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살인자의 섬‘과 이 소설의 원작 ‘셔터 아일랜드‘가 생각난다.

‘결손‘이란 용어는 신경학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로, 신경 기능의 장애나 불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 말은 말소리상실, 언어상실, 기억상실, 시각상실, 정체성상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능의 상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특정 기능(또는 능력)의 결함이나 상실을 지칭할 때 쓰인다. - P18

뇌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86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브로카가 뇌 좌반구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장애 즉 언어상실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 P20

 19세기 끝 무렵이 되자, 좀더 예리한 관찰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특히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 《언어상실증》에서 기존의 뇌 지도가지나치게 단순하며, 모든 정신활동에는 매우 복잡한 내적 구조가 있고 그와 똑같이 매우 복잡한 생리학적 원리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 P20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러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A. R. 루리야(그리고 그의 부친 R. A. 루리야), 레온체프, 아노킨, 번스틴과 그 밖의 여러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고, 그것에 신경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 P20

신경심리학은 《인간의 상위뇌피질기능》 (영어판은 1966년)이란 기념비적인 책 안에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또한 일종의 전기 즉 ‘병적학‘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영어판은 1972년)에도 실렸다.  - P20

‘열등한‘ 반구라고 불리는 멸시를 당할 정도로 우반구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좌반구의 손상부위와 그에 따른 증상을 밝혀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었던 데반해, 우반구의 각 영역에 해당하는 증후군은 알아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 P21

과거에도 우반구의 증후군을 연구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아니다(예를 들면 1890년대의 안톤과 1928년의 푀츨). 그러나 우반구를 연구하려는 시도는 어쩐 일인지 번번이 무시되고 말았다.  - P21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발표하지 못했고 그후에도 소련에서는 출간되지 않았다. 그는 우반구를 다룬논문을 영국의 R. L. 그레고리에게 보냈고, 그레고리가 자신이 편집중이던 《옥스퍼드 컴패니언, 정신편》에 실었던 것이다. - P22

우반구를 연구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환자 스스로 자신의 증상을 알 수가 없고 게다가 외부 관찰자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반구 증후군에 시달리는 경우, 환자 본인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 P22

 우반구 증후군은 좌반구 증후군과 거의 같은 빈도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반구 증후군이 신경정신학과 신경심리학의 문헌에 얼굴을 내미는 빈도는 터무니없이 떨어진다. 우반구 증후군의 서술이 1이라면 좌반구 증후군의 서술은 1,000정도의 비율이다. - P22

 우반구 증후군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 새로운 유형의 신경학은 ‘개인 주체의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루리야가 특히 즐겨 사용한 용어를 빌려서 ‘낭만적‘ 과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과학에서는 ‘자기‘라든가 ‘인격‘의 밑바탕에 있는 기초가 밝혀지고 검증되기 때문이다. - P23

 즉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와 대비되는 병력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루리야는 죽기 직전에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이야기를, 설령 스케치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꼭 발표하기바랍니다. 그것은 엄청난 경이의 세계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러한 장애에 각별한 흥미를 지니고 있다. - P23

당시 내가 흥미를 품었던 분야는 지금까지 말한 ‘결손‘보다는 오히려 ‘자기‘ 그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경장애였다. 이러한 장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고 또한 기능의 결손이 아니라 기능의 과잉이 원인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일단 구분해서 별도로 생각하는 방법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 P23

아이비 맥킨지는 이 점을 당당하게 서술했다.

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P24

 특히 프로이트는 이 방면에 매우 심혈을 기울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편집광의 망상이란 산산이 부서져 혼돈으로 변한 세계를 무언가에 의해 보상받고 다시 한 번 재구축하는 노력의 결과라고 한다. - P24

 프로이트와 똑같은 견해를 아이비 맥킨지는 이렇게 피력했다.

파킨슨 증후군의 치료란 혼돈에서의 복구라고 말할 수 있다. 조화를이루던 것이 무너지고 최초의 혼돈이 온다. 그것이 재활지도를 통해 아직은 불안정한 토대 위에서 재통합되는 것이다.

《깨어남》은 어떤 하나의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복구와 재통합‘을 묘사한 연구이다. - P25

제1부 ‘상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히 특수한 시각적 인식불능증‘의 예, 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P25

이것이 마비 또는 상실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감정과 구체적 즉흥적인태도뿐이라는 것이다(1860년대의 휴링스 잭슨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음악가 선생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그는감정, 구체성, 개인적인 것, 현실적인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그렇다고는해도 이것은 시각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 추상적·범주적인 것만을 부둥켜안고 살며 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곤 했던 것이다. - P25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P선생은 오랫동안 뛰어난 성악가로 명성을 날렸던 지방의 음악교사였다. 그에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음악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무렵이었다. 학생들이 자기 앞으로 다가와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학생이 말을 걸면 목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누구인지를 알았다. - P27

거리를 거닐다가 소화전이나 주차요금 자동징수기를 보면 마치아이들의 머리라도 본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구의 장식을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가 아무런 대답이 없어 깜짝 놀라기도했다. 주변 사람들도 처음 한동안은 그가 착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웃어넘겼다. P 자신도 웃었다. 그에게는 남다른 유머감각이 있었고선문답처럼 들리는 역설과 과장이 그의 장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P27

 게다가 그의 실수들이 어찌나 익살맞으면서도 재기가 넘쳐 보이던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또 앞으로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에 그가 당뇨병에 걸리고 나서부터였다. - P28

 의사는 "선생의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담당하는 뇌 부분에 문제가 있네요. 저보다는신경전문의에게 가보세요." 하고 말했다. P선생이 나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 P28

그러나 약간 이상한 점도 있었다. 나를 쳐다보면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 느낌으로 그의 귀는 분명 나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눈은 아닌 것 같았다. 보통 평범하게 사람을 쳐다보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던것이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 P28

잠깐 밖으로 나와 그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보니, P선생은 창가에서 평온하게 창밖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다기보다는 듣고 있었다.
"차 다니는 소리가 들리네요. 저기 멀리서 기차 소리도 들리고요. 마치 교향곡처럼 들리지 않나요? 혹시 오네게르의 <퍼시픽 231>이라는 곡을 아시나요?"
정말로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런 멀쩡한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걸까? 검사를 해보자고 하면 혹시 언짢아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셔야죠. 의사 선생님" - P29

 처음으로 이상한 점이 눈에 띈 것은 반사 반응을 검사할 때였다. 왼쪽 구두를 벗기고 열쇠로 발바닥을 긁자 작은이상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시시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것은 반사 반응을 검사할 때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정 중 하나이다.  - P29

"좀 도와드릴까요?"
"뭘요? 누구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선생님이 신을 신는 것 말입니다."
"아차 신을 깜빡했군."
(중략).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시선이 자기 발에 가서 딱 멈추었다.
"이게 내 신 맞죠?"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면 그가 잘못 본 것일까?
손을 자신의 발에 갖다대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 P30

농담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님 미쳤을까? 아니면 정말 눈이 안보이는 것일까? 이게 바로 그가 말하는 ‘이상한 실수‘라면, 그것은 내가본 중에 가장 이상한 실수일 것이다.
더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가 신(그의발)을 신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 P30

그의 반응은 아주 이상했다. 그의 눈은 내 얼굴을 쳐다볼 때처럼 여기저기로 빠르게 옮겨다니며 각각의 세세한 특징을 잡아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밝게 빛나는 것이나 색채, 형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설명을 했다. 그러나 결코 장면 전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 P31

"이 사진이 뭐로 보이시나요?"
"강이군요. 물 위로 테라스가 딸린 작은 집이 있고, 사람들이테라스에 나와 식사를 하고 있고요. 색색의 파라솔이 여기저기에 보이네요."
그는 표지에서 시선을 떼고 허공을 보면서(본다는 말이 맞기나 한걸까?) 사진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꾸며대서 말하고 있었다. 사진에 있지도 않은 강, 테라스, 색색의 파라솔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31

그는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일까?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늘 있어온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 P31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한 번 더 그를 만나봐야 했다. 그것도 그의 평소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바로 그의 집에서 며칠 뒤 나는 P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내 가방 안에는 <시인의사랑>의 악보(나는 그가 슈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와 지각 검사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 P32

 책도 있고, 그림도 있었지만,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음악이었다. P 선생이 들어 왔다. 그러나 정신은 딴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면서도 그는 자꾸만 커다란 벽시계를 향해 가고 있었다. - P32

P선생의 관자엽에는 분명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피질은 음악에 관한 한 완벽했다. 문득 마루엽과 뒤통수엽 그중에서도 시각에 관여하는 부분에 문제가 발생했는지 궁금해졌다.  - P33

추상적인 형태를 인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얼굴은? 나는 카드 한 벌을 꺼냈다. 그는 모든 카드를 제대로골라냈다. 잭, 퀸, 조커까지도. 그러나 카드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모두 정형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그가 얼굴을 보고 구별해냈는지, 아니면 그냥 패턴만을 보고 골라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 P33

(전략). 그러나 만화 역시 형식적이고 도식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그가 진짜 얼굴 즉 사실적으로표현된 얼굴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P33

소리가 안 나오게 한 채로 텔레비전을 틀자, 베티 데이비스의초창기 영화가 나왔다. 러브신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P선생은 배우가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베티 데이비스를 원래부터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 기가 찰 노릇은 그가 그녀나 상대 배우의 얼굴 표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P34

 나는 사진들을 한데 모아 그에게 보여주면서 조금은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는영화를 보여주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실제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거의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가족도, 동료도, 제자도, 자기 자신조차도 아인슈타인의 사진은 알아봤지만 그것은 특이한 머리와 콧수염 덕분이었다. - P34

 그의 전반적인 인지 방식에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대할 때 그가 보이는 반응은 마치 추상적인 퍼즐 검사를 받는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친척이나 친한 사람의 사진일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P35

 그는 모든 것을 그저 형태로만 대했다. 게다가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하는 데도무관심했다. 우리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개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의 개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얼굴이 전혀 그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얼굴의 겉모습도,
얼굴 속에 들어 있는 내면의 개성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P35

나는 그의 집에 오기 전에 꽃집에 들러 화려한 붉은 장미 한송이를 샀고 그것을 윗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을 빼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표본을 받아든 식물학자나 형태학자 같은 행동을 했다. 꽃을 받는 사람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길이가 15센티미터 정도군요. 붉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초록색으로 된 기다란 것이 붙어 있네요."
나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맞아요. 그게 뭐 같나요?"
"뭐라고 콕 꼬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네요." - P35

내 말에 그는 다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차원적인 대칭성을 냄새로 알아내라는 말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점잖게 그것을 코에 갖다댔다.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예쁘군요! 철 이른 장미. 정말 천국 같은 향기예요!"
그는 "장미, 백합...." 하고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시각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 실체를 인식한 것처럼 보였다. - P36

나는 장갑을 들어올리며 뭐냐고 물었다.
"조사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장갑을 손에 들고 마치 기하학적인 형태를 조사하는 것처럼 자세하게 조사해나갔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표면이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어요. 주름이 잡혀 있군요. 음, 또 주머니가 다섯 개 달려 있는 것 같군요. 음, 말하자면..."
그가 주저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설명을 하셨으니 이제 그게 뭔지 말해보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 P36

나는 말이 엉뚱한 데로 흐르는 것을 막았다.
"뭔가 흔히 보던 것 같지 않나요? 몸의 일부를 넣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그의 얼굴에는 뭔가를 알아냈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장갑을 보고 "표면이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중에 우연히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는 그는 소리쳤다. "아니 이거 장갑이잖아!"라고. 이런 모습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쿠르트 골드슈타인의 환자라누터이다. 그는 물건을 실제로 사용해보아야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 P37

 그러나 P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어떤 물건 앞에서도 그것을 친숙한 물건으로 보지 않았다. 시각적인 면에서 볼 때, 그는 생기가 없는 추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현실의 시각 세계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현실의 시각적 자아가 없었다.  - P37

 휴링스 잭슨은 언어상실증이나 좌반구 장애 환자들은
‘추상적이거나 ‘명제적인 사고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환자들을 개에 비유한다(사실은 개를 언어상실증 환자에 비유한다). 그러나 P선생의 뇌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기능했다. 시각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면에서 그는 컴퓨터와 똑같았다.  - P37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검사로는 P선생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시각적 기억력이나 상상력에는 아직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 집 근처에 있는 광장을 북쪽에서부터 걸어온다고 상상하면서 거리에 보이는 건물들에 대해 말해달라고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은 말했지만 왼쪽에 있는 건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 P38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시각화하고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데 거의 환상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작가인 톨스토이가 떠오른나는 P선생에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질문해보았다. 그는 소설 속에 나오는 사건들을 쉽게 기억해냈을 뿐만 아니라 줄거리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각적인 특징이나 시각과 관련된 사건 그리고시각적인 장면은 하나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 P38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이런 장애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시각화 능력의 장애는 얼굴이나 장면의 시각화 또는 시각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야기나 드라마의 경우에만 크게 드러났다(시각화의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식과 관련된 시각화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아니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39

루리야는 자제츠키가 게임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생생한 상상력‘만큼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P39

(전략), 잃어버린 자신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끈질기게 싸운 반면에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일까? 둘 중 누가 더 지옥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일까?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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