몸이라도 질질 끌고 살아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였어."
그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레이코는 도무지영문 모를 시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대꾸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 P180

올 초에 르네 마르탱의 방에서 오래 전에 훔쳐 왔다는 한장의 사진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을 때부터 언젠가 이 여자를 죽이고 말 거라고 예감했었다. 마르탱과 그가 벌거숭이로 뒤엉킨 수치스러운 사진이었다.  - P181

그로부터 몇 달 동안 그는 단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밤에 그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레이코가 제 손으로 독약을 넣은 술잔과 또 하나의 술잔, 그 두 개를 바꾸기만 하면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끔찍한 협박 재료를 손아귀에 움켜쥔 여자를, 지난 몇 달 동안 자신에게 온갖 굴욕감을 안긴 여자를, 죽일 수 있었다. - P181

"나를 오늘 밤 안에 죽이는거야."
하지만 곧바로 날카로운 웃음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하긴 소심하고 못나 빠져서 당신은 그럴 용기도 없지."
그녀의 비웃음을 보며 마침내 레이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 P182

오 분 뒤, 자기 대신 범인이 되어줄 의사의 전화가 걸려오고 레이코가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이 사람, 집에 가서 또 혼자 술을 마신 모양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의 결심을 재확인했다. 다시 오 분이 지나 레이코가 침실에 담요를 찾으러 갔을 때, 그의 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 개의 술잔을 바꿔치기했다. - P182

 레이코가 몸을 뒤틀며 거친파도처럼 침실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삼 초 뒤에는 침대 위에서 이미 숨을 거둔 레이코를똑같은 미소로 내려다보았다.
입에서 황갈색 액체가 흘러나와 긴 줄을 그리며 목을 타고 흘러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 스웨터의 가슴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겪었던 굴욕감이 마침내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 P183

"가슴에 상처가 남았어. 한동안 남들 앞에서 옷은 못 벗어오늘 쇼 무대 때 옷 갈아입는 건 당신 혼자서 도와줘."
쇼가 시작되고 대기실 한쪽에서 드레스를 벗겼을 때, 레이코의 왼쪽 가슴 나비 문신에 또렷한 쇠사슬 자국이 찍혀 있었다.
똑같은 상흔이 그의 가슴에 조금 더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레이코는 알지 못했다. - P184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만일 여자들이 그의 나신을 볼 기회를 가졌다면 역시 상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사람, 레이코만 유일하게그의 몸에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벌거벗은 제 몸을 그의 몸에 맞대며 말하곤 했다.
"그 썩어 문드러진 몸으로 나를 안을 수 있으면 안아봐. 그러면 용서해줄 테니까."
그러고는 빨간색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으로 그의온몸을 애무했다. 증오감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여자의 애무는 채찍이나 사슬보다 더 격한 고통을 그의 몸에 안기곤 했다. - P184

깔끔하게 거실의 지문도 처리했다. (중략). 범죄를 저지른 덕에 미모에 한층 깊이가 더해진 것 같았다. 그는 거울 속에서 그 아름다운 애인에게 아주 잘했어, 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머플러로 얼굴 아래 부분을 감싸고 깊숙이 눌러쓴 모자 차양으로 얼굴 윗부분을 가린 채 맨션을 나섰다………
"나는 뭘 하면 될까요?"
곁에서 여자애가 물었다. 그는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어느새 자신의 침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P185

그는 말없이 베갯머리로 다가가 꽃병 속의 장미를 모조리뽑아 침대에 던졌다. (중략). 순순히 옷을 벗은 여자애는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침대 위의 장미꽃과 그의 너무도 차가운 눈빛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싶어? 그럼 그 전에 이 장미의상을 걸치지 않으면 안 돼."
순간, 여자애의 눈에 공포가 내달렸다. - P186

"걱정할 거 없어. 이건 일종의 의식이야. 내가 디자인한 이최고의 의상을 소화해내지 못하면 넌 앞으로 어떤 옷도 입을 수없어."
사실 그건 그의 디자인이 아니라 르네 마르탱이 사랑과 증오의 제물들을 위해 고안해낸 의상이었다. - P186

여자애는 드러누운 채 머뭇머뭇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꽃 조각이 자글거렸다. 그때마다 농밀한 향기가방 안의 밤기운에 번져갔다.
"이게 내가 주는 아름다움의 세례야."
육년 전 르네 마르탱이 했던 말을 그대로 입에 올렸을 때,
돌연 베갯머리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짜증 난 손길로 수화기를들었다.
"이나키 요헤이 씨?" - P187

"조금 전에 두 번 전화했는데 두 번 다 통화 중이더군. 실은 내가 그날 밤 우연히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다가 당신이 안색이 홱 변한 채 비상계단을 뛰어내려와 도망치는 것을목격했어. 당신 얼굴은 잡지에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잘 알고있어."
"그날 밤이라니, 어떤 밤이라는거야?"
"11월의 그날 밤, 당신이 미오리 레이코를 죽인 날밤."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나는 그때 머플러로 얼굴을 가려서...."
실언이라는 것을 깨닫고 저절로 앗 하고 부르짖었을 때, 그보다 큰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애가 움직였던 것이다. - P188

전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늘 저녁에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엽총 자살을 한 것을 알고 있나? 하지만 사와모리는 레이코를 죽이지 않았어. 실제 범인은 당신이야...." - P188

10장 누군가 誰か

죽은 그 애의 스웨터를 걷어 올리고 왼쪽 젖가슴의 검은 나비에 내 오른쪽 가슴의 빨간 나비를 맞댔다.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곧잘 그렇게 침대 위에서 서로를 탐했다. (중략)
"아, 가엾어라. 너도, 네 젖가슴의 나비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 애의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스웨터를 반듯하게 다듬어주고 내 가슴팍의 단추를 다시 채운뒤에 침실을 나왔다. - P190

문을 닫은 뒤에는 거실에서 뭔가 내 손이 닿은 게 없는지 생각해보았다. 손댄 것이라고는 내가 마시던 술잔과 그 애가 "술 좀 따라줘"라고 했을 때 손에 들었던 브랜디 병, 얼음 집게뿐이었다.
처음 집에 들어올 때 현관문을 여닫는 건 그 애가 했다. 그리고얘기하던 중에 그 애를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되도록 아무것도 손대지 않도록 조심했었다. - P190

소파 앞 테이블에 남은 술잔은 한 개뿐이었다. 그 잔에는의사와 그 애의 지문이 찍혀 있을 뿐이다. 의사가 마셨다는 술잔과 그 애의 술잔을 바꿔치기할 때, 손수건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가지, 그 애가 침실 문 앞에서 죽기 직전에 바닥에 떨어뜨려깨져버린 유리잔에도 내 지문은 찍히지 않았다. - P191

그렇다, 발소리를 들었다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비상계단에서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가려진 얼굴이 누구 얼굴인지 정말로 알아볼 수 있을까.
오...."
"당신 얼굴은 잡지에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방금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분명하게 말했다.
"흥, 장난치지 말아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내 얼굴을 알아봤다니, 거짓말이 틀림없다. - P191

"아무튼 거래를 하자. 내일 밤에 다시 전화할 거야. 그때까지 잘 생각해봐."
"좋아요, 내일 밤 아홉 시에 다시 이 번호로 전화해요. 녹음해서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중략)
전화 목소리는 ‘진범은 당신‘이라고 말했다. 분명 그날 밤,
그 아이를 죽인 건 나다.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유서에 고백한 것은 전화 목소리가 말했던 대로 죽기 전에 엉터리 같은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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